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3>제17대 소수림왕
고국원왕이 그렇게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은 태자 구부.
훗날 국사책 한 페이지에 이름 한줄 거하게 등장하는, 소수림왕이라 불리게 될 왕이셨다.
[小獸林王<一云小解朱留王> 諱丘夫, 故國原王之子也. 身長大, 有雄略. 故國原王二十五年, 立爲太子. 四十一年, 王薨, 太子卽位.]
소수림왕(小獸林王)<또는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구부(丘夫)이고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 고국원왕 25년에 태자로 삼았고, 41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뭐 국왕 치고 체격 안 좋고 지략 안 웅대한 사람이 어디있냐.
다 그 밥에 그 나물, 거기서 거기지. 하지만.... 구부왕의 정책들을 보면,
이 자가 그저 그런 왕들과는 어딘가 다른, 적어도 고국원왕의 때에 비하면
어딘가 좀더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二年, 夏六月, 秦王苻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2년(372) 여름 6월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사신과 부도(浮屠) 순도(順道)를 보내면서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삼국사》에서 말한 구부왕 2년이 곧 실질적인 왕의 원년이다.
간지로는 태세 임신. 중국 동진(東晉) 함안(咸安) 2년이며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해이며
흉노족 출신으로 중국 북부를 지배한 전진의 부견(符堅)이 관중(關中)ㅡ장안(長安)이라 불렸던
지금의 시안에 도읍하고 있을 때이기도 하다.(《삼국유사》의 설명을 따르면.)
전진 승려 순도의 내왕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불교'라는 것을 배운 시초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구부왕 이전에 어느 정도 불교가 자생적인 전래 및 수용의 과정을 거쳐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구부왕보다 좀 앞선 시대 사람으로 동진의 고승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고구려의 도인(道人) '망명(亡名, 이름이 아니라 그냥 '이름을 모른다'는 뜻)'의 존재가
《양고승전》과 《해동고승전》을 통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승려 망명(亡名)은 고구려 사람이다. 깨달음에 뜻을 두고 어진 마음에 의지해 진리를 신봉하고 덕행을 근본으로 삼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았다. 생각을 안으로 모음에 나라 안에서도 꼭 명성이 나고 그 명성은 흘러넘쳐 사방으로 퍼져갔다. 진(晉)의 지둔(支遁) 법사가 편지를 보내어 이렇게 일렀다.
"상좌(上座)와 축법심(竺法深)은 중주(中州) 유(劉) 공의 제자로서, 성품이 곧고 고상하여 도속(道俗)을 모두 통솔하였으며, 지난날 수도에 있을 때에는 계율을 잘 지켜 안팎에서 모두 우러러 보았으니, 도를 알리는 큰 스승입니다."
지둔공은 중국에서 덕망이 높은 분으로서 그와 더불어 말을 통하고 사귀는 자들은 반드시 훌륭한 인재와 뛰어난 학자였을진대, 하물며 외국 선비라 해도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같은 편지를 보냈겠는가?
《해동고승전》
불교의 승려 즉 사문(沙門)을 '도인'이라 부르며 도교 도사와 구별하는 것은
중국 남조불교의 특징이다. 고구려 도인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지둔도림과
그가 찬양했던 축법심 두 사람은 불교의 가르침을 다른 종교의 의미와 교리를 적용해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른바 '격의불교'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이를테면 불교의 공 사상을 도교의 노장사상과 연관짓는),
고구려 초기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법심(法深)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연(義淵)이나 담엄(曇嚴)과 함께
순도 이후로 고구려의 불교를 진흥시킨 인물로 꼽은 한 사람이긴 하지만,
고전에 기록이 없어서 전을 지을 수 없었다고 《삼국유사》는 말하고 있다.
《해동고승전》에도 법심의 전은 없다.
문헌으로 증빙할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지만, 고고학적으로 구부왕 이전
고국원왕 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안악 3호분의 고분 천장에도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고, 소급하자면 미천왕 때 싸리나무화살을 예물로 보낸
중국 후조(後趙)와의 교류를 통해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수도 있고,
후한 시대 낙랑과 대방을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늦어도 4세기 중엽 이전에는 이미 고구려 사회에 불교가 제법 퍼져있었다는 거다.
(하여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종교에 관련된 건 희한하게 잘 받아들인단 말야)
흔히 로마 제국에 크리스트교를 뿌리내리게 한 1등공신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I, 306∼337)를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때까지 로마 제국이 모시던 신들의 상징이 아닌 이교(크리스트교)의 이콘을 자기 군대의 문장(文裝)으로 삼아 정적들을 물리치고 제국의 황좌를 거머쥔 그는, 이후 크리스트교를 공인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칙령을 반포해 크리스찬들의 지지를 얻었다(테오도시우스 황제 때에 이르면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국교라는 위치까지 차지했다). 지금까지도 크리스찬들의 손으로 쓰여진 역사는 콘스탄티누스를 "대제(大帝)라는 칭호에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자"라 부르며 크리스트교의 성인(聖人)으로 손꼽는다.
아무도, 정작 그가 죽기 직전에야 세례를 받았고 평생 크리스트교를 진심으로 믿은 적도 없으며, 양민의 농노화를 가속화하고 자기 누이동생의 남편과 그 소생까지 잔인하게 죽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어두운 면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단순히 그가 크리스트교를 존중했고 보호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제라고 떠받드는 것 뿐이다. 어느 나라 통치자건 어두운 면 정도야 없었으랴마는 그래도 자기가 믿는 종교의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 하나에 매달려서 정작 그 사람이 '왜 그랬던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앞뒤없이 그저 '그 사람 좋은 사람이지' 하고 단정하는 것만큼 큰 논리적 오류가 또 있을까. 구부왕도 마찬가지다. 굳이 구부왕이 성군이었는가 암군이었는가 말하기는 그렇지만, 불교 수용의 기록은 구부왕의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수록된 것인데다 구부왕 본인이 고구려 최초의 사찰을 짓기도 했던 역사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왕은 '호불(好佛)'의 군주이자 '호법(護法)'의 군주로서 우리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만큼 구부왕도 그저 '실용주의자'로서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에 주목했는지도 모른다. 불교라는 종교가 옆나라 중국에서 차츰 힘을 얻어가고 있는데 그 흐름에 고구려가 뒤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그때 마침 고구려 사회 구석진 곳마다 이 신비롭고도 매력적인 신흥종교가 힘을 뻗치며 사람들의 의식 전반에 파고들어있었을 뿐이고, 국가에서 나서서 이 '신흥교세'들의 협조를 얻어낼수 있기를 바랬을 뿐이고.
불교라는 종교를 구부왕이 주목한 시점이 고국원왕 이후의 일이라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북쪽에서는 전연, 남쪽에서는 백제가 발흥하여 고구려를 압박해왔고, 특히 전연의 공격 앞에서
수도 환도성이 개작살나는 바람에 수도를 임시로 평양으로 옮기는 지경까지 이른 혼란스러운 시대.
이런 시대라면 사람들은 누구라도 인간의 힘을 훨씬 뛰어넘는 초월체의 힘에 의지해
내세의 안식을 받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크리스트교가 교세를 넓힐 수 있었던 것도
로마 제국 말년의 혼란 속에서 어쩔줄 모르던 사람들이 신앙에 의지해
언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려고 했던 데에 한 요인이 있다.
종교에 대한 신앙은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고국원왕 시대의 고구려에는
그러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고,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불교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적합한 종교였다. 두려움의 근원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다면 그 공포를
끊어버리면 된다고 불교는 가르치지만, 초기 불교는 여기에다 또 하나를 덧붙였다.
극락(極樂)이라는 이상세계. 석가여래가 말한 극락이라는 세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극락에 가는 자체에 대해서 회의하겠지만, 전통적인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에 더해서
거기에 이르는 '사다리'가 전통 종교보다 불교가 더 길다고 하며 불교를 내세웠을 것이다.
[立太學, 敎育子弟.]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년(372)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교육에 대한 열정이야 세계 사람들이 놀라다 못해서
거의 '경악'을 하는 수준이 아니던가. 이때라고 뭐 비껴갈 필요 없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신당서》에도 "고구려 사람들은 학문을 좋아해서,
가난한 마을의 말먹이는 사람들까지도 서로 신칙하고 권면했다."고 말하고 있다.
수도에 지은 태학말고도 큰 길거리 옆에는 어디에나 경당(扃堂)이라는 큰 집[嚴屋]이 있어
혼인하지 않은 자제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경전을 외고 활쏘기를 익혔다.
말하자면 조선조의 마을마다 있었던 서당과 비슷한 것이다.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에서는 각종 유교 경전 및 활쏘기를 익혔다.>
조선조 말엽인가, 멀리서 바다 건너 우리 나라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와서 참 경악을 했단다. 무슨 유령도 아니고 죄다 흰옷만 입고 돌아다니는데
어쩌면 이리도 가난하고 찌질한 꼬라지로 사는지, 거기다 표정들은 하나같이
뚱, 띵, 벙, 멍, 맹. 살짝 건드리면 쓰러질 듯한 지저분하고 낡아빠진 집구석에서 사는
조선 사람들은, 프랑스군에겐 참 답답하고 궁상맞게만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 찌질해보이는 조선 사람들을 보고 또 놀란게,
손에서 '책'을 안 놓더란다. 가난하고 다 쓰러져가는 집에도 꼭 '책'이 있다.
(실제로 프랑스 해군본부에서 제출한 보고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집에 꼭 책을 갖춰두고 가까이하는 조선에 와서,
'문화국가(?)' 프랑스의 국민이라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참 부끄러울 정도였다고.
이 시기의 고구려 경당이 조선의 서당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경당에서는 글만 배우는게 아니라 활쏘기도 배웠다는 거다.
(조선에서는 활쏘기를 놀이로 익혔다던가.)
고구려의 경당에서 배운 책 즉 고구려 때의 태학과 경당에서 쓴 교재는
《북사》, 《주서》 같은 책을 참조하면 일단 다음과 같다.
1)《오경》
《논어》,《맹자》와 함께 유교의 '핵심'이라 부를수 있는 다섯 권의 교재.
동양철학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주역(周易)》, 정치사에 대한 자료를 모은
공자의 《서경(書經)》, 고대 중국의 시를 수집해놓은 《시경(詩經)》,
궁중 및 관청과 민간의 각종 행사 순서 및 예절에 대한 《예기(禮記)》,
역사책 《춘추(春秋)》. 이 다섯 권을 묶어 오경이라고 부른다.
(원래 '악경'도 있었다는데 진시황제 분서갱유 때에 잃어버린 뒤 여태 못찾았음)
2)《삼사(三史)》
중국 한(漢)의 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반고가 쓴 《한서(漢書)》,
한의 서적관리기관이었던 동관(東觀)에서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紀)》를 말함.
당(唐) 이후에는 《동관한기》대신 범엽이 쓴 《후한서(後漢書)》를 넣어
《삼사》라고 했다. 한마디로 중국 역사책.
(중국의 역사책에서 과거 사실의 판례를 보고 '우린 안 이래야지' 하는 교훈 획득 효과가 있다)
3)《삼국지》
나관중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 지은 그 엉터리 《삼국지연의》가 아니라,
진(晉)의 학자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원조' 《삼국지》.
《삼국지》의 배경이 되었던 위(魏)ㆍ촉(蜀)ㆍ오(吳)의 고대 중국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촉이 아닌 위를 정통으로 삼고 나머지 두 나라는 '열전'에 넣어 떨거지 취급했다고
나중에 욕을 꽤 먹었다는. 흔히 말하는 '위지 동이전'에,
우리 나라 고대 왕조에 대한 실로 많은 기록이 담겨있음.
(단재 선생께서도 이 자료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시는 편이다.)
4)《진양추》
고대 중국 동진의 학자로서 비서감 벼슬까지 지냈던
손성(孫盛)이라는 양반이 지었다는 역사책인데,
쓴 말이 바르고 사리판별이 명확해서 당시에는 좋은 역사책이라고
평판이 꽤 높았던 듯 싶지만 지금 전하는 건 없음.
《삼국지》에는 군데군데 이 《진양추》를 인용해서 설명한 부분이 있다.
근데 막상 조사해서 적어놓고보니 죄다 중국 책이잖아.
하긴 유교라는 학문이 중국 학문이니 뭐. 태학도 유교 학교니까.
(기독교학교와 불교학교에서 성경하고 불경 가르치는 거랑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자)
[三年, 始頒律令.]
3년(373)에 율령(律令)을 처음으로 반포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국사 교과서에서 질리도록 배운 그 말. "율령 반포" 중앙집권국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조건.
따져보면 어느 나라나, '제국'으로 성장한 국가에게는 어김없이,
그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통치의 기준, 즉 '법률'이 있었다.
워낙 생각 다르고 피부 다른 사람들이 우글우글거리다보니,
그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려면 하나의 기준 아래에 묶어놓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안정복 영감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다보면
저마다 갖고 싶어하는 것과 욕심내는 것에 절도가 없어져서 방탕해지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호가 갈리기 쉬워져서 생각과 행동이 제멋대로 튀어나가게 되며,
그러다보면 결국 서로 충돌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마저도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형법(刑法)을 써서 다스릴 수밖에 없는 것.
그 점에서 법률이란 사회를 유지하는 필요악이다.
고구려의 율령은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율령이 반포되기 전의 고구려의 법률 집행에 대해 《후한서(後漢書)》는
“감옥이 없고 죄 있는 자는 가(加)가 평의(評議)하여 곧 죽이며
그 처자는 몰수해 노비로 삼는다.”
고 했다. 정해진 법률이 없이 귀족인 '가(加)'가 모여서 죄가 있는지 없는지 의논하는데,
딱히 문자로 정해진 것이 없이, 예전의 판결사례나 사건의 정황을 듣고
대가들이 임의로 생각해서 사건마다 제각기 선이다 악이다 하고 결정을 내린다.
선대의 판례에 따라 사건마다의 정황을 감안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
이것이 관습법, 즉 불문율이다.
하지만 관습법은 판결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가 있다.
사람의 키를 잴 때 두 사람을 세워놓고 보면, 외견상 키가 큰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이 있다.
사람은 관습적으로 '눈'을 사용해,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을 가려낼수 있다.
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세워놓고 키를 재는데,
'눈'만 믿고 사람의 키를 분간해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사람의 안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간간이 실수는 있게 마련.
머리카락 때문에 키가 커보일수도 있고, 키높이구두 같은 것을 신었을수도 있고.
마침 옷을 몇 치수 작은 것을 입는 바람에 체격이 커보이는 사람이 있거나
너무 헐거운 옷 때문에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아보이는 사람도 나온다.
만약 이들에게 똑같은 조건을 주고 신발을 모두 벗게 해서
똑같은 '자'를 가지고 키를 재게 하면, 비슷비슷한 사람도 미세한 변화를 찾아내어
눈이 피로하지도 않고 쉽게 모두의 키를 잴수 있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사건마다 다른 기준을 적용할 필요없이 한 가지의 기준으로 공정하게.
외견상으로 키가 작든 키가 크든 똑같은 기준, 똑같은 '자'을 적용해서 키를 재는 것.
그것이 바로 성문법 즉 법률이고 여기서 말하는 율령이다.
그렇게, 여러 대가들이 모여 관습적인 판례를 들어 결정하던 것이
구부왕 3년에 이르러 성문화된 율령이 반포되면서, 변화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율령이 반포된 뒤의 고구려의 모습에 대해 기록한 《북사(北史)》'고구려열전'에 보면,
“고구려의 형법에 반역자는 기둥에 묶어놓고 불태운 뒤 목을 베고 그 집 재산을 몰수하며,
도둑질한 자는 10배를 갚게 하되 가난하여 못 갚는 자,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빚을 진 자는
그 아들딸을 노비로 만들어 배상하게 하였다.”
또,《구당서(舊唐書)》'고려열전'에는 또 이렇게 적었다.
“고려는 그 법에 반란을 꾀하거나 반역을 꾀하는 자가 있으면 많은 사람을 모아
횃불을 들고 서로 앞다투어 지지게 하여 온몸이 짓무른 뒤에 목을 베고,
가산(家産)은 모두 적몰한다. 성을 지키다가 항복한 자, 전쟁에서 패한 자,
사람을 죽이거나 겁탈한 자는 목을 벤다.
도둑질한 자는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물어 주게 한다.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본인을 노비로 삼는다.”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한, '여러 가들이 의논해서 결정하는' 시대에 비하면,
구부왕 이후부터는 범법자에 대한 처벌이 좀더 세분화되고, 체계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이때 반포된 고구려의 율령에 대해서, 조사해보니 그 내용은 아마도 진에서 반포한
태시율령이라는 것을 본떠서 반포를 했을 것이라고도 하는데,《구당서(舊唐書)》에서 말한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물어 주게 한다."
는, 이른바 일책십이법(一責十二法)은 《후한서(後漢書)》에도 나오는 부여의 법률인데,
고구려에서도 그대로 쓴 것을 보면, 태시율령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다.
(태시율령에 그런 조항이 있는지 없는지는 안 봐서 모르지만.)
어쨌거나 구부왕 시기에 이르러서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묶을수 있는
'율령'이라는 성문화된 규격이 만들어졌고, 고구려 사회는 이 '율령'을 통해서
하나로 통합해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법령은 비교적 잘 집행되었던 모양이다.
《북사》에서는 "형벌을 쓰는 것이 엄해서 범하는 자가 드물다."고 하고,
《구당서》에서는 "대체로 법이 준엄하기에 법을 범하는 자가 적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는다."고 고구려의 법 집행 수준을 전하고 있다.
[四年, 僧阿道來.]
4년(374)에 승려 아도(阿道)가 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구부왕 4년에 처음 이름이 나오는 이 '아도'라는 승려는 원래 고구려 사람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아도본비』의 기록을 말하면, 그의 아버지는 '아굴마'라는
중국 조위(曹魏) 사람으로,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령(高道寧)이라는 여자와 만나 하룻밤 인연 맺고 돌아갔는데 이로부터 태기가 있더란다.
그래서 아도가 태어났는데,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그를 출가시켰고,
나이 16세에 위(魏)에 가서 아버지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
3년간 불법을 배우고서 이때에 이르러 돌아왔다는 것이다.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5년(375)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우고 아도(阿道)를 두었다. 여기서 해동의 불법이 비롯되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고려 승려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초문사(肖門寺)는 지금의 개경 흥국사(興國寺)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서경 흥복사(興福寺)라고 했지만, 《삼국유사》 에서는 틀린 말이라고 했다.
이때 고구려 수도가 압록강 근교ㅡ기록상 환도성이 모용황 손에 개아작이 난뒤,
고국원왕 때에 옮겨서 거처했다는 동황성에서 달리 또 옮겼다는 얘기가 없으니
대략 구부왕의 때에도 동황성이 고구려의 수도였을 것이고 두 절도 수도 안에 있었을텐데
(동황성은 돌에 자갈과 흙을 섞어 넣은 건축법으로 상대적으로 누런빛을 띠었을 수 있으며,
지금의 중국 길림성 백산시 운봉댐 수몰지구의 그 무수히 많은 고구려 석성들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고, 서길수 교수께서 말씀하신바 있다. 자세한 것은 네이버 검색에서
동황성 쳐보시길.) 지금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어디인지를 알수가 없다.
만약 정말로 동황성이 짱개들이 댐 만들면서 수몰시켜버린 고구려 석성들 가운데 하나라면,
초문사나 이불란사 터도 분명 그 근처에 있으면서 댐과 함께 물속에 수장됐을 가능성이 크니까.
오늘날에는 지금의 국내성 동문 바깥으로 500m 거리에 있는 동대자 건물터와
집안역 남쪽에 있는 돌기둥 건물터가 초문사와 이불란사 터로 각각추정되고 있단다.
<집안 동대자 유적 실측도. 소수림왕이 처음 세운 사찰 가운데 초문사터로 지목된다.>
어쨌거나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는데,
구부왕의 국가 정비에 불교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 전진의 부견왕이
일단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불교를 통해 국가체제를 정비했고, 이것을 구부왕이
벤치마킹해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 불교를 이용하게 되었던 것인데,
조선조에는 무척 비판을 받았다. 성호 선생은 구부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일에 대해
나는 서방(西方)의 교(敎)란 것은 귀신을 부리고 변환을 잘하기 때문에, 이차돈이 죽어서 몸에 피가 솟게 된 것도 바로 귀신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골 무당도 무슨 물건을 긴 장대에 붙여 세우고 여러 사람을 능히 현혹시키니, 이런 것을 어찌 믿을 만하다 하겠는가? 나중에 그 교가 크게 행하여지자 나라가 드디어 망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상론자(商論者)가,
“승려를 받들면서 그 폐단도 몰랐다. 심지어 마을에도 탑묘(塔廟)를 즐비하게 짓고 여러 백성을 중에게 도망쳐 가게 하여 국가가 날로 쇠해지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는 헛된 말이 아니다.
라고 했고, 조선조의 최보라는 학자는 《동국통감》에서
소수림왕이 태학 설립에 이어 불교를 공인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었다.
고구려가 나라를 세운 지 4백여 년 만에 처음으로 태학을 세웠으니,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킴이 어찌 이리 늦었는가? 지금 왕은 보람 있는 일을 할 만한 자질이나, 중을 받들고 절을 지어 고구려에서 부처를 믿은 첫 임금이 되어, 자손들이 그 허물을 본받아 앙화(殃禍)가 널리 퍼짐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태학을 세웠다고는 하나 인재를 얻는 효과는 거두지 못했으니, 그가 학문을 좋아하는 마음이 불교를 좋아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동대자 건물터에서 나온 와당. 왼쪽의 연꽃무늬 와당이 주목된다.>
하긴 조선조 유학자들이 불교에 대해 비판적으로 배배 꼬인 시각을 갖고 바라봤으니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가을 7월에 백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5년(375)
수곡성을 공격한 것에 대해서, 《삼국사》백제본기는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해 와서 함락시켰는데
왕이 장수를 보내 막게 했지만 이기지 못했다[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陷之.
王遣將拒之, 不克]."고 적고, "왕은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보복하려 했지만
흉년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고 적고 있다.
아마 백제에 흉년이 들었던 것 같은데 구부왕은 백제에 흉년이 들어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수곡성을 쳤을 거다. 조선조의 권근은 《동국사략》에서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는 것. 그러므로 부모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거적자리에서 잠자며 창을 베개삼아 어느 때이든 그만둘수 없는 것인데, 고구려왕은 오직 율령을 반포하고 불사(佛寺)를 창건하는 것만 일삼고, 일찍이 분발해서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지 못하다가 이제 와서야 수곡성을 함락시켰으니, 복수를 할 수 있었건만 철저한 복수를 못하고 그만둔 것이 아깝다. 그러므로 구부와 당시 신하들은 모두 기개가 없는 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전대의 역사책(삼국사)에서 구부에게 위대한 지략이 있었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라고 말했다. 이놈의 양반, 나중에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
[七年, 冬十月, 無雪雷, 民疫. 百濟將兵三萬, 來侵平壤城. 十一月, 南伐百濟.]
6년(376) 겨울 10월에 눈은 내리지 않고 천둥이 쳤다. 백성들이 전염병에 걸렸다. 백제가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을 침공해 왔다. 11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이 기사는 비록 구부왕 7년, 서기 377년의 일로 기록되어있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구부왕 7년이 아닌 6년의 일로 끌어올려서 보는 것이 옳다.
여기서 한자원문에 7년[七年]이라고 한 것을 6년으로 해석문에 적은 것은 그것 때문이다.
《삼국사》를 보면 소수림왕 6년조 기사에 7년조 기사와 마찬가지로
"11월에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는 기록이 나오는데,
둘다 고구려가 공이고 백제가 수가 되는 입장이긴 했지만 내용 차이는 엄청나다.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侵百濟北鄙]."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했다[南伐百濟]."
위의 것은 침노할 '침(侵)'자를 썼고 아래의 것은 정벌할 '벌(伐)'자를 썼다는게 다른데,
둘다 '공격'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후자에 비해
부정적인 뜻의 전쟁을 기록할 때 쓰이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정벌'은 어떤가?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정벌'이라는 단어를 쳐보면
"적 또는 죄 있는 무리를 무력으로써 침."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나온다.
같은 전쟁이지만 '침(侵)'과 다른 것은 공격을 '받는' 쪽에 비해
공격을 '하는' 쪽의 정의로운 측면이 더 강조된다는 점일까.
쉽게 말하면 '침(侵)'으로서의 싸움은 그걸 거는 쪽이 나쁜 놈이고 맞서는 쪽이 좋은 놈,
'정벌'은 반대로 싸움을 거는 쪽이 좋은 놈이고 거기 맞서는 쪽이 나쁜 놈이 된다.
(고대 사회에서 '정벌'은 세상의 지배자인 '천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악당들을 잡을수 있는 특권'이었다.)
구부왕에게, 할아버지 미천왕의 묘까지 파헤치고 수도 환도성을 불태운 철천지 원수 전연보다도(사실 그 무렵 전연은 이미 전진에게 멸망당한 뒤였다) 더 이가 갈리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였다. 고구려로서는 자신들의 왕을 죽게 만든 백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복수해야 했고, 그것은 혹시라도 백제와의 전쟁을 반대하고 나설 반대파들에 맞서는 주전론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왕이 죽었으면 신하로서 복수를 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다. "왕을 시해한 적을 두고도 토벌 못하는 것을 두고 '그 나라에는 인간된 놈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君弑賊不討, 謂之國無人]!"라고 말했던 공자의 말마따나, 태학에서 공맹의 유학을 공부한 학자들은 백제에 복수를 해야 한다는 주전론의 대표주자들이자 구부왕이 행하는 정책들을 보좌하는 수족이었다.
전쟁을 먼저 벌인 것은 고구려인데, 전쟁을 벌이는 쪽에서 자기들의 전쟁을 부정적으로 기록했을 리가 없다. 고구려가 벌이는 전쟁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직접 그 전쟁에 맞서 싸우는 상대국, 그렇다. 백제다. 《삼국사》고구려본기 소수림왕 6년조 기사는 아마 백제의 고기를 참조해서 쓴 것이리라. 구부왕 6년과 7년은 곧 백제 근구수왕 2년과 3년인데, 이(二)와 삼(三)은 글자획이 비슷해서 자주 실수하는 글자다. 더욱이 《삼국사》에 기록된 대로라면 고구려는 구부왕 5년에 수곡성을 공격했는데, 백제는 이듬해에 공격을 한 번 더 받고 나서야 반격에 나섰다고 되어 있다. 이 무렵 백제는 근초고왕에 이어 근구수왕이 즉위해 있었는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2대로 이어지는 백제 역사는 초기 백제역사의 전성기였다.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의 강성함을 자랑하던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두 번씩이나 받고 앉아 있었을 리가 없다. 하다못해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이 때리면 다들 첫번은 참는다. 그게 실수였을 수도 있고(보통은 실수라고 말하니까) 또 한번 맞았다고 나보다 힘이 세거나 비슷비슷한,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상대한테 발끈했다가는 호되게 얻어맞는다. 인간의 심리상 '무서워서라도' 섣부르게 나서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보다 힘이 약하다거나 약하다고 느끼는 상대한테는 다르다. 소리를 지르든 맞서 때리든 맞았다는 것이 기분나빠서라도 용납할수 없거니와 그랬다가는 놀림받는다. 겁쟁이냐고.
구부왕이 공격한 수곡성은 지금의 황해도 신계,
고구려가 백제와 전쟁이라도 벌일라치면 꼭 그 중심에 놓이던 요충지 중에서도 요충지다.
근구수왕 본인도 이 수곡성을 지나 서북쪽까지 가서 커다란 돌무지를 쌓아 올려
기념물을 만들고 "오늘 이후 이곳까지 올 자가 또 누가 있겠느냐!"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 자신감은 고구려의 수곡성 공격으로 훼손되었고 근구수왕으로서는 노여울 수밖에 없다.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수도를 한강 이북으로 옮긴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런 와중에 들이닥친 고구려의 공격을 백제가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었을까?
더욱이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수곡성이 함락되었을 때, 근초고왕은 흉년 때문에
'어쩔수 없이' 포기했다는 것이 기록에 나온다. 그것은 흉년만 아니었어도 백제가 바로 보복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낳는다고 했던가?
여기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백제가 고구려를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뒤,
구부왕은 다시 백제의 수곡성을 치고, 백제의 근구수왕은 다시 군사 3만으로 평양을 치고,
마찬가지 구부왕도 백제를 치고..... 이후 100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치고 받는 살벌한 관계,
거의 죽이기 직전의 웬수같은 사이가 된다.
371년과 377년에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벌인 '평양'은 이름만 같고
서로 다른 지명이라는 것에는 나도 동의한다.
고국원왕이 거처하던 동황성과 고국원왕이 죽은 평양성이 다르다고 해도,
근초고왕 시기에 국경이 예성강 일대를 중심으로 설정되었을 거라는 추정을 믿는다면
백제가 친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보다 좀더 낮은 위도상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보다 더 남쪽, 고구려의 대백제 전진기지 역할을 할수 있으면서
백제군의 공격이 가능한 위치.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북한이 제시한 '남평양설'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 백제지리지와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고전기(古典記)》라는 책을 인용해서 백제가 쳐서 깨뜨린 고구려의 평양은 남평양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고국원왕편에서 소개했듯, 한문 문장은 떼어 읽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문맥이 될 수 있다. '高句麗南平壤'을 '고구려 남쪽의 평양', 혹은 '고구려의 남평양'이라고 읽을 수 있듯이. 고국원왕의 무덤을 비정하는 데에 쓰기에는 조금 억지같지만 고구려가 남쪽에 따로 '별도(別都)'를 두고 남방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다는 것은 나름 근거가 있는 말이다. 신라의 진흥왕도 백제, 대가야와 합세해서 영토를 넓히고서는 새로 넓힌 중원 땅에다가 새로이 '소경(小京)'을 두어 그곳을 다스리는 중심지로 만들지 않았던가.
다만 남평양의 위치에 대해서는 걸리는 곳이 없지 않다. 중국의 《북사》나 《수서》ㆍ《당서》에서는 고구려에 국내성과 평양성, 그리고 한성의 3경(京)이 있다고 했는데 평양 천도 이후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마는 국내성과 평양은 각각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집안과 평양으로 잡고 나머지 한성이 바로 고구려가 설치한 '남평양'이라고 보며 그 위치는 황해도 재령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재령군을 고구려의 한성군이라고 수록하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성부,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을 가리켜서 더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이다"라고 싣고 있다. 서울은 흔히 백제의 수도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유사》에서 말한 바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고 북한성으로 옮겼다[取高句麗南平壤, 移都北漢城]."고 한 것에서 북한성과 남평양은 똑같이 한강 이북의 서울을 가리키는 지명이며 백제가 차지했을 때는 북한성, 고구려가 차지했을 때는 남평양으로 부르는 식으로 이름만 서로 달랐을 뿐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이 전사한 남평양은 재령이 아닌 서울 땅이 되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왜냐면 근구수왕이 평양을 치기 전, 구부왕이 공격했던 수곡성부터가 백제령이었음을 《삼국사》속의 "백제수곡성[百濟水谷城]"이라는 다섯 글자 속에서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수곡성(신계)이 위도상으로 한양(서울)보다 더 위에 있는데, 백제가 청목령 즉 개성 부근에 성을 쌓았다고 했으니 못 되어도 백제의 국경은 예성강까지는 뻗어있었다는 말이 더 분명하다. 고구려가 수곡성에서 예성강을 넘어가 서울을 차지했을 리 없으며(일단 그랬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백제에서 반격을 한답시고 고구려군이 공격한 신계(수곡성)보다 위도가 낮은 서울(남평양?)을 공격했을 리도 없다. '평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명의 위치가 시대에 따라 달랐듯, 구부왕 시대의 '남평양'과 근초고왕 시대의 '남평양'도 각자 달랐을 것이고, 구부왕 때의 남평양은 예성강 바깥이나 그 근처, 신계와 비슷하거나 높은 위도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북한의 손영종은 지금의 황해도 재령군과 신원군의 경계에 있는 해발 747m의 장수산에 있는 산성을 고구려가 설치한 남평양으로 보고 있다. 위치상으로는 황해도 한복판에 있는데, 주변에 널찍한 재령평야가 있어서 식량을 얻기도 쉽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해주만으로 해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황해 중부의 큰 강줄기를 따라 어떤 지역으로든 접근이 가능한 교통 요충지다. 근처의 강령만, 옹진만, 대동만 같은 해안가로도 쉽게 갈 수 있고, 재령천 물줄기를 이용하면 남포만으로 해서 대동강 줄기를 타고 지금의 평양까지도 곧장 갈 수 있다.
옹진반도에 있는 옹진만, 장연군과 옹진군 사이의 대동만, 이곳의 만(灣)들은 하나하나가 해양교통의 요지일뿐 아니라, 푹 패인 만과 만을 섬들이 여기저기서 감춰주고 있어 수군기지로 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훗날 해상무역과 수군 양성으로 성장한 고려 태조의 집안 역시 이곳 패서(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더라도, 이곳이 얼마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인지를 새삼 알수 있다.
남평양설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황해도라는 지역이 지닌 요충지로서의 장점들을 생각한다면, 고구려가 이곳에 부수도를 두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더욱이 백제로 진출할 군사기지로는 이 장수산성이 적격 아닌가? 평양에서 곧바로 물자와 군선을 보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국내성 시대의 '남평양'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지금의 평양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지. 예전에도 말했지만 국내성 역시 '불이(不而)' 즉 '불내(不耐)'로서 수도의 이름 '펴라'로서 불리던 도시였다. 소수림왕 시대의 수도는 국내성(불내/펴라)이었고 지금의 평양은 국내성에서 보면 남쪽에 있으니 국내성의 입장에서 그들 중심으로 지금의 평양을 '남평양(남펴라)'이라 불렀을 수도 있다. 그러다 평양 천도(427) 이후 평양의 남쪽ㅡ지금의 재령ㆍ신원 일대나 한양 지역에 남평양을 옮겨간 것이 역사에 혼동되어 기록으로 남았을 수도 있고. 여기에는 일단 이러한 생각들을 모두 적어둔다. 보는 사람들의 재량을 기다린다.
[遣使入苻秦朝貢.]
사신을 부진(苻秦)에 보내 조공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7년(377)
고구려가 사신을 보낸 것은 《자치통감》에 실려있는데, 《자치통감》에서는
"이 해 봄에 고구려와 신라가 모두 부진(즉 전진)에 들어와서 조공하였다"고 적고 있다.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2년, 간지로는 태세 정축(377)에 해당하는데,
(《해동역사》에서도 한진서가 이것을 두고 "신라가 상국에 조빙한 시초다."라고 적었다.)
신라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최초의 기록이 고구려와 엮여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지.
[八年, 旱,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8년(378)에 가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9월에 거란(契丹)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구부왕의 내정개혁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백성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거였던가?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거란도 쳐들어왔다.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끔찍한 가뭄이 들어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거란족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치고, 북부 여덟 개 부락을 빼앗았다고.
아마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거란'이라는 족속과 맞붙은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안정복 영감이 《동사강목》에서 《통고(通考)》를 보고 보충해놓은 것을 보면,
거란은 본래 선비와 마찬가지로 동호(東胡)의 한 갈래였다고 한다.
그 선조가 흉노에게 패해서 선비산(鮮卑山)을 차지하고 살았는데,
다른 종족인 고막해(庫莫奚)와 짜고 선비족과 대적하다가 모용씨에게 패해서
송막(松漠) 사이로 쫓겨가서 살다가, 나중에 차차 화룡강(和龍江) 북쪽에까지
세력을 뻗쳐 노략질을 하게 되고, 이번에 고구려에까지 그 마수를 뻗쳤다.
변명같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고구려가 약해서가 아니라,
흉년으로 힘이 약해진 틈을 거란족이 교묘하게 이용한 것 뿐이다.
<강화도 정족산전등사.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처음 세웠으며, 지금의 건물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이다.>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처음 오긴 했지만, 고구려에 계속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그 뒤 아도화상은 계속해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남쪽으로 더 내려갔는데,
강화도의 전등사는 그러한 남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등사는 원래 처음 지어졌을 무렵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불렸었지만,
정작 지어진 이후 고려 때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확실히 이게 고구려 사찰인지도 어떤지도 확답을 못한다.
게다가 불교 전파에는 고구려니 백제니 하는 국경이 없으니까.
[十三年, 秋九月, 星孛于西北.]
13년(383) 가을 9월에 살별[星孛]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어째 잊을만하면 나타나시나. 이놈의 살별씨는.
[十四年, 冬十一月, 王薨. 葬於小獸林, 號爲小獸林王.]
14년(384)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소수림(小獸林)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소수림왕이라 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김부식 영감이 《삼국사》에서 말한 소수림왕의 다른 칭호는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그의 선대이자 고구려의 3대 태왕이었던 대무신왕을 가리키는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과는 한 글자 차이로 대비를 보이고 있다.
대(大)해주류왕 무휼이, 부여와 낙랑국을 비롯한 주변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고 복속시켜
동명왕과 유리왕이 세운 고구려의 국토를 넓게 개척하여 '대무신(大武神)'이라는 이름까지 얻은,
광개토태왕이나 장수왕을 능가하는 '정복군주'이며 '창업군주'였듯,
소(小)해주류왕 즉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혼란스럽던 고구려를 일으키고,
불교 수용과 유교 보급, 그리고 공식율령의 제정을 통해서
'하나'의 사상과 하나의 이념으로 통합하고자 했던 '수성군주'이며 '중흥군주'였다.
그가 받아들여 보급하고자 했던 불교, 그리고 유교는 제왕의 권위를 뒷받침해주어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왕' 한 명에게로 모으는데에 이념적인 배경이 되어주었고,
새롭게 반포한 율령을 반포함으로서 그러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시켰다.
요컨대 이리저리 흩어지기 쉬운 나라 안의 힘을 하나로 집중시킬 수 있는 토대가,
소수림왕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고대의 《고기(古記)》를 기록한 사람들은, 소수림왕의 그런 업적을 주목했고
그러한 그의 정책들이, 옛날 고구려의 국토를 비약적으로 크게 넓혀 국력을 신장시켰던
대(大)해주류왕(대무신왕)의 업적과도 비긴다는 생각에,
소수림왕을 가리켜 대해주류왕과 대비되도록 '소(小)해주류왕'이라는 시호를 바쳤는지도 모른다.
왕권 강화를 위한 그의 일련의 정책들은,
이후 고구려의 '태평성세'라 불리는 '영락(永樂) 시대'의 주춧돌로서,
훗날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 일어설수 있는 토대를 그가 만들어 주었기에,
비록 소수림왕 자신이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후대의 왕들이 그렇게 나라를 중흥시킬수 있도록,
최전성기를 이룰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준 그 공로는 부정할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다.
고구려의 7백년 역사에서 소수림왕이라는 왕을 무시할수 없는 이유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3>제17대 소수림왕|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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