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p5abyf
<11>이순신 병법(5): 정확한 정보가 아니면 함부로 부대를 움직이지 마라
탐망선·정찰부대 이용 日 치밀하게 파악 후 전투
2012. 03. 19 00:00 입력 | 2013. 01. 05 07:47 수정
병법서 ‘손자’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있다. 승리하기 위한 모든 작전은 정확한 정보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본 이순신 병법, 예컨대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또는 싸울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나는 적을 알되 적은 나를 몰라야 한다.
한산도에서의 정찰부대 운용 상황도
현지인 제공 정보도 활용…敵 세력·위치 꿰뚫어 신뢰할 수 없는 정보엔 무모한 작전명령 안내려
전라우수영 동문 밖 명량대첩비.
다음은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 직전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장계다. “(1592년)5월 7일 새벽에 일제히 출발하여 적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천성, 가덕으로 향하여 가다가 정오쯤 옥포 앞바다에 이르자,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 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神機箭)을 쏘아 급변을 보고하므로 적선이 있음을 알고 다시 여러 장수에게 엄히 당부하기를,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고요하고 무겁기를 태산같이 하라(勿令妄動, 鄭重如山)’고 전령한 뒤에 옥포 바다 가운데로 대열을 지어 일제히 전진한즉….” 옥포해전에 앞서 일본 함대를 발견한 것은 함대의 맨 앞에 있는 척후장이었다.
이순신의 치밀한 정보수집은 임진년 제1차 출동에서 벌어진 세 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해전이 벌어질 때마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함선 세력과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반면에 일본 수군은 상대적으로 남해 연안의 지리에 어두웠고, 임진년 초기에는 경계나 정보 수집을 위한 탐망선을 거의 운용하지 않았다. 파죽지세의 지상전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임진년 다음 해인 계사년(1593년)의 다음 장계는 이순신의 탐망선 운용의 일면을 아주 잘 보여 주고 있다. “신(臣)이 거느린 함선은 전투함이 42척이고 정탐용 작은 배가 52척이며, 우수사 이억기가 거느린 함선은 전투함이 54척이고 정탐용 작은 배가 54척이며, 전쟁기구는 배의 척수에 따라 정비하였습니다.”
1593년 기준 전라 좌·우수영의 함선 세력은 전투함이 96척, 정보를 수집하는 탐망선이 106척이었다. 특히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에는 탐망선이 전투함보다 10척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탐망선의 적극적인 운용은 두 가지 면에서 유익했다. 하나는 전투에 앞서 일본 수군의 규모와 위치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작전계획을 치밀하게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함선의 불필요한 기동을 최소화함으로써 노를 젓는 격군들의 피로를 현저히 감소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탐망선에 의한 정보수집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이 제공하는 정보도 큰 역할을 했다. 다음은 당항포 해전 직전 정보수집 정황에 대한 장계다. “6월 5일 아침,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가 늦어서야 걷혔는데, 거제로 도망친 적을 토벌하려고 돛을 올려 바다로 나오는데 거제에 사는 귀화인 김모 등 7~8명이 조그마한 배에 같이 타고 와서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포에서 쫓긴 왜선이 거제를 지나 고성 땅 당항포로 옮겨 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즉시 함대를 당항포로 이동해 당항포 어귀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의 대·중·소선 26척을 공격해 모조리 격파했다. 한산도 해전 또한 해전이 있기 하루 전인 1592년 7월 6일 저녁나절, 현지인 김천손으로부터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시작된다.
당포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밤새워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뒤 다음날인 7월 7일 이른 아침 한산도 앞바다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사전에 수립된 작전계획대로 좁은 견내량으로부터 한산도 외양의 넓은 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해 내어 학익진을 펼쳐 대부분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의 시작도 정보의 입수로부터 시작된다. 명량해전 이틀 전인 정유년(1597년) 9월 14일, 이순신은 육로를 통해 어란포 부근의 일본 수군 동태를 살피러 갔던 탐망군관 임준영으로부터 “적선 총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이미 (명량의 입구인)어란포 앞바다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본 수군의 공격 시점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이순신은 우수영에 있던 백성들에게 육지로 피신할 것을 지시하고, 명량해전 하루 전인 9월 15일 진도의 벽파정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과연 일본 수군은 바로 다음날인 9월 16일 새벽 조선 수군을 공격해 들어왔다. 이런 공격사실은 사전에 배치해 놓은 정찰부대에 의해 즉시 탐지됐다.
일기에 “이른 아침에 탐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무려 200여 척이 명량으로부터 들어와 결진해 있는 곳으로 곧바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적혀 있다.
명량해전이 있기 약 한 달 전쯤, 전남 회령포에서 10여 척의 함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이진(梨津), 어란포, 벽파정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200~3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추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후퇴하면서도 32척의 탐망선을 운용해 일본 수군의 추격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이순신의 치밀한 정보수집, 분석, 활용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남해 해로 차단 전략을 수행할 때, 이순신은 탐망선뿐만 아니라 정찰부대를 적극 운용했다. 거제도 내해로 통하는 칠천량 앞바다를 감시하는 영등(永登) 정찰부대와 웅천·가덕도 해상과 거제도 외해로 통하는 해로를 감시하는 대금산(大金山) 정찰부대 그리고 고성 쪽의 육지와 바다를 감시하는 벽방산(碧芳山) 정찰부대가 그것이다. 이순신은 이러한 정찰부대들의 활동을 통해 견내량 이동(以東)의 일본군의 동태를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정유년 초, 이순신은 가등청정을 잡으러 출동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령 불복종이란 죄목으로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죽임을 당할지언정 신뢰할 수 없는 정보에 기초해 병사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무모한 작전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왜 위대한 리더인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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