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nEg3ip
<12>이순신 병법(6):만반의 준비태세는 승리의 기초이다
임진왜란 발발 한달 반 전 전비태세 검열 마쳐
2012. 03. 26 00:00 입력 | 2013. 01. 05 07:48 수정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고려 말 이래 200여 년 동안이나 함포 운용의 노하우가 축적된 군이었다. 또 명종 10년(1555년)부터 판옥선이 운영되기 시작했으니 판옥선에 총통을 싣고 운용한 기간도 40년 가까이 됐다. 이런 자랑스러운 해양 전통과 선각자들의 피와 땀이 묻어난 준비는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토대가 됐다.
훈련 참관하고 틈틈이 지휘관 등과 활쏴 전비태세 점검 결과 미비하면 엄한 처벌 임란 발발 하루 전에 거북선 전력화 완료
항만 방어용 쇠줄을 설치한 전라좌수영 동쪽 소포 전경.
진남관 앞 여수항 전경.
전라좌수영 순천부 선소.
전라좌수영 방답진 선소.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어떤 전쟁 준비를 했을까. 일기를 적기 시작한 1592년 1월 1일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4월 13일까지의 일기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전쟁준비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은 임진년(1592년) 1월 11일 전라좌수영 항만 방어를 위해 쇠사슬 설치용 돌을 준비했고, 1월 12일에는 전라좌수영 본영과 각 포구의 진무(鎭撫)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았다. 1월 16일에는 함선을 제대로 수리하지 않은 죄를 물어 방답진의 함선 관리 책임자인 군관과 관리들에게 곤장을 때렸다. 1592년 1월의 주요 일정을 정리해 보면, 군항 방어를 위한 쇠사슬 설치 준비, 병사들의 활 쏘는 능력 시험, 함선의 보수 및 정비 등이다.
2월 4일에는 전라좌수영 북쪽 산봉우리에 있는 봉화대를 점검하고, 8일에는 거북선의 돛을 만드는 데 사용할 베 29필을 확보했으며, 같은 날 오후에는 장교들에게 활쏘기 시합을 시켰다. 11일에는 새로 뽑은 군사들을 점고(點考)했으며, 15일에는 새로 쌓은 해자(垓字) 구덩이가 무너져 책임자를 처벌하고 다시 쌓게 했다. 그리고 19일부터 27일까지 9일 동안 예하 부대에 대한 순시에 나섰다.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지 꼭 1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그동안 전쟁 준비를 위해 지시했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의 순시였다. 2월 19일 당일에는 여천군(현재 여수시)의 백야곶, 순천을 지나 여도(呂島)에 이르러 전투준비태세를 검열했다. 이튿날인 20일 아침에 좀 더 자세히 여도의 함선을 점고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든 것이었고 무기도 상당히 갖추어져 있음을 확인했다. 22일에는 녹도(島)에 이르렀다. 먼저 흥양(興陽)의 배 만드는 곳으로 가서 함선과 해전에 사용할 기구 등을 점검했다. 그리고는 녹도로 가서 새로 쌓은 성의 문루 위에 올라가 녹도진의 성을 바라보니 준비가 잘 된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기에 “(녹도)만호의 애쓴 정성이 안 미친 곳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녹도만호진의 전투준비 태세가 마음에 들었던지 이순신은 대포 쏘는 훈련까지도 참관했으며, 점검이 끝난 뒤 녹도 만호 정운(鄭運)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순신이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하는 시기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정운의 건의를 받고 즉시 그 이튿날로 출동 일자를 결정하는데, 이렇게 된 데는 정운에 대한 신뢰가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2월 23일에는 발포(鉢浦) 만호진, 24일에는 사도(蛇渡) 첨사진의 함선을 점검했다. 25일 아침, 본격적으로 사도 첨사진의 전비태세를 점검했는데 이순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色吏)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어 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가장 못하건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 아마도 이순신이 순시할 당시 사도 첨사에 대한 순찰사의 표창 장계가 조정에 올라간 상태였던 것 같다. 만약 처벌한다면 그것은 자신보다 상관인 순찰사의 조치를 뒤집는 것이 되니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의 자조 섞인 탄식이다. 26일에는 방답(防踏) 첨사진을 순시했다. “장편전은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어 참으로 딱했으나 전선은 조금 완전하니 반가웠다.” 전라좌수영 예하의 여러 포구의 전비태세를 점검한 결과 여도와 녹도만호가 최상의 평가를 받았으며, 방답 첨사는 중간쯤, 그리고 사도 첨사는 최하의 평가를 받았다. 이순신은 2월 27일 모든 점검을 마치고 여수 본영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달 반 전에 예하 부대 전비태세 검열을 모두 마친 것이다.
여수 본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3월 4일에는 여수 본영 서문 밖 해자 구덩이를 보수하고 성벽을 더 높이 쌓아올렸다. 3월 2일과 4일 일기에는 승군(僧軍) 100여 명이 전라좌수영의 전투준비에 동원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렇게 보면 전라좌수영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스님들에 대한 동원령이 선포된 것으로 보인다. 5일에는 좌의정이었던 류성룡의 편지와 그가 보내 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병법서를 받았다. 거기에는 해전과 육전, 그리고 화공(火攻)에 대한 전술이 들어 있었다. 이 책은 이순신이 화공을 포함한 자신의 해전전술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었던 것 같다. 6일에는 여수 본영의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갑옷·투구·전통·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서 볼품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와 궁장(弓匠), 감고(監考)들을 처벌했다.” 이순신은 공무를 처리하는 틈틈이 예하 지휘관·참모들과 활을 쏘았다. 해전 전술에서 활에 의한 공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뒤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해전에서 활은 조총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었다. 27일에는 전라좌수영 동쪽 소포(召浦)에서 항만 방어용 쇠사슬 설치 작업하는 것을 감독했으며, 거북선에서 총통 쏘는 것도 시험했다.
4월 11일에는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를 만들었으며,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4월 12일에는 이순신 전비태세의 백미인 거북선의 전력화가 완료된다.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현자총통을 쏘아 보았다.” 적어도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 좌수군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까지 전비태세를 끝내 놓고 있었다. 옥포해전부터 일궈낸 전라 좌수군 중심의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이처럼 철저한 전투준비의 결과였으니, ‘준비 없는 승리는 결단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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