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0>제8대 신대왕
태풍이 한번 휩쓸고 간 뒤에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폐허뿐이다.
그 혼란스러운 폐허 속에서 부서진 물건들을 주우면서 통곡하는 사람들은,
빌어먹을 햇빛이 왜 이렇게 내리쬐느냐고 자칫 울고 싶어질 거다.
그리고 그 빛이 왜 이렇게 강렬한지, 왜 이렇게 밝은 건지.
기분나쁠 정도로 짜증스러운 햇빛에게 괜히 화풀이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그 햇빛을 보며 알수 없는 희망을 느낀다.
앞으로 몇 번이나 폭풍이 오든 해일이 오든, 지진이 일어나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따뜻하게 빛을 내리쬐는 태양을 보며
태풍의 강한 바람이 햇빛마저 꺾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끝나지 않을 것처럼 몰아치는 태풍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며,
언제 그랬냐는듯 밝은 햇빛은 다시 이 세상을 비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저 능청스럽고 넉살 좋은 햇빛을 보면서 왜 저리 밝은 거냐고 화를 내다가,
결국에는 하늘에 삿대질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그만 주저앉아
자기도 왜 웃는지 모르는 빈웃음을 깔깔 터뜨려버리고,
그러고서 어느샌가 다 털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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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성왕, 유류명왕, 대해주류왕의 초기 3대를 거치며 성장한 나라에서,
민중왕과 모본왕의 시대를 거쳐 태조왕과 차대왕의 보이지 않는 암투를 지나,
피로 얼룩진 시대가 끝나고 비로소 새로운 햇빛을 맞이한듯.
고구려 초년의 거대한 태풍 하나가 이제 막 지나갔다.
[新大王, 諱伯固<固一作句> 太祖大王之季弟. 儀表英特, 性仁恕.]
신대왕(新大王)의 휘는 백고(伯固)<고(固)는 구(句)로도 썼다.>이다. 태조대왕의 계제(季弟)다. 용모와 자태가 뛰어나고 성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왕조사관. 흔히 어떤 왕조의 개창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신 내지는 부처처럼
선정을 베풀지만, 대를 내려갈 수록 점점 그 '질'이 떨어지면서 막판에는
온갖 포악한 짓을 다 하는 악랄한 군주가 나타나 백성을 괴롭힌다. 이때에
신하들이나 왕족 가운데 포악한 군주를 몰아내고 다른 새로운 군주를 앉힌다.
포악한 군주 대신 새로운 군주를 앉히는 것을 '정(正)으로 되돌린다'는 뜻의
반정(反正)이라고 부르는데, 명림답부의 반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반정기록이었다. 《논어》안연편 17장에 나오는 공자와 계강자의 문답에서
공자는 정치에 대해서 '바르게 한다'고 정치의 의미를 정의하고 있다.
[初次大王無道, 臣民不親附. 恐有禍亂, 害及於己, 遂遯於山谷. 及次大王被弑, 左輔菸支留與羣公議, 遣人迎致. 及至, 菸支留跪獻國璽曰 “先君不幸棄國. 雖有子, 不克有國家. 夫人之心, 歸于至仁, 謹拜稽首, 請卽尊位.” 於是, 俯伏三讓而後卽位, 時年七十七歲.]
처음에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화란이 생겨서 해가 자신에게 미칠까봐 두려워서 마침내 산골로 숨었다. 차대왕이 피살되자 좌보(左輔) 어지류(菸支留)가 여러 공(公)과 함께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맞이하였다. 이르니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였다.
“선왕[先君]께서 불행히도 나라를 버리셨습니다. 비록 아들이 있다 하나 국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란 지극히 어진 이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삼가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려 왕위에 오르기를 청하나이다.”
이에 엎드려 세 번을 사양한 후에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가 77세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즉위전기
좌보 어지류. 차대왕이 살해되자 가장 먼저 백고를 불러들여
국새를 내어 주고 왕위에 앉힌 인물. 원래 환나부 소속의 우태로서,
차대왕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그에게서 좌보(좌의정) 겸 대주부의 직위를 얻었던 자.
명림답부의 반란 때 그는 차대왕의 시해를 방조 내지는 적극 협력했음을
이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폭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내세워
정치를 바로잡는, 말 그대로 반정(反正). 우리 역사상 최초의 반정이지만,
하나도 탁 트이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왕과 함께 죽던지
왕을 위해 싸워야 할 사람들이 갑자기 나서지 않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숨어서, 새로운 왕에게 앞다투어 달려가
무릎꿇고 잘봐달라며 개처럼 꼬리 흔드는 꼬락서니 때문일까.
깐깐쟁이 안정복 영감은 명림답부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으신다.
수성(차대왕)의 포악함은 사람마다 벌할 수[誅] 있었지만, 답부가 찬탈할 때 그의 죄를 들어 성토하고 어진 임금을 세우려 했으면 누가 안된다 했겠는가? 그런데 신하가 되어갖고 20년을 섬기다 몸소 시역(弑逆)했으니, 필시 자신에게 급박한 화가 있었고, 또 부귀할 마음이 함께 흔들려서 그런 것이다.
안정복 영감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명림답부라는 이 남자의 소속,
즉 호적등본 떼려면 가야하는 곳인 '연나부'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처음 차대왕 고수성이 형인 태조왕을 몰아내고자 했을 때에,
그에게 왕위 찬탈을 아뢴 인물들은 관나우태 미류, 환나우태 어지류와 비류나조의 양신.
세 명 다 각기 특정 부(部)에 속한 사람들임을 알수 있다.
차대왕을 왕으로 즉위시키는데 힘을 보탠 것은 관나(관노)부와 환나(순노)부,
비류나(소노)부의 세 부였고, 연나(절노)부는 가담하지 않았다.
명림답부는 바로 이 연나부에 속한 하급 조의였다.
차대왕의 입장에서 보면 찬성도 아닌 것이 반대도 아닌 것이 조금 떨떠름했을터.
그 연나부에서 차대왕을 죽이게 될줄은, 그도 어느 정도 예상한 바는 아니었을까?
[二年, 春正月, 下令曰 “寡人生忝王親, 本非君德. 向屬友于之政, 頗乖貽厥之謨. 畏害難安, 離羣遠遯, 洎聞凶訃, 但極哀摧. 豈謂百姓樂推, 群公勸進? 謬以眇末, 據于崇高. 不敢遑寧, 如涉淵海. 宜推恩而及遠, 遂與衆而自新, 可大赦國內.” 國人旣聞赦令, 無不歡呼慶抃, 曰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2년(166)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과인은 부끄럽게도 왕친(王親)으로 태어났지만 본래 왕으로서의 덕망[君德]이 없었다. 예전에는 형제의 우애로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더니 그 끼쳐준 대업(大業)을 어그러지게 하였다. 해를 입을 것이 두렵고 편안하지 못하여 무리를 떠나 멀리 숨었다가 흉보(凶訃)를 듣고 다만 몹시나 슬퍼할 뿐이었다. 백성들이 기꺼이 받들고 군공(郡公)들이 나아가도록 권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보잘것없는 몸이 자칫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편안할 겨를이 없이 바다 위를 걷는 것 같다. 마땅히 은혜를 베풀어 멀리 미치게 하고 백성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하고 나라 안에 크게 사면을 베풀 것이다.”
국인(國人)이 사면의 명령을 듣고, 모두 기뻐 소리지르고 손뼉을 치며
“크도다! 신대왕의 덕이여!”
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고구려 초기, 국왕의 이름으로 내려진 죄수 사면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에
한국고전번역원 회지 <민족문화>에 실린 「고구려 전기의 사면령」에 정리가 상세한데,
그 논문을 쓴 사람이 놀랍게도 고등학생. 그것도 본인이 《삼국사》원문을 직접 읽고
그걸 직접 해석하는 과정에서 지은 것이라고 하니 또 감탄한다.
후생가외(後生可畏)란 이런 것을 말함일까. 국사를 공부한다고 딴에 자부했건만
이런 식으로 자존심이 상하게 될 줄이야. 여기서는 그걸 인용해 적을 것이다.
고구려 초기 기록에 나오는 사면기록의 신빙성 여부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에도 이의제기가 있었다. 고구려 초기 '사면'을 베풀었던 것이
왕이냐 아니면 제가(귀척)냐, 이러한 '사면'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일정한 '정치적 장치'와
'성문화된 법령'이 존재했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이 기록의 신빙성은 위협을 받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 이전, 율령반포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부여에서도
은력 정월의 영고제 때면 "죄수들을 심판하고 풀어주었다[於時是斷形獄, 解囚徒]."고
한 《삼국지》기록에서 보이듯 사면령 자체는 율령과는 별반 상관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부여에서 율령을 반포했더라도 중국의 성문화된 그것과는 다른 면이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중국측 기록에 빠졌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후한서》나 《삼국지》에선 고구려의 사정을 전하면서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다[無牢獄]"고 적고 죄인들의 판결 및 처벌에 대해서도
"여러 가들이 서로 의논해서 사형시키고 그 처자는 적몰해 노비로 삼는다
[諸加評議, 便死刑, 沒入妻子爲奴婢]"고 해서 고구려 초기에는 율령뿐 아니라
죄수를 가둘 감옥 자체가 없었던 사실도 수록하고 있다. 담고 있는 시대로 비춰보면
《후한서》가 《삼국지》보다 오래된 사실을 주로 다루고는 있지만, 편찬 시기는
오히려 《삼국지》가 더 앞선다는 점은 단재 선생께서도 일찌기 지적하신 바다.
그리고 이 《삼국지》의 기록들이 모두 옳다고도 말할 수 없다.
찾아보면 여기저기 오류며 모순투성이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해 환도성을 파괴할 때 환도성의 고구려 사고(史庫)에서
훔쳐간 부여와 고구려의 기록들을 저본으로 한 《삼국지》의 초기 기록에서
고구려에 감옥이 없다고 한 것은 고구려가 막 건국되었을 때 아직 제대로 된 사법체계와
관료제도 같은 국가체제를 마련하기도 전의 상황을 마치 3세기 당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적어놓았다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논문을 쓴 이의 주장이다.
최소 2세기 말엽에는 고구려에도 감옥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거지.
[初明臨荅夫之難, 次大王太子鄒安逃竄. 及聞嗣王赦令, 卽詣王門告曰 “嚮國有災禍, 臣不能死, 遯于山谷. 今聞新政, 敢以罪告. 若大王據法定罪, 棄之市朝, 惟命是聽. 若賜以不死, 放之遠方, 則生死肉骨之惠也. 臣所願也, 非敢望也.” 王卽賜狗山瀨·婁豆谷二所, 仍封爲讓國君.]
처음 명림답부의 난이 있었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은 도망쳐 숨어 있었다. 새 왕[嗣王]의 사면령을 듣고 궁문에 나와 아뢰었다.
“지난번 나라에 재화(災禍)가 있었을 때, 신은 죽지 못하고 산골로 숨었습니다. 지금 새로운 정치를 베푼다는 말을 듣고 감히 죄를 아룁니다. 대왕께서 법에 따라 정죄하시고 저자나 조정에[市朝] 버리신다 해도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죽이지 않고 멀리 쫓아보내신다면 이는 죽은 자를 살려서 뼈에 살이 돋게 하는 은혜입니다. 신의 소원이지마는 감히 바라지는 못하겠습니다.”
왕은 곧 구산뢰(狗山瀨) · 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주고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2년(166)
"목을 베어 시조(市朝)에 버리시더라도...."
《논어》헌문편 38장을 보면,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노의 관료였던 공백료에게 모함을 당하자, 대부 자복경백(자복하)이
자로를 구명하고자 공자에게 이 일을 알려주면서 공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 분은 분명 공백료에게 마음이 미혹되어 있습니다만, 제 힘이면
거꾸로 공백료를 죽여서 시체를 시장이나 조정에 내걸 수가 있습니다."
자복경백이 말하는 '그 분'이란 당시 노의 실권자였던 계손씨를 말한다.
노의 군주(제후)가 있으면서도 그 신하(대부)에 불과한 계손씨가 거꾸로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공자였기에
"도가 행해지는 것도 폐해지는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이라며 자복경백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저기서 시체를 시장이나 조정에 내건다고
한 말이다. 옛날에는 대역죄를 지어서 죽은 죄인의 시체를 효수할 때도
신분에 따라서 그 위치를 달리 했다는데, 대부 이상은 조정, 즉 조(朝)에
내걸고 사(士) 이하로는 시장에 내걸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질서에 거역하는 자는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된다, 그러니 너희도 알아서 기어라, 안 그랬다간
이 꼴이 되리라. 이래놓고도 멀쩡히(?) 시집장가들고 애 낳아 기르고 한
옛날 사람들 정신건강 참 대단할 수밖에 없다. 사람 죽은 목을
시장 한가운데 갖다놓고 또 조정 궁실 안에 갖다놓고. 조정에 내건 것은
신하들 보라고 갖다놓은 것이고 시장에 갖다놓은 것은 하층민들 보라고
갖다놓은 것. 추안은 폐태자니까 조정에 시체가 내버려져야 원칙상 옳았다.
폐태자인 추안을 죽이지 않은 것은 백고왕의 성품이 너그러워서 그랬다기보다는
이미 백고왕을 왕위에 앉힌 자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백고왕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할 추안을 죽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이다. 형왕이 무자비하고 난폭한 정치를 행하며
선왕의 아들(그에게는 조카) 두 사람을 모두 죽게 만든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
그것은 폭정으로 인해 쫓겨난 차대왕과는 차별적인 모습을 지향한 신정부의
옛 세력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拜荅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
명림답부는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패자로 삼아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內外兵馬]를 담당하고 아울러 양맥의 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좌 · 우보를 바꾸어 국상이라 한 것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2년(166)
반정의 핵심 주동인물이었던 명림답부는 고구려에서 최초로 국상의 지위를 얻었다.
이를테면 종래의 좌우보 체제를 하나로 합쳐서, 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 5부로 전달하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재상직이 이때에 이르러 처음 탄생한 것이다.
조선조 권근이라는 양반이 《동국사략》의 사론을 지을 때에는 이 일에 대해서,
군신간의 분수는 하늘과 땅 같지만,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란 피차 구별없이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법에, 임금으로서 시역한 자에 의해 왕위에 오르고 그 역적을 토벌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이는 그 일에 같이 참여한 것이 되어 첫째 가는 악명을 면치 못한다. 이제 답부가 수성(遂成)을 시해하고 백고(伯固)를 세웠는데 백고는 처음에 들에 숨어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답부가 자기를 세운 것은 덕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을 시해한 일은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를 총애하여 국상으로 삼았으니 이는 온 나라의 군신이 모두 반역의 도당이 되어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인륜이 없어진 것이다. 백고가 대의(大義)를 펴서 사사로운 공로를 포상하지 않고 반역의 죄를 밝혀 그(명림답부)를 죽였다면 삼강이 다시 바르게 되고 인륜이 다시 서서 역적이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한(漢)의 고제(高帝)가 정공(丁公)을 죽이고, 숙손약(叔孫婼)이 수우(豎牛)를 내쫓은 일도 이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데 백고가 그렇게 못한 것이 애석하다.
글쎄... 그게 반역자 이성계의 편에 붙어서 여지껏 섬기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건국에 일조한 당신이 할 말일까?
<동국사략은 조선조 태종 3년(1403)에 편찬되었고, 신라 위주의 유교적 도덕 사관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좌우보가 통폐합되어 국상 체제으로 재출범함으로서,
국상을 통해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들이 각기 임무를 맡아 분담해서 수행하는 시스템 구성이,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죽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 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 擊破之, 斬首千餘級]
영강(永康) 원년(167)에 부여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를 침략하자,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고 1천여 급을 베었다.
《후한서》권제85, 동이전 부여조
이 무렵 부여의 국력은 이미 상회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듯 하다.
후한 영강 원년이면 그것은 곧 고구려 신대왕 2년. 이때에 이르러 부여는 2만이라는 군사를 동원해 현도를 공격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연맹왕국의 이미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 왕도 흉년 들었다고 책임 물어서 죽일 만큼 왕권이 미약한 나라에서 이만큼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다니, 실로 경탄할 일이지 않은가? 부여라는 나라가 이토록 국력이 회복되는 데에 일련의 내정개혁이 있었겠지만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수 없는 것이 아쉽다. 다만 이 무렵 왕이 시해되고 새 왕이 옹립되던 혼란스러운 고구려의 사정을 볼 때, 아마 고구려가 내부싸움에 시달려 바깥 사정에 신경쓸 겨를이 없는 동안에 부여가 가만히 힘을 키웠던 것이 아닐까 한다.(저 부태라는 이름도 어쩌면 벼슬 이름인 듯)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3년(167) 가을 9월에 왕은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 왔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즉위 3년의 졸본시조묘 사행(祀行)은, 왕에게는 무척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여태까지 많은 피를 뿌리며 조종의 영 앞에서 못보일 꼴을 보였으나,
이제부터는 좋은 모습만을 보여드릴 것이라고.
[四年, 漢玄菟郡太守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菟.]
4년(168)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여기 등장하는 한의 현도태수 경림.
이 자는 중국 후한 효환(孝桓)·효령(孝靈) 황제 때의 인물.
《자치통감》에도 등장하는 자로서 이때 고구려를 쳐서 패배시키고,
이때에 이르러 신대왕이 '항복(?)'하면서 화의를 청했다고 나온다.
순암 노인네의 《동사강목》에 보면 이것은 중국 후한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168)
여름 4월에 일어난 일이라 했다.
그런데 《동사강목》을 보니까 이런 것도 있더라.
[冬十二月, 鮮卑及高句麗, 寇幽幷二州.]
겨울 12월에 고구려와 선비가 한(漢)의 유(幽)ㆍ병(幷) 두 주(州)를 침범하였다.
《동사강목》 제1하, 무신년(신라 아달라왕 15년, 고구려 신대왕 4년, 백제 초고왕 3년,
한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
순암 영감이 《후한서》에서 보충해서 적어놓은 건데.
우리가 한에게 항복한 그 해, 고구려 백고왕 4년 겨울 12월에
우리가 선비족과 연합해서 한의 유주와 병주를 쳤다는 것이다.
이건 뭐 현도군에 복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친거 아닌가.
(《후한서》에 보면 '고구려'라는 이름이 예맥濊貊이라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후한에 항복되기를 청했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치려고 했으면서
겉으로는 방심하게 하려는 작전이었다고 볼수 있는 셈인데....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菟太守公孫度, 討富山賊.]
5년(169)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이건 대체 뭘까? 한번 쳤으면서 다시 또 도와주다니.
이번에는 한의 현도태수가 경림이 아닌 공손도라고 나온다.
이때에 이르러서 현도태수 자리가 경림이 아니라 공손도로 바뀐것 같은데,
고구려에서 대가와 주부를 시켜서 현도태수를 도와주게 했다니.
(이해가 잘 안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유주나 병주라면 중국 지도를 펼쳐도 꽤나 깊숙히 있는 곳인데,
(유주-지금의 베이징 일대, 병주-지금의 베이징 서쪽 산시성 일대)
걔네들이 깨지기는 많이 깨진 모양이다.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羣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 ‘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8년(172) 겨울 11월에 한(漢)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를 쳐들어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漢)의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의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내서 막아야 합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한의 2차 침공.
그때 그 장군이 누구였다고 《삼국사》 본기에는 이름이 없는데,
명림답부의 열전에 의하면 이때에도 현도태수 경림이 쳐들어온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때 한의 침공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두고,
방어냐 공격이냐 하는 쪽으로 갈라진다.
공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어만 하고 있다가는
저것들이 우리를 물로 보고 자주 쳐들어올테고,
또 우리에게는 저것들이 넘보지도 못할 험한 지형이 있으니 꿇릴 것이 없다.
군사 내서 한판 뜨자. 뭐 이런 주장이었다.
[荅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답부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한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의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이니,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8년(172)
그러나 국상 명림답부의 의견은 달랐다.
우리보다 쪽수로 봐서 엄청나게 많은 저것들 앞에서, 험한 지형만 믿고 뻗디다가는 피본다.
저것들은 우리보다 숫자도 많은데다, 멀리서 왔으니 어떻게든 빨리 끝을 내려고 할 것이고,
원래 쪽수가 밀리면 방어부터 하고 보는게 상책이다.
(그러자면 우리와 저쪽의 힘 차이를 되도록이면 서둘러서 가늠할수 있어야 한다)
저 쪽수 많은 것들의 약점.
그것은 먹을 식량을 멀리서 운반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해도 뭐 먹어가면서 해야지.)
그 무렵만 해도 전쟁할 때면 군사들이 먹을 식량은
군사들이 무기와 함께 직접 준비해서 지고 갔다고 하던가.
천리나 되는 그 먼 거리를 지나 군량을 옮겨왔기에 일단 지쳐있을 것이고,
그러니 일단은 우리 지세를 이용해서 저들의 군량이 떨어질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 달도 못 넘기고 굶주려 돌아갈때,
기습해서 아주 섬멸시켜야 승산이 있다고 하는 것이
명림답부가 내놓은 전술이었다.
군사가 많으면 공격하고, 군사가 적으면 수비한다....
《손자병법》 군형편이구나. 명림답부가 《손자병법》을 봤는지는 모르지만,
병법 군쟁편에 보면 군사들의 사기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다.
어떤 군대든지 전투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사기가 왕성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전투가 이어지면 사기가 느슨해지고,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서 집에 갈 생각만 한다고.
그러므로 용병술에 능한 자는 적군의 사기를 살펴서
적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때에는 부딪쳐 싸우지 말고,
적군이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틈을 타서 타격을 가한다ㅡ.
고려의 청야수성 전술은 그러한 병법의 원리에서 나온 장기전략이었다.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운다[淸野].
그것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성곽방어전술인 청야수성(淸野守城)을 말한다.
깊은 해자를 파고 성벽의 보루를 높여서 적이 넘어올수 없도록 만드는데,
실제로 고구려의 성곽들은 산지에 쌓은 것만이 아니라 그 높이 또한 쉽게 넘보기 힘들다.
성곽의 둘레는 겨우 2km 남짓이지만, 높이가 장난이 아니어서 웬만한 공성무기로도
고구려의 성은 쉽게 넘보기 힘들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고구려의 백암성이었던 연주성은 그 높이가 최소 10m.
요동성이라고 불린 오열홀은 높이가 20m에 달했다.
(중국 만리장성의 높이가 6~9m 정도)
조선의 한성 높이가 12m남짓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높이는 실로 만만찮은 수준.
그리고 그 성곽 안에 식량과 무기를 갖춰놓고,
종전대로 평지성인 국내성에서 전시방어용 산성인 위나암성으로 옮겨서
한의 군대를 방어하기로 한다.
[王然之, 嬰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荅夫帥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荅夫坐原及質山爲食邑.]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인(漢人)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답부는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다. 한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8년(172)
그리고 작전은 유효하여 명림답부의 말대로 되었다.
주변에서 물자를 구하지도 못하고 멀리서 수송받는 군량을 받느라 굶주려있던 한의 군대는
과연 제풀에 지쳐 퇴각하려다가 고구려 경기병의 추격을 받아 좌원에서 그야말로 박살이 났고,
'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크게 패했다.
현도태수 경림이 고구려에 침공하여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 신대왕 5년(169)의 기사는
《후한서(後漢書)》 권85 고구려전 및 《자치통감(資治通鑑)》 권56에 나오는데,
이때 백고왕 8년(172) 명림답부가 한을 쳐서 크게 이겼다는 한의 침입기사는
이상하게 나오지를 않는다.
중국 애들이야 뭐, 자기들이 진 것에 대해서 안 쓰는게 생활 아닌가.
이 좌원이라는 곳에 대해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기록에서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서 돌아가는 한의 군대를
명림답부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선,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나 위나암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왼쪽의)으로 생각된다고.
(디지털한국학 삼국사 열전 주석에서 그러더라)
그리고 이 전쟁의 1등공신 명림답부는 그 포상으로서, 신대왕으로부터
한의 군대를 대파(大破)시킨 좌원과, 예전 고구려 국왕의 사냥터였던 질산을 식읍으로 받는다.
[至靈帝熹平三年, 復奉章貢獻.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云.]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에 이르러서 (정월에) 다시 글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부여는 본디 현도에 속했었는데 헌제(獻帝) 때 부여왕이 요동에 속하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한다.
《후한서》권제85, 동이전 부여조
고구려의 국력이 회복되는 낌새가 보일 무렵에 부여는 한을 친지 6년만에 다시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는다. 한이 고구려의 반격을 받아서 개작살난 것을 알고, 한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나름 있었던 것 같다. 패배하기는 했어도 일단 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주인 아닌가? 후방에서 고구려의 내부싸움을 틈타서 자국의 내부를 단속하고 국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이상, 외부로도 함께 손잡고 고구려를 견제할만한 우방이 부여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리라. 적의 적은 곧 나의 아군.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나 해당되는 진리.
[十二年 春正月, 羣臣請立太子. 三月, 立王子男武, 爲王太子.]
12년(176) 봄 정월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3월에 왕자 남무(男武)를 왕태자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재위 12년 3월 봄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의 건의로 왕자 남무를 태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十四年,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14년(178) 겨울 10월 그믐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그 해의 일식은 비단 왕의 운명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왕만이 아니라, 왕에 버금가는 공적을 남긴 한 사람의 운명도, 그 일식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十五年, 秋九月, 國相荅夫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乃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15년(179) 가을 9월에 국상 (명림)답부가 나이 113세로 죽었다[卒]. 왕은 스스로 애통해하여 이레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마침내 질산에 예로써 장사지내고 수묘(守墓) 스무 집[家]을 두었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고구려 사람들은 확실히 건강하긴 건강한 모양이다.
당최 어떻게 된 사람들이 백 살은 거뜬히 넘어서 살고 있으니.
명림답부라는 이 자도 백살을 거뜬히 넘기고서, 113세의 나이로 죽는다.
수묘인(守墓人)이란 왕이나 귀척의 묘를 지키고 그 주변을 청소하고
순찰도 하면서 보호하는, 일종의 공무원직 묘지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왕의 묘를 쓴 곳 부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마을 단위로 해서 왕릉이나 어떤 묘역을 정해주고 그 근처에서 살면서,
돌아가면서 때 되면 벌초도 하고 잡초도 뽑고 어디 도굴하려는 놈 있으면 잡게 하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곧 수묘인, 묘지기다.
왕족이나 귀족들 살아서 위세 부리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죽은 것들 뒤치닥거리까지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뭐 다른 역적도 아니고, 지금의 왕을 세운 공신이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으니
그 정도야 뭐 너그럽게 해줄수도 있지 않겠느냐만.
맨 끝에 명림답부가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였다 했으나 그 이전의 기록을 상고해보면 차대왕이 백성에게 차마 하지 못할 정사를 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고복장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목도루는 차대왕과 막근의 중간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 사람이므로 내쫓은 것이고, 무사는 태조왕의 꿈을 야릇하게 풀어 차대왕을 해치려 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막근 형제는 차대왕과 맞선 적이므로 죽인 것이니, 이것을 아무리 참혹하고 불인(不仁)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운 원한의 보복이고, 인민에게는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일 뿐더러, 또 이것이 모두 차대왕 2년 내지 3년까지의 일이니, 18년 후인 차대왕 20년에 반란을 일으킨 명림답부의 유일한 구실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ㆍ지진ㆍ성변(星變) 등뿐이니, 이 같은 천문 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의 잘잘못에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이로써 '인민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한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림답부가 성공한 원인이 어디 있었는가? 차대왕이 패한 뒤 좌보 어지류가 여러 중신과 더불어 차대왕의 아우인 백고 신대왕에게 왕위 계승을 권진(勸進)하였는데, 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왕을 도와 왕위 찬탈을 계획한 괴수요, 그 여러 중신이란 대개 미유ㆍ양신 등일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차대왕의 패망은 곧 자기 당의 이반(離反)에 의한 것일 것이다. 차대왕의 즉위 이전 10여 년 동안 차대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한 그 무리들이 차대왕과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도리어 왕을 배반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은 찾기 쉬운 것이다. 고구려는 원래 일인전제(一人專制)의 나라가 아니라 벌족공치(閔族共治)의 나라이니, 국가의 기밀 대사는 왕이 전결(專決)하지 못하고, 왕과 5부의 대관들이 대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별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으로 행하였다. 그런데 차대왕은 부왕을 가두고 당시 신앙의 중심인 무사를 죽인 사람으로서, 비록 어지류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君權)이 오직 제일임을 주장하여 모든 일을 자기 독단으로 행하므로, 연나의 `선배' 우두머리 명림답부가 그 본부(本部)의 `선배'로서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어지류 등이 내응(內應)하여, 태조왕이 돌아간 뒤를 기회하여 차대왕을 죽이고 벌족 공치의 나라를 회복한 것이다.
어떤 이는 명림답부를 조선 사상 처음으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라고 하지마는,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의를 가진 변동을 일컫는 것이니, 벌족 공치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되랴? 명림답부는 한때 정권 쟁탈의 효웅(梟雄)이라 함은 옳지마는 혁명가라 함은 옳지 않다.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명림답부 그리고 그에게 죽은 차대왕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冬十二月, 王薨. 葬於故國谷, 號爲新大王.]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신대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6, 고구려본기4, 신대왕 15년(179)
그리고 그 해에 이르러.
백고왕은 죽는다. 장지는 고국곡(물론 지금은 거기가 어딘지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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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태조왕과 차대왕, 신대왕 3형제.
유리왕의 막내왕자(?) 고추가 고재사의 아들이며,
모두 '노익장'의 표본이 되어 노년의 정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신 분들.
이 세 분 태왕의 아버님인 재사께서 언제 죽었는지 기록은 없지만,
(아마 지금쯤은 죽었겠지만)
신대왕이 즉위하는 것을 보셨으면 그때 나이가 못되어도 일흔 넘어 여든에 가까우셨으리라.
재사라는 이 자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
천년도 더 전에 고구려에서 일어났었다.
역사에서 장수한 사람 이야기를 찾으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한 10년도 더 전에 우리 초등학교 학급문고에서 봤던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럴수가>라는 이 책을
우리 동네 중앙도서관 2층 구석진 곳에서 2권이나 발견했는데,
거기 보니까는 1권 말미에 '92세에 애를 만든 초정력 할아버지' 얘기가 나오더라.
이런 것도 뭐 역사사실의 부연설명을 위한 자료라면 자료겠지만,
정말이지 이 책 제목처럼,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나 나올법한 일이 실린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럴수가'라는 책에서말고는 그런 유례를 설명할만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한 일이다.
차대왕이나 신대왕에 대해서는, 이미 장수왕이 그분들만큼 오래 살아주고 계시니까,
또 그만큼 오래 사는 분이 요즘 세상에는 거의 흔해빠졌으니 뭐.
그런데 태조왕은 다르다. 100살만 넘어도 기자들이 막 왔다갔다 하면서
'오래 사시는 비결이 뭐예요?'하고 묻는 판국인데,
119세가 뭐니 119세가.
서점에서 산 책 뒤져보니까, 《삼국사》나 《삼국사》에 인용된 《해동고기》에서
태조대왕이라는 이 왕의 나이를 이렇게 표기한 것에 대해선,
두 가지 설로 돌아갈수 있다 한다.
하나는 《삼국사》의 말처럼 그만큼 오래 사셨던 왕이니까 그대로 믿는것,
다른 하나는 《위서》의 "여러 대를 지나 궁(태조왕)에 이르렀다"는 말처럼,
실제로는 둘, 셋의 복수로 존재했던 왕이 갑자기 '태조왕' 한 명으로 뭉뚱그려졌다는 것.
마치 단군을 그렇게 만들듯이.
(그러면 단재 선생이 말한 《삼국사》의 연대 깎아내리기 주장이 적용되어야 하는건가?)
나야 뭐 그런 걸 밝혀낼만큼 머리가 좋지도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저 잡다한 서적들에서 장황하고도 상세하게 밝혀놓으신 그 내용들을
여기 한장에 간추려 넣을만큼 글재주가 정밀하지도 못하니까.
하지만 뭐 구태여 그런 거 따질 필요 있나.
태조왕이 정말 장수한 왕이었든 단군처럼 복수의 왕들이 단수화[化]된 것이었든,
그가 다스리던 그 시대에 한과의 숱한 전쟁이 있었고,
우리가 영광스럽게도 그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아닌가.
그리고 뭐, 역사적 사실에 대해 뒷담화하자고(역사 까자고) 야사(野史)를 쓰는 건데.
난 야사가니까 그런걸 구태여 신경 안써도 된다.
그냥 다음 이야기나 준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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