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7>제20대 장수왕(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2>제20대 장수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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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8>제20대 장수왕(7)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702
이때에 들어서 거련왕은 서서히 신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五十六年, 春二月,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城.]
56년(468) 봄 2월에 왕은 말갈(靺鞨) 군사 1만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쳐서 빼앗았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거련왕이 공격한 실직주ㅡ지금의 강원도 삼척은 동해안의 중간 전략지구이자, 동해로 나아가기 위한 해양활동의 거점이기도 했다.음력 2월에 추운 바다를 타고 내려갔을 리는 없고, 백두대간을 따라서 내려가던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나오는 말갈족은 뭘까? 연해주 남부 지역의 물길족? 아니면 이번에도 강원도 지역의 동예족을 신라인들이 그냥 말갈로 적어놓은 것일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후자같다. 여기 나오는 말갈은 여진족이 아니라 강원도의 예족이 분명하다. 평양에서부터 군사를 일으킬 필요 없이 예족들이 거주하는 곳에 사신 한 명만 보내면 거기서 군사를 일으켜 해결하기 충분하지. 물자공급도 걱정할 필요 없고. 실직주를 빼앗았다는 것은 아마 그런 말일 것이다.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여름 4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56년(468)
고려뿐 아니라 이 시대에 다른 나라에 가는 사신들은 최고 우두머리인 대사(大使)ㅡ정사(正使)와 부대장인 소사(小使)ㅡ부사(副使)를 필두로 해서 갖가지 계층에서 사신단을 뽑아 구성하는데, 고려의 관료들도 있지만 관료가 아닌 다른 잡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이를테면 악기를 다루는 악공이나, 도기 빚는 도공, 말안장 만드는 안공도 있었을 거고. 신라의 경우이긴 하지만 불법을 공부하러 가는 유학승들도 항상 사신단의 일행에 끼어서 가거나 사무역을 하기 위한 상단의 배를 빌려 타고 가곤 했다. 소위 말하는 '조공사'들은 대체로 그 땅에 물건을 팔러 가는 상인들이 사신단의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종의 '허가받은 상인'으로서 그 땅에 체류하는 동안에 자기가 갖고 온 온갖 물건을 팔아먹고 한몫 챙겨서 돌아오는 거다.
[五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7년(469)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북위는 기마민족ㅡ선비족의 국가다. 고려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팔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은 철과 소금. 요동이야 1970대까지 중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철 생산지였고, 바다가 없는 북방의 초원에서는 어디에선가는 소금을 사들여 와야만 했다. 요동반도의 긴 해안이나 우리 나라 장산군도, 석성열도 같은 많은 섬들은 어업뿐 아니라 염전을 만들어서 소금도 만들었다. 고려 이전의 옛 조선에서도 철과 소금이 풍부해 한에까지 이름이 알려졌고, 미천왕이 즉위하기 전에 이리저리 떠돌면서 소금장수를 했던 적이 있댔으니 분명하다. 무기와 농기구, 그리고 '돈'의 원료인 철과, 음식에 빠져서는 안 되는 소금, 여기에 북쪽 부여의 명마와 황금을 가져다, 남쪽으로 신미 제국(침미다례, 지금의 영산강 유역)과 탐라까지 가서 보석과 약재를 사서 북위나 몽골 초원의 실위족에게 판다. 그러고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우선 키가 큰 서역의 말들을 들 수 있겠고, 유목민들은 모직물과 유제품 만드는 기술에는 도가 텄으니까, 우유를 비롯해서 버터나 치즈, 비피더스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을 저들로부터 수입했을지 모르고, 어쩌면 고려에서 자체생산을 시도했을 지도 모르겠다. 중국 기록에 고려 사람들은 장 담그는데 도 텄다 했으니 된장이나 두부 같은 걸 만들어서 유목민들에게 팔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秋八月, 百濟兵侵入南鄙.]
가을 8월에 백제군이 남쪽 변경을 쳤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57년(469)
백제는 신라에 비하면 힘도 있고, 또 자신들이 부여의 정통 계승자라는 자부심도 강했다.(나라 세우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동명사당을 짓는 것이었으니.) 근초고왕 때는 평양 근교까지 쳐들어와 고국원왕을 죽이고 온 눈부신 경력도 있고. 아신왕 때 광개토태왕에게 패배해서 10명의 고위 대신에 왕제까지 인질로 뺏긴지 3년만에 다시 왜와 짜고 복수계획을 짤 정도로 콧대를 높이 세웠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다시 고려로 쳐들어가, 근초고왕 때에 그랬던 것처럼 고려왕을 죽이고 수도를 작살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했다. 실제로 고려의 남쪽 변경을 치고 두 달 뒤에는 선대 아신왕이 광개토태왕의 군사를 막고자 쌓았던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다가는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의 군사들을 옮겨서 지키게 하는 등, 고려에 대한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사실 북방 유목민족의 정세도 신경써야 하는 고려에 비하면 백제는 홀가분한 몸이었다. 한강 이남, 그러니까 지금의 남한 일대는 4,5세기 무렵까지도 아직 백제가 제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야는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왜는 백제에게 아쉬운 것이 많고, 신라는 백제에 비해 아직 쪽도 못쓰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五十八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8년(470)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박노자 교수의 칼럼을 읽었다. 거기에 따르면 국가와 비중원 국가 사이의 모든 외교관계가 조공으로 인식됐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조공'과 '국가적 자주성'은 얼마든지 양립이 가능했다고. 무슨 말이냐면 '조공'이라는 건 무역ㆍ문화 등의 여러 영역에서 선진 권역과의 교류 가능성, 일정한 지역적 지위를 의미했다는 것. 조공을 바친다고 속국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걸 받는다고 해서 또 종주국이 아니라는 얘기다. 독립국임이 틀림없는 영국이 1793년 매카트니를 위시한 최초의 사절단을 청조에 파견한 것도 청에서는 조공으로 인식했고, 청의 조공국이었던 버마는 18세기 중반에 몇 차례에 걸쳐 청의 침략을 격퇴해 내정의 완전한 자주를 이루었다.북위가 439년에 다시 북중국을 통일한 뒤, 고려는 만주 방면에서 군사작전을 정지하고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했는데, 박노자 교수는 이것을 두고 거인 북위를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 당하기 싫었던 고구려의 자기 보존 본능도 작용했지만 만주 쪽의 '현상 유지'를 위해 고려와의 평화공존을 지향했던 북위의 의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五十九年, 秋九月, 民奴久等奔降於魏. 各賜田宅, 是魏高祖延興元年也.]
59년(471)에 백성 노구(奴久) 등이 위로 달아나 항복하였다. 이들에게 각각 전택(田宅)을 주었다. 이때는 위 고조(高祖) 연흥(延興) 원년(471)이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고려에서 흉년이 든 것도 아니고 무슨 다른 기상 재해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북위로 도망간 거지? 고려에서 무슨 죄라도 지은 건가? 뭘 잘못했길래?
[六十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自此已後, 貢獻倍前, 其報賜, 亦稍加焉.]
60년(472)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이후로 공물 바치는 것이 이전의 배가 되었고, 그 보답으로 사여하는 것도 또한 조금 늘어났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이 무렵, 고려로부터 '조공'을 받고 '사여'를 주며 우호를 유지하던 북위는, 바다 건너 도착한 사신을 맞이한다. 백제의 근개루왕으로부터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의 벼슬을 받은 종실 여례(부여예)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각기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로서 북위까지 배 타고 가서, 백제산 비단과 우리 나라 서해 청정해역의 해산물을 정중하게 예물로 바치고, 근개루왕의 국서를 북위 황제에게 바쳤다.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 皇帝陛下恊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 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 고려]가 길을 막아,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고도 번병(蕃屛)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ㆍ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ㆍ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ㆍ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과 땅의 신[神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시어, 황제의 궁궐에 쉽게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펼쳐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旦聞夕沒].」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근개루왕의 국서,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
'신(臣)'이라고 칭한 것은 중국 애들이 걸핏하면 외국 국서에다 갖다붙이기 좋아하는 말이다. 자기네들 빼고 사방의 여러 나라는 자기네들 씨다바리다 이거지. 하지만 아쉬운 것이 많은 쪽에서 뭔가를 얻어내려면 앞뒤 안 가리고 일단은 저쪽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 그게 비지니스의 기본이다. 손님의 기분을 띄워주는 것.(난 이게 안 돼서 지금까지 이모양 이 꼴로 산다.) 쓰잘데기 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계속해서 근개루왕이 보낸 국서를 읽다 보면, 고려에 대해 승냥이나 이리 따위의 짐승에 갖다대어 비하하면서도 북위 황제에게는 한껏 '천명에 화합하시고' 어쩌고 하면서 아부를 떨고 있다. 이어지는 국서 속에, 그 화려한 수사 뒤에 숨겨진 백제의 속내가 드러난다. 나아가 중국이 주장하는 소위 '조공외교'의 허구에 대해서도.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箒後宮, 幷遣子弟, 牧圉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신(臣)은 고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 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 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였습니다. 화살과 돌로 잠시 싸운 끝에 쇠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후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더니,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도망쳐오자 추악한 무리들[醜類]은 점차 성해져 마침내 능멸과 핍박을 받게 되었고,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 재물도 다하고 힘도 떨어져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이 멀리 가없는 곳까지 미친다면, 속히 장수 한 명을 신의 나라에 보내어 구해주소서.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 한 명[匹夫]의 백성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근개루왕의 국서,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
고국원에 번듯하게 묻혀있는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매달았다는 과장까지 해가면서 우월의식 가득한 반감을 보이고, 그러면서 북위 황제를 한껏 추켜세워주며 근개루왕이 하려는 말. '전쟁' 이었다. 고려를 치려 하니 군사를 빌려달라는 것이다. 백제를 압박하는 '승냥이와 이리', '큰 뱀'이 있었다면 그것은 고려밖에 없다. 고려에 그토록 반감을 보이는 것이나, 북위에까지 국서를 보내서 아양을 떠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사실 고려는 평양으로 천도하고서도 무려 50년 가깝게, 백제에 대한 별다른 공세를 보인 일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나라 남쪽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남쪽으로의 국토 개척, 나아가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면, 근개루왕 때만 해도 백제가 먼저 고려로 쳐들어갔으면 쳐들어갔지, 거련왕 자신은 남진을 위해 천도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백제에게 많은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평양으로 천도한 것이 북위의 세력을 의식해서 남쪽으로 국토를 넓히기 위한 소위 '남하정책'의 일환이었다는 말도 의심이 가는 것이다. 거련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은, 사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效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麗不義, 逆詐非一. 外慕隗囂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지금 연(璉: 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지고[魚肉], 대신(大臣)과 힘센 귀척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로 손을 쓸[假手]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의 여러 군(郡)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首丘之心]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囂)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劉)씨와 내통하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蠕蠕)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脣齒]처럼 의지하면서 천자의 법[王略]을 능멸하려고 합니다.
근개루왕의 국서,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
이런 류의 국서에는 다소 과장이 섞여있는 법이지만, 근개루왕이 백제에 보낸 이 국서는, 그 당시 고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에게 무언가를 짐작할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지고 대신과 힘센 귀척들을 죽이고 살해하기를 마지 않는다."
고려 안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증거다.
거련왕의 손에 고려의 대신과 힘센 귀척이며 대족들이 살해당했다는 것은, 고려 조정에서 귀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고, 세력을 쥐고 있던 자들이 모조리 철퇴를 맞아 패수(대동강) 물고기밥 신세가 되었다는 의미. 평양 천도 이후에 적국 백제에서 작성한 국서에서 하는 말을 단지 표현상의 과장이라고만 볼수 있을까?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詈.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幷得衣器鞍勒, 視之非高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恚.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鷂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況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跨塞天逵? 今上所得鞍, 一以實驗.]
옛날 요임금[唐堯]은 지극한 성인이셨지만 단수(丹水)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사람이라고 불렸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체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만일 지금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440년) 이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열 구 가량의 시체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주웠는데, 살펴보니 고려 것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이는 곧 천자의 사신[王人]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큰 뱀[長蛇: 고려를 가리킨 말]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 옛날 송(宋)이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 장왕(莊王)은 맨발로 뛰쳐 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信陵君)이 밥을 먹지 않았다 합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는 것입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거늘, 하물며 폐하께서는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도 기울이시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小竪: 장수왕을 가리킨 것]가 황제의 길을 걸터막게 할수 있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이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하소서.
근개루왕의 국서,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
차포 다 떼고, 지금 고려 때문에 죽겠습니다, 부디 이 불쌍한 중생 하나 도와주시는 셈 치시고, 고려를 치는데 힘을 좀 빌려주십쇼, 명분이 없다면 백제로 가는 북위 사신을 고려에서 죽여 바다에 시체를 버린 증거도 있습니다, 백제에서는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조금은 추한 꼴로 구걸하다시피 하는 국서에서, 백제의 긴박한 상황과 고려의 위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만도. 송사(送使) 소안(邵安)이 가져온 북위 현조(顯祖)의 답서는 백제의 억장을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得表聞之, 無恙甚善.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戢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親所聞見.]
표(表)를 받고 별탈 없음을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경(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 밖에 처해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마다않고 위(魏)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로 되고 팔방 끝[八表]에서까지 의(義)에 귀순하여 업고[襁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여례(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본 바이다.
북위 현조의 답서,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
그래. 여기까지는 좋다.
[卿與高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讐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경은 고려와 화목하지 못해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당했지만 진실로 능히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 건너 황복(荒服) 바깥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대가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봤는데 중국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을 갖고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범해선 안된다.
북위 현조의 답서,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
북위측의 말대로 정말 백제에서 건져 보낸 그 안장은, 백제로 오던 북위 사신이 갖고 있던 물건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을까? 아니면 고려를 의식해 일부러 그렇게 속여 말할수밖에 없었던 걸까? 개인적으로는 후자라 생각하지만, 여기 나오는 것만으로는 확정하기 어려울 것이다.(북위 사신이 정말 고려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고려의 해상 세력 즉 수군이 서해를 오가는 북위와 백제의 사신들의 길을 막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말이야 바른말로 북위 입장에서는 고려를 쳐야 될 이유가 없다. 고려가 뭐 특출나게 강하다거나 하는 것보다도 수지타산이 안 맞다. 그 무렵만 해도 고려와 백제의 국력은 누가 봐도 거의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아주 근소한 차이로 고려가 좀더 앞서고 있었다.
[知高麗阻疆, 侵軼卿土,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釁, 於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咎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고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며, 선군(先君)의 옛 원한[舊怨]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서(申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楚) · 월(越)와 같은 급함이 있음을 알겠다. 이에 응당 의를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다. 다만 고려는 선조(先朝)에 번국(蕃國)을 칭하면서 직공(職貢)을 바치는 것이 오래 되었고, 그(고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틈새[釁]가 있었지만 나라[魏]에 대해서는 명령을 어긴 잘못이 없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벌할 것을 요구하는데, 사정과 기회를 검토해 보니 이유 또한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보내 평양에 이르러 그 사유와 정상을 징험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아뢰어 청원하는 것이 빈번하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行人]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禮) 등에게 조칙을 내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일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뒤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런 연후에 군사를 일으켜 친다면 의에 합당할 것이다.
북위 현조의 답서,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
말이야 이리저리 수식 붙여서 번지르르하기는 하지만 뭐, 한마디로 이거다.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戢則保境. 故羈縻著於前典, 楛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況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麗卽敍,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協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구이(九夷)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道)가 창달되면 번국(蕃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경토(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는 일[羈靡]은 옛 전적(典籍)에 드러났으되 호시(槁矢)를 바치는 것[貢]은 연중 때때로[歲時] 비었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넓은 규범과 큰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 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높이고 국경밖에 정기(旌旗)를 달며, 외딴 나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 말하였기에 미처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지금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구명(究明)하도록 하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향도(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산물은 다 도달한 건 아니지만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는도다. 이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내리는데 별지(別旨)와 같다.
북위 현조의 답서,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18년(472)
불행인지 다행인지, 북위가 백제에 보낸 이 답서는 근개루왕에게 전해지지는 않았다. 처음 이 조서가 내려졌을 때, 북위는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어 백제로 가는 소안의 길을 막지 말고 보내주라 했지만, 태왕은 근개루왕과 원수진 게 있다며 '상국(?)' 북위의 요청을 거절했고 끝내 그 사신을 퇴짜맞혀 보냈다. 이때에도 북위는 태왕에게 항의하는 대신 소안에게 '왜 그랬냐' 하고 꾸짖는 정도로만 그치고, 다시 보내면서는 아예 동래(東萊)에서 바닷길로 백제에게 사신을 보내게 했으나 이들은 바닷가에서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렇게 백제의 북위에 대한 구원요청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아무튼 이렇게 북위에 별별 애걸을 해가면서 백제가 구원요청을 했지만 북위는 끝내 듣지 않았고, 근개루왕은 마침내 북위로 보내던 조공을 끊어버리고 사신도 보내지 않았다고, 《삼국사》는 전한다.
[六十一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61년(473) 봄 2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백제야 뭐 어쩌건 말건, 고려는 열심히 북위와 사신 주고받고 한다.
[六十二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遣使入宋朝貢.]
62년(474) 봄 3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을 송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 중에선, 고려가 북위에게만 조공하는 것이 아니라, 북위의 적국인 남조 유송이나, 북쪽의 연연에게도 계속 사신 보내면서 기회만 되면 북위를 치려고 작정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고려는 겉으로만 북위에게 굽실대는 것뿐이지, 속 들여다보면 북위를 상국(上國)으로 섬길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다는 것은, '조공'이나 '사여'라는 말로 대표되는, 소위 '조공무역'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조의 국서를 백제로 보내지 못하도록 실력행사를 한 주체는 고려였다는 점이다. 중요하다. 조공이나 책봉이 단순히 형식적 외교관례였다느니 하는 말보다도 몇 배 더 중요하다 이건. 고려가 중국의 번방이고 중국 왕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였다면, 자신들이 '상국'으로 떠받드는 나라의 사신이 가신다는데 감히 '싫은데요!'하고 막거나 하는 짓은 상상도 못한다.
[六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63년(475)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적어도 이 무렵에는, 고려나 백제는 중국에게 그런 '면종복배'를 행하면서, '조공'이랍시고 사신을 보내면서도 실제적인 주인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오히려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유송 사이에서 교차선도로 뛰놀듯이 하는 쌍방향 양다리 외교를 통해, 분열된 중국 왕조가 서로 대립하는 그 사이에 박쥐처럼 끼어서 '누가 먼저 쓰러지려나'하고 사태 추이나 보는 입장이었고, 또 실제로 그들이 쳐들어오면 맞서 싸울 의지며 힘도 갖추고 있었다. 자국의 국체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내려 했던 의지나 힘은 신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재미없는
《삼국사》는 그저 조공 이야기만 열심히 실어놓으셨을 따름이나.....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9월에 왕은 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그 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켰다. 그 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63년(475)
《삼국사》 백제본기에 보면, 백제를 공격한 고려군의 전술은 물론이고, 그 전략이나 사전계획까지, 실로 치밀한 작전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라 때에 이곳의 태수를 지낸 김대문이라는 사람(《화랑세기》 저자)이 쓴 《한산기(漢山記)》라는 책을 인용해서 적은 것 같은데, 괴이하게도 이 내용만큼은 고려와 백제, 신라, 그리고 일본에까지 알려져 그 편년이 일치하고 있다. 서기 475년. 그만큼 동북아시아를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先是, 高句麗長壽王, 陰謀百濟, 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愚僧旣不能知道, 思有以報國恩. 願大王不以臣不肖, 指使之, 期不辱命.” 王悅, 密使譎百濟. 於是道琳佯逃罪, 奔入百濟.]
앞서 고려 장수왕은 몰래 백제를 도모하고자, 백제에 간첩으로 보낼만한 자를 찾고 있었다. 이 때 승려[浮屠]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했다.
“우승(愚僧)이 아직 도를 깨치진 못하였으나 국은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대왕께서는 신(臣)을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이를 맡겨 주소서.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쳐온 것처럼 백제로 들어왔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
단재 선생의 말씀을 빌린다면, 거련왕은 아버지 광개토태왕과는 여러 모로 달랐다. 광개토태왕이 적국에 대해 칼이나 활로 떳떳하게 정면공격해 이기는 무골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먼저 간사하고 악독한 계책으로 내정을 혼란스럽게 하고 나라를 어수선하게 만든 다음에야 손을 대는 흉칙한 음모가, 소위 말하는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김유신한테만 단재가 비판한게 아니다.
평양으로 천도한 뒤 태왕은 몰래 조서를 내려 백제의 내정을 어지럽힐 계책을 가진 책사를 모집했고, 그 조서에 응한 것이 도림이라는 중이었다. 어쩌면 불교 수용 이후 고려에서 양성한 승병이었는지도 모른다. '호국불교', 소위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 승려도 왕의 백성이라는 관념하에 자원해서 군인으로 나아가 싸우는 시스템이 신라 이전에 이미 고려에도 있었을 터.(중이면 산에 들어가 염불이나 욀 것이지. 오지랖 넓게.)
[時, 百濟王近蓋婁好博弈. 道琳詣王門, 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 王召入對碁, 果國手也. 遂尊之爲上客, 甚親昵之, 恨相見之晩.]
이 때 백제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弈]를 좋아하였다. 도림은 왕문(王門)에 나아가 고했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
마침 근개루왕이 바둑이며 장기를 그렇게나 좋아했다던가. 도림이 이걸 알고, 바둑으로 근개루왕에게 접근해서 근개루왕의 환심을 샀고, 상객(上客)으로서 왕의 측근까지 될수 있었다. 이로서 왕에게 접근하는 1차 작전은 마무리된 셈.
[道琳一日侍坐, 從容曰 “臣異國人也. 上不我疎外, 恩私甚渥, 而惟一技之是效, 未嘗有分毫之益. 今願獻一言, 不知上意如何耳.” 王曰 “第言之. 若有利於國, 此所望於師也.” 道琳曰 “大王之國, 四方皆山丘河海. 是天設之險, 非人爲之形也. 是以四鄰之國, 莫敢有覦心, 但願奉事之不暇. 則王當以崇高之勢, 富有之業, 竦人之視聽, 而城郭不葺, 宮室不修, 先王之骸骨, 權攢於露地, 百姓之屋廬, 屢壞於河流. 臣竊爲大王不取也.” 王曰 “諾. 吾將爲之.”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作宮樓閣臺榭.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是以倉庾虛竭, 人民窮困, 邦之陧杌, 甚於累卵.]
도림이 하루는 시좌하다가 넌지시 말하였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상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으나, 한 가지 재주로만 보답했을 뿐 일찍이 털끝만치 도움 드린 일이 없습니다. 지금 한 말씀 올리려는데, 왕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말해 보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
도림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는데만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유한 업적으로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성곽은 수선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땅에 임시로 묻혀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옳다. 내 장차 그렇게 하리라.”
이에 나랏사람[國人]들을 모두 징발해서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ㆍ대사(臺榭) 등을 지었다.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둑을 쌓았다. 때문에 창고는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
자고로 토목공사 거하게 벌인 나라 치고 잘 된 나라 하나도 없었지. 요새도 그렇잖아. 개발업자 새끼들이 한옥 마구잡이로 헐어내면서 그 자리에 시멘트 때려부어 아파트 지어놓고 부자들만 받고 그런.(개발업자 개새끼들) 솔직히 대운하인지 뭔지도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걸 왜 해? 진시황제도 수 양제도 그렇게 과한 토목공사하다가 망했잖아. 아방궁 짓고 만리장성 짓고 진시황릉 만들고 나중에는 대운하까지.(그나마 관광자원으로 써먹을 수는 있더라.)
농번기에 백성들 동원하면 농사를 못 짓고 일을 해야되는데, 그러자면 그 해 농사는 망칠 각오를 해야만 한다. 더구나 그 시대는 그리 농경기술이 발달하지도 못했었던 시대인데. 그래 그런 시대에 그만큼 무리한 토목공사 하다가 나라 망친 왕이 저기 중국의 진시황제나 수양제 뿐이겠나. 인도에서는 무굴 제국의 샤 자한이 죽은 왕비 준다고 지은 타지마할 때문에 제국의 재정이 흔들려 결국 제국이 멸망하는 원인이 된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 고구려 봉상왕은 백성들 굶주리는데도 나몰라라 위엄 보인답시고 궁궐 으리으리하게 재건축하다가 결국 쫓겨나서 비참하게 죽었고, 광해군도 그렇게 현명하고 똑똑한 군주였지만 창덕궁 하나 잘못 지었다가 민심을 잃었는걸. 흥선대원군도 경복궁 때문에 지지율 떨어졌고.
말이 좀 헛나갔다만..... 아무튼 근개루왕으로서는 도림의 말이 옳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으나, 난데없이 토목공사를 벌여서 국고를 바닥낸 것은 사실 미친 짓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백제의 민생 경제는 거의 초토화된다.
[於是, 道琳逃還以告之, 長壽王喜, 將伐之, 乃授兵於帥臣.]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장차 정벌하고자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
이때 근개루왕이 탈출시킨 왕자 문주(文周)ㅡ《니혼쇼키》에는 근개루왕의 동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그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는 사태만은 간신히 모면하고 2백년을 더 이어나갈수 있었다.(하지만 이후 백제 정국은 10년 가까이 혼란에 휩싸인다.) 왕자 문주는 남쪽으로 해서 신라로 내려가 1만의 구원군을 얻어 이끌고 왔지만, 이미 위례성은 개작살난 뒤였다. 근개루왕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至是高句麗對盧齊于 · 再曾桀婁 · 古尒萬年<再曾 · 古尒皆複姓>等帥兵來. 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이에 고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와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尒)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북성(北城)을 쳐서 이레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서 공격했다. 성안은 위태로워 두려움에 떨었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
북성이라면 북한성, 즉 한강 북쪽의 위례성을 말하고, 남성은 남한성 즉 한강 남쪽의 한성이다. 《삼국사》에 보면 한성을 포위한 제우의 고려군은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면서,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分兵爲四道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고 적고 있다. 이 전투가 북성에서 있었는지 남성에서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한강 북쪽의 위례성 즉 북한성이 고려군의 손에 떨어지는데 이레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북성에서와는 달리 남성에서는 함락전이 아닌 심리전이 벌어졌던 것일까. "인심이 몹시 불안해졌다.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는 기록과 함께, 근개루왕은 호위기병 수십 명만 거느리고 한성을 빠져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고려군의 손에 잡혀 죽었다.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 桀婁 · 萬年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왕이 나가 도망치니 고려의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본래 죄를 짓고 고려로 도망친 국인(國人)이었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
거련왕은 간첩을 잘 활용했지만, 반역한 인물들을 써먹는 데에도 천재적이었다. 기록에는 백제왕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언급되어 있다. 고려의 장수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백제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이었다는 것이 《삼국사》의 설명. 뻔하다. 백제를 한 번 배신한 자들이니 고려라고 배신하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고 거련왕은 그들에게 '어디 증명해봐'하는 식의종군을 강요하지 않았을까. 이런 식의 용인술은 역사에 자주 있는 일이다. 흑치상지가 백제부흥군의 편에 서서 싸우다 당군에 항복하자 당군은 흑치상지에게 임존성을 치게 했다. 그곳은 백제부흥군 최후 거점이었다. 한 번 배신해본 경력이 있는 것들은 또 한 번 배신하기 쉽다는 논리는 지극히 당연하다. 배신이라는 건 믿음을 등진다는 것. '믿음'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마음 속의 조그만 '의심' 하나로도 가능한 일이다. 의심이 생기면 의혹이 일어나고 의혹이 일어나면 삐딱해지고, 결국 회의를 느끼다가 극단적으로 자신이 지금껏 믿어온 모든 것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자기가 오랫동안 믿어온 만큼 생활 속에 배어든 습관도 적지는 않을 텐데, 그런 것까지 모두 부정하고 뼛속까지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병법은 기만술. 항복하는 척 속이고 왔다가 정보 캐내갖고 다시 도망쳐 돌아가서 뒤통수 치는 것은 백제와는 여러 번 싸워본 고려인들이 가장 잘 안다. 이미 백제에서 말발굽 다치게 해서 도망쳐 왔다가 다시 백제에 붙었던 말먹이꾼 사기 때문에 백제에게 치양에서 대패한 일도 있는 만큼, '오늘부로 나 마음 돌렸소'하고 찾아온다고 그걸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중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지금도 갑작스러운 개종자나 극적인 전향인사는 믿지 못하고 있다."
거련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옛 백제인이었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백제 공격의 선봉을 맡긴 것인지도 모른다. 사기와는 달리, 이들은 고려의 대로인 제우와 마찬가지로 고려군 지도자 자격으로 참전한 이들이었다. 거련왕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전달받아 싸우는 자들임과 동시에 거련왕의 주시를 항상 몸에 받고 사는 이들이었다.
<근개루왕이 고려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아차산성. 지금의 서울 광장동 및 구의동 소재.>
《일본서기》에 보면 얼마 남지 않은 백제의 잔병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흐느끼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지려 하자 고려군이 거련왕에게 백제를 뒤쫓자고 말한다. 이에 거련왕이 이런다.
"안된다. 과인은 백제국이 왜국의 관가로서 유래가 오래 되었다 들었다. 그 왕이 왜왕을 섬기고 있음은 사방의 이웃 나라가 모두 아는 바다."
거련왕이 정말 백제를 '왜국의 관가'라고 불렀는지 어땠는지는 정확하게 말하면 모른다. 대체로 우리 나라 관련 기사에 대해서는 숨기거나 뒤집고 비틀어논 얘기가 워낙 많은 책이 《일본서기》다보니 대개는 안 믿지만, 백제와 왜의 관계를 생각해서 저런 비슷한 발언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것이 내 소견이다.
일찌기 『광개토태왕릉비』에서 "백제와 신라는 우리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었다"면서, 그 백제가 끌어들인 왜를 가리켜 고려 천하를 위협하는 가장 위협적인 적으로 묘사했던 고려인들의 세계관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 《일본서기》의 발언을 거련왕의 입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당시 고려인들의 백제관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쉽게 말하면 '비아냥'이고 '무시'. 광개토태왕이 쳐들어올 때에도 왜병을 끌어들여 맞섰던 백제가, 이번에도 다시 군사를 청하기 위해 남쪽의 신라로 그리고 왜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대항할 힘이 없어 별볼일 없는 피라미들한테까지 굽실거리는 놈들'이라는 발언의도를 담아, "백제는 왜국의 관가로 왜왕을 섬기는 것을 사방 나라가 다 안다!"고 백제를 아주 대놓고 형편없는 나라로 깎아내려버린 거다.
[盖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 國王及大后王子等, 皆沒敵手.]
개로왕 을유년(475) 겨울, 맥(狛)의 대군이 와서 이레 밤낮으로 대성(大城)을 공격하여 왕성(王城)이 함락되었다.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도 대후(大后)도, 왕자들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백제기(百濟記)》인용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14, 웅략기(雄略紀, 유랴쿠키) 20년 병진(476)
백제인들의 손으로 서술된 《백제기》의 이 문장만큼, 한성백제의 함락이라는 그 처절했던 순간을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묘사한 문장이 또 있을까. 직접 불타는 위례성을 똑똑히 지켜본 사람의 손이 아니면 이런 문장은 나오기 힘들다. 그랬다. 위례성의 멸망은 그토록 처참했다. 성을 함락시킨 뒤, 고려는 근개루왕을 비롯해 성 안에 남아있던 백제의 왕족들을 모조리 죽였고, 백제는 거의 절멸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거련왕의 평양 천도와 '남하정책'이 거둔 가장 큰 업적이자 성과였다.
아마 그 상황에서 문주를 추격했더라면 위례성만이 아니라 백제라는 나라 자체가 작살나서 역사에서 말끔히 지워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인데도, 태왕은 그러지 않는다. 백제를 쳐서 위례성을 함락시킨 것이 백제를 아주 작살내서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일까. 아니면 대무신왕이 부여에게 그랬던 것처럼, 동족의 정을 생각해서 아무 힘없는 노대국으로 전락시켜 자신들에게 감히 대항할 꿈도 못꾸게 만들어놓는 정도로만 그치려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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