출처 : http://bit.ly/1jqSWnm
<13>이순신 병법(7):이겨놓고 싸운다
해전에 앞서 이길 수 있는 모든 조건 완비
2012. 04. 02 00:00 입력 | 2013. 01. 05 07:50 수정
이순신이 일궈낸 전승무패의 승리 속에는 치밀하고도 용의주도한 병법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했으며, 해전이 벌어지면 적의 지휘선을 향해 거북선을 투입, 전광석화처럼 격파함으로써 해전의 초기에 적의 지휘체계를 마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수군에게 가장 유리한 곳을 해전 장소로 선택함으로써 조선 수군의 전투역량을 극대화했으며, 명량해전처럼 절대 열세의 해전에서는 명량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수적 열세를 극복했다.
사전 정보 토대 작전계획→수적 우세 편성→함포포격 당항포·한산해전 ‘선승구전’ 원리 철저히 준수해 승리
당항포대첩기념탑.
측면에서 본 당항포대첩기념탑.
이와 같은 이순신 병법에 관통하는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겨놓고 싸운다’는 것이다. 병법서 ‘손자’에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뒤에 싸우고,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싸우고 나서 요행히 승리하기를 구한다”는 말이 있다. 이순신은 ‘선승구전(先勝求戰)’의 병법 원리를 철저히 준수했다.
임진년 1차 출동 시 동원된 조선의 함선은 지원선을 포함해 91척이었다. 임진년(1592년) 5월 7일 정오경, 옥포만에서 발견된 일본 함선은 30척이었다. 첫 해전이었기 때문에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벌어진 해전이었지만 해전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순신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도망가려는 일본 함대를 가로막아 적극적인 공격을 펼쳐 26척을 격파했다. 이순신은 이어서 같은 날 오후 웅천 지역의 합포에서 5척을 격파했으며, 그 이튿날인 5월 8일에는 적진 포에 13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동해 모조리 격파, 분멸(焚滅)했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한 치밀한 작전계획, 분산된 일본 수군에 대한 조선 수군의 수적 우세, 함포포격전을 위주로 한 조선 수군의 강력한 전투력 등 이순신은 해전에 앞서 이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완비하고 있었다.
1차 출동을 통해 일본 수군의 전투력을 확인한 이순신은 2차 출동부터는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함대결전(艦隊決戰) 전략’을 구사했다.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으며, 일본 함대를 발견하면 좁은 포구로부터 넓은 바다로 유인해 결전(決戰)을 벌임으로써 함포포격전술을 구사하는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극대화했다. 넓은 바다로의 유인술에 이은 함포포격전의 적극적 전개는 전투력 우위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채택하기 어려운 전술이다.
다음은 임진년 제2차 출동 중에 벌어진 당항포 해전을 묘사한 장계다. “그런데 신(臣)의 생각으로는 만약 저 적들이 형세가 궁해져 배를 버리고 상륙하면 모조리 섬멸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우리가 거짓으로 포위를 풀고 퇴군하는 것처럼 진을 후퇴시키면 적들이 반드시 그 틈을 타서 배를 옮길 것이니 그때 좌우에서 쫓아 공격하면 거의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령한 뒤에 퇴군해 한쪽을 풀어주었습니다. 과연 층각선이 열어 준 길을 따라 나오는데…. 우리의 전선이 사면으로 포위하면서 재빠르게 협공하고, 돌격장이 탄 거북선이 또 층각선 밑으로 돌진해 총통을 치쏘아 그 배의 누각을 쳐부쉈습니다. 또 여러 전선이 불화살로 그 층각선의 비단 장막과 돛을 쏘아 맞히자 맹렬한 불길이 일어나고. 허다한 적도들은 물에 빠지기 바쁘고 혹은 기슭을 타고 올라가며 혹은 산으로 올라 북쪽으로 도망치는지라….” 당항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43급의 일본 병사 머리를 베고 또 조우한 일본 함선 26척을 모조리 격파했다.
당항포 해전은 해전 직전에 이억기가 지휘하는 전라우수영함대가 합세함으로써 전라 좌·우수영, 경상우수영의 함선이 모두 51척에 달했다. 전투력 우위를 확신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이 육지로 도망가지 못하게 넓은 바다로 유인해 총통 공격에 의한 격파, 활에 의한 사살, 화공(火攻)에 의한 분멸을 통해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 당항포 해전은 이겨놓고 싸운 대표적인 해전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해전은 이제까지 열세했던 해전, 불리했던 해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조선의 함선이 50여 척이고 일본의 함선이 70여 척이니 피상적으로 보면 조선 수군이 열세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본 측 자료를 보면 한산해전에 동원된 조선의 함선은 거북선 3척, 판옥선 55척, 지원선 50척 모두 108척이다. 전투력의 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수적 측면에서도 열세가 아니었다.
한산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592년 7월 7일 저녁, 일본 함대가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밤새워 작전계획 수립에 몰두한다. 이때 중요하게 고려된 요소가 일본 함선에 타고 있는 병사들까지 모두 전멸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소 일본 수군들은 해전을 벌이다 불리하면 육지에 배를 두고 도망가곤 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빈 배만 격파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장계를 확인해 본다.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히게 되어 싸움하기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해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육지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한산해전은 이순신이 머릿속에 그렸던 작전계획대로 정확히 진행됐다. 이순신은 먼저 판옥선 5, 6척을 투입해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했다. 이어서 조선의 주력함대는 추격해 오는 일본 함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학익진(鶴翼陣)을 벌여 선두의 2, 3척을 순식간에 격파했다. 마지막으로 사기가 떨어진 일본 함대가 도망가기 시작하자 조선의 함대가 일제히 돌진해 각개 격파했다.
해전 결과 조선 함대는 단 1척도 함선 피해가 없었던 반면, 일본 함대는 73척 중 42척이 격파되고, 17척이 나포됐다. 도망에 성공한 일본 함선은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모두 14척에 불과했다. 전멸에 가까운 패배나 다름이 없었다. 이순신이 예측한 것처럼 일본 수군은 해전의 와중에 400여 명이 한산도에 배를 대고 뭍으로 도망했지만 섬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당항포 해전과 마찬가지로 한산해전 또한 이겨놓고 싸운 대표적 해전이다.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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