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lmZJUH
<9>이순신 병법(3): 싸울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라
시간·장소 의도대로 선택해 주도권 장악
2012. 03. 05 00:00 입력 | 2013. 01. 05 07:44 수정
전투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요체는 승리하기에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어느 쪽이 선점하느냐에 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가 정보다. 아군은 적군을 알고 적군은 아군이 언제 어디서 공격할지 모르는 상태라야 아군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거의 모든 해전에서 그가 원하는 장소·시간에 해전을 벌여 주도권을 장악했다.
거의 모든 해전에서 정보력 등 앞세워 승리 수적 열세에도 가장 유리한 상황 전개 전투
거의 모든 해전에서 정보력 등 앞세워 승리 수적 열세에도 가장 유리한 상황 전개 전투
한산대첩기념비. 연합뉴스
임진년(1592년) 제1차 출동 중 벌어지는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함대는 항상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따라 일본 수군을 색출해 격파했다. 일본 함대는 대개 해전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노략질을 하다가 조선 함대를 만나 궤멸되곤 했다.
다음은 이순신이 벌인 최초 해전이었던 옥포해전을 끝낸 뒤 보낸 장계(狀啓)다. “적도들은 포구에 들어가 분탕질을 하여 연기가 산을 덮었는데, 우리의 군선을 돌아보고는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면서 급하게 노를 저어 중앙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으로만 배를 몰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6척이 선봉으로 달려 나오므로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일심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배 안에 있는 장병들도 그 뜻을 본받아 분발하고 격려하여, 죽기를 기약하며 동서로 충돌하고 둘러싸서 바람과 우레같이 총포와 활을 쏘았습니다. 적들도 총과 활을 쏘다가 기운이 다 되매, 배 안에 있는 물건을 바다에 내던지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며, 화살에 맞은 자, 바다에 떨어져 헤엄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적들은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져 서로 앞을 다투어 바위언덕으로 기어올랐습니다.”
옥포해전의 장계 내용처럼 임진년 초기 해전은 조선의 정예 수군과 옥포·사천·당포·당항포·거제 등 남해 연안지역에 상륙해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 수군과의 해전이었다. 지상전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실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해전을 위한 준비도 미흡했다. 그런 상태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갑자기 나타난 조선 수군과 원하지 않은 장소·시간에 해전을 벌였으니 그 결과는 언제나 전멸에 가까운 패배였다. 일본 수군은 주도권 확보의 요체인 정보력, 싸울 장소와 시간의 선택 등 어느 것 하나 우위에 있는 것이 없었다.
임진년 제2차 출동 중 있었던 사천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 등 네 번의 해전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적극적으로 수색전을 펼쳐 먼저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해전 장소로 적합한지 여부를 판단했으며, 유인술이나 함대 결전(決戰) 등 상황에 맞는 공격 방식을 결정해 조우한 일본 함대를 모조리 격파했다.
다음은 2차 출동 중의 당포해전 직전의 상황을 기록한 장계다. “초 2일 오전 8시에 ‘적선이 당포 선창에 대어 있다’는 말을 듣고 오전 10시쯤 바로 그곳에 도착하니 무려 200여 명의 왜적들이 반은 입성(入城)해 분탕질을 하고, 또 많은 수의 왜적이 성 밖의 험한 곳에 의거해 함께 철환을 쏘았습니다.”
제2차 출동 중 있었던 당포해전 또한 일본 수군이 당포에 상륙해 마을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다가 조선 수군의 수색망에 걸려 공격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진년 제3차 출동에서 벌어진 한산도해전도 마찬가지였다. 한산도 외양의 넓은 바다를 해전 장소로 택한 것은 이순신이었으며, 그는 좁은 견내량에 정박해 있던 일본 수군 73척을 한산도 외양의 넓은 바다로 유인해 59척을 격파, 나포했다. 이순신은 해전이 있기 전날 밤 해전 장소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그리고는 좁은 견내량에서의 판옥선 운영의 어려움, 일본 수군의 해전 회피 및 도주 문제 등을 고려해 한산도 외양의 넓은 바다를 해전 장소로 택했다. 한산도 외양의 넓은 바다는 함포포격전술을 구사하는 조선 수군이 화력 집중을 위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기에 가장 유리한 장소였던 반면 등선백병전이 주요 해전전술이었던 일본 수군에게는 가장 불리한 장소였다.
가장 어려웠던 해전으로 평가되는 명량해전도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이순신이었다. 전라남도 회령포에서 10여 척의 함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2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하루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싸워야 승산이 있을까.
이런 고민을 거쳐 결정한 장소가 명량이었다. 조선 함대 13척이 명량의 물목 바깥 넓은 바다에 포진하고 있다가 명량의 좁은 물목을 5~6열 종대로 빠져나오는 일본 함대를 공략한다면 전체적인 숫자는 13:133의 열세지만 실제로 해전이 벌어지는 전투 국면에서는 오히려 13:5~6으로 우세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 이순신의 계산이었다. 명량의 좁은 물목은 수적으로 열세한 조선 수군에게는 가장 유리한,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 수군에게는 가장 불리한 장소였다. 좁은 명량의 물목에서는 일본 함선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동시에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도 이순신은 싸울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해전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예교성 앞 해상에서 소서행장 부대의 철군로를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은 사천·남해·부산 등지에 있던 일본 수군이 소서행장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바로 봉쇄를 풀고 노량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소서행장 부대를 봉쇄할 경우 전면의 소서행장 부대와 구원하러 오는 후면의 일본 함대에 앞뒤로 협공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함대는 11월 18일 저녁 함대를 노량의 입구로 이동해 구원하러 오는 일본의 함대를 기다렸다. 그리고 11월 19일 새벽 2시쯤 일본 함대가 노량의 물목을 빠져 나오면서 해전이 시작됐다. 북서풍이 부는 겨울이어서 풍상(風上)에 위치한 조·명 수군 연합함대는 화공(火攻)을 펼치기에도 유리했다.
싸울 장소와 시간을 자신의 의도대로 선택함으로써 해전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한 이순신, 그의 승리의 또 하나의 비결이었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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