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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3>제20대 장수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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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에 있는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남한에 있는 것이다.>

 

고구려 하면 '군사력'말고도 '벽화'를 떠올린다. 고구려 사람들이 살았던 생활모습과 그들이 생각한 하늘의 세계, 내세관을 가장 잘 내포하고 있으며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유산. 이들 대부분은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지안이나 평양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고, 남쪽에는 부여에 능산리고분이 있지만 백제 것이다. 남한 지역에는 고구려와 같은 벽화고분이 하나도 없는 걸까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순흥 읍내리 고분은 1986년에 발굴되었다. 비봉산 정상(높이 431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구릉의 경사면에 있는데, 무덤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인골은 목이 잘려 있었다. 아마 전쟁 중에 죽어서 목을 잃고 묻혔던 거겠지.

 

<동쪽 벽에 그려진 반라의 역사상.>

 

세월이 세월이다보니 벽에 그려진 그림은 색이 바래고 낡아 다 너덜너덜해졌지만, 처음에 이 무덤에 그릴 때만 해도 구릿빛 피부에 눈이 부리부리한 남자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이 울퉁불퉁한 근육을 뽐내면서 한껏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퇴락해버린 옛 제국의 쓸쓸한 궁터처럼, 세상을 뒤흔들 것처럼 힘을 뽐내던 자도 결국 이렇게 빛 바랜 그림처럼 쇠약해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세상의 이치. 곰팡이가 슬고 칠이 벗겨진 그림 속에서 역사도 함께 늙어 있어야 했건만, 늙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건한 모습으로 서서 정면을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무덤의 서쪽 벽. 역시 동쪽 벽과 마찬가지로 역사(力士)가 그려져 있다.>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라는 책에 보면, 고구려 벽화는 대개 두 가지 방법으로 제작되었는데, 하나는 돌로 쌓은 무덤칸 안의 벽과 천장고임에 여러 번 흙과 회를 입히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고운 백회를 얇게 발라서 면을 고르게 다듬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고구려 전기나 중기에는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유명한 무용총의 수렵도나, 각저총의 씨름도도 이런 방식으로 해서 그려진 작품들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벽과 고임의 돌면을 반질반질하게 다듬어서 석회나 회를 입히지 않고 돌의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이 경우 안료가 돌의 입자 속에 스며들어서 벽화의 보존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지금 강서대묘에 있는 사신도도 이렇게 돌의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린 것인데, 회를 바르지 않고 안료(물감)를 직접 돌에다 칠해서 그림을 그리려면 그 전보다 더 끈끈하고 보존성이 높으며 침투력이 강한 안료 및, '아교'의 개발이 전제되어야 하기에, 평양 천도 이후에 해당하는 후기 고구려 벽화에 이런 그림이 많다.

 

<북쪽 벽에 그려진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연꽃은 불교 수용 이후 고구려 벽화에서 자주 쓰이던 소재다.>

 

순흥의 것은 아마 전기ㅡ중기에 많이 쓰던 기법으로 그린 것 같다. 돌 표면에 직접 그리는 것과는 달리 세부표현을 수정할 수도 있고, 그리다가 주제를 바꿀 수도 있는데 보존성이 형편없다. 무덤칸이 밀폐된 상태로 계속 남아있어줘야 되고 안의 습도도 일정수준을 유지해줘야 벽에 처바른 회가 그대로 가만히 붙어있어 줄텐데, 우리가 알다시피 대부분의 고구려 벽화들은 도굴꾼들 손에 농락을 당해서 파괴되거나 무덤이 열려서 벽화가 흐려진 것이 많다. 저 읍내리 벽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무덤 벽화가 훼손된다거나 하는 것은 그닥 문제될 것이 못 된다. 죽은 사람에게 바쳐진 것이기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따라서 함께 썩어야 하고 그렇게 죽은 사람을 따라 저세상으로 가야 하는 물건이니까. 사실 고분 발굴이니 하는 것도 이미 죽어서 땅에 묻힌 사람들 괴롭히는, 이미 저 세상 간 것들까지 괜히 땅에서 파헤쳐 꺼내서 편하게 쉬지도 못하게 하고 말이야. 우리나라의 문헌 보존수준이 형편없어서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싶어 납득하려고 애써보면서도 이게 영 쉽지가 않다.

 

[七年, 夏五月, 國東大水, 王遣使存問.]

7년(419) 여름 5월에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7년의 풍년 끝에 찾아온 7년의 흉년처럼. 거련왕 7년에는 엄청난 홍수가 나라 동쪽을 뒤덮는다.

 

이 해(420)에 송(宋)이 진(晉)을 빼앗아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을 모두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봉하고 그 나머지 관직은 그 전대로 두었다.

《동사강목》 경신년 신라 눌지왕 4년, 고구려 장수왕 8년,

백제 전지왕 16년ㆍ구이신왕 원년(420)

 

고구려가 존속하던 7백년 동안, 중국 대륙에서는 수많은 나라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또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광활한 중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북쪽은 '5호(胡)'라 불리는 이민족의 북조가 지배했고 남쪽은 한족의 남조가 지배했다. 남조에서 가장 먼저 건국된 나라는 동진의 장군이었던 유유가 동진을 멸하고 세운 송(宋: 유송劉宋, 420~479)이고, 이후로 제(齊: 남제南齊, 479~502), 양(梁: 502~557), 후량(後梁: 555~587), 진(陳: 557~589) 등이 차례로 일어서서 양쯔강 일대의 강남을 지배했다. 이들 왕조에 의해 그때까지만 해도 황량한 땅이었던 강남이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나.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 영주제군사(營州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공(樂浪公) 고련(高璉)과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 백제제군사(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 부여영(扶餘暎)은 함께 해외에 있으면서 바른 도리를 지켜 멀리서 공물을 보내왔다. 이제 새로 송의 개국을 알려 나라의 아름다움을 나누어 가지려 한다. 고련은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부여영은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삼고, 지절(持節), 도독(都督), 왕(王), 공(公)의 칭호는 전과 같이 한다.

《해동역사》 권제54, 예문지1, 송 무제가 고구려 장수왕과 백제 구이신왕을 책봉한 조서

 

이 남조의 국가들 중에서 고구려와 충돌한 첫 나라는 송(유송). 이미 북조의 위(魏)나 연(燕)과는 숱한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고, 남쪽의 남조에서는 바다를 건너 유송이 가장 먼저 고구려와 만났다. 이때가 장수왕 8년(420) 가을 7월. 막 유송이 건국되었을 무렵이었고, 유송은 고구려에 비하면 아직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갓난아이였다.

 

송(宋)이 고구려왕을 가책(加冊)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삼고 독평주제군사(督平州諸軍事)를 더해주었다.

《동사강목》 경신년(신라 눌지왕 6년, 고구려 장수왕 10년,

백제 전지왕 18년ㆍ구이신왕 원년: 422)

 

유송에게 장수왕이 화답했다는 이야기도, 사신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유송에서는 거의 구애하다시피, 고구려에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낸다. 건국 한 달만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것이나, 별반 대답도 하지 않는 고구려에게 굳이 바다 건너 사신을 보낼만큼 유송에겐 고구려와 우호를 맺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가? 아무튼 유송의 러브콜을 받은 고구려는 이듬해(423) 3월 사신을 보냈다. 《송서》에 기록된 바 소제(少帝) 경평(景平) 원년, 간지로는 태세 계해의 일이었다.

 

고구려가 장사(長史) 마루(馬婁)를 송에 보내 방물을 바치니 송에서도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왕소자(王邵子)를 보내어 답례하였고, 백제가 장사 장위(張威)를 송에 보내 공물을 바치니, 송에서도 알자 여구은자(閭丘恩子)와 정경자(丁敬子) 등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어 교지를 전하고 위로하였다.

<동사강목> 갑자년(신라 눌지왕 8년, 고구려 장수왕 12년,

백제 구이신왕 5년: 424)

 

유송의 적극적인(?) 대고구려 구애정책의 성과라면 성과일. 그들로서는 참으로 '역사적인' 사신 답방이 이루어졌다. 《송서》에 보면 이것은 봄 정월에 이루어졌는데, 거련왕이 장사 벼슬의 마루를 보내어 송에게 형식상의 답례사를 보낸 것이다.

 

황제는 고한다.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都督) 영(營)ㆍ평(平) 2주 제군사(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고구려왕 낙랑공(樂浪公) 그대는 왕위를 동방에서 이어받아 선왕의 공적을 계승하였다. 그 은혜는 이미 드러났고 그 충성 또한 뚜렷하여, 요하(遼河)를 건너고 바다를 건너 본조(本朝)에 공물(?)을 바쳐왔다. 짐은 부덕한 몸으로 분에 넘치게 대통을 이어받아 길이 선인의 자취를 생각하면서 그 끼친 은택을 널리 펼칠 생각을 하였다. 이제 알자인 주소백과 부알자(副謁者) 왕소자 등을 파견하여 짐의 뜻을 전하고 노고를 위로한다. 그대는 어진 정치를 힘쓰고 닦아 그 공을 길이 융성케 하고, 지난날의 명을 밝혀 짐의 뜻에 맞게 하라.

《해동역사》 권제54, 예문지1, 송 소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보낸 조서

 

이 정도로 바다 건너 고구려에게 구애를 하다니, 역시 나라든 사람이든 힘이 세고 볼 일이 아닌가. 서글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외국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구애 활동을 벌여가며 어떻게든 수교하려고 안달을 했던 일이 이후 또 언제, 몇 번이나 있었을까. 군사력이든, 경제력이든, 사회 질서나 문화적인 수준. 그 네 개 중에 하나만 갖추었더라도 세상 모든 나라가 우리를 다르게 볼텐데. 그리고 저렇게 서로 친하려고 안달을 할터인데 말이다. 내가 죽을 때면, 그런 나라가 되는 것을 보고 죽을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 지방이 2천 리나 되는데 가운데에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遼水)가 흘러나온다. 한(漢)ㆍ위(魏)의 시대에는 남쪽은 조선(朝鮮)ㆍ예(濊)ㆍ맥(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했고 왕도는 환도산(丸都山) 아래에 있었다. 땅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들과 못이 없어서 백성이 의지해 살면서 시냇물을 마시고 토착(土著)함이 없다. 좋은 농토가 없기 때문에 그 풍속이 음식을 절약한다. 궁실(宮室)을 짓기를 좋아하며 사는 곳의 왼쪽에다 큰 집을 세워두고 귀신을 제사지낸다. 그리고 영성(零星)과 사직을 제사지낸다. 사람의 성품이 사납고 급해서 노략질을 잘한다. 그 관직에는 상가(相加)ㆍ대로(對盧)ㆍ패자(沛者)ㆍ고추가(古鄒加)ㆍ주부(主簿)ㆍ우태(優台)ㆍ사자(使者)ㆍ조의(皁衣)ㆍ선인(先人) 등이 있어서 높고 낮음이 각각 등급이 있다. 언어 등의 여러 일은 대개 부여와 같지만 성품과 기질과 의복은 다르다. 관직을 둘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나라 풍속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에 읍락(邑落)의 남녀가 밤마다 모여서 노래하고 유희한다. 풍속이 매우 음란해서 남녀가 서로 분탕하고 유혹함이 많으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그 나라 말은 모두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리하다. 국인은 용기를 숭상하고 활과 화살과 칼과 창을 사용하고 투구와 갑옷이 있으며 전투에 익숙하므로 옥저와 동예가 모두 부속되었다. 그 나머지는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된 것과 같다.

 

《남사》 고구려전은 아마 그때 고구려 사신이 '마지못해' 유송으로 가서 전한 고구려 소식을 바탕으로 편찬되었을 것이다.

 

[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修聘. 王勞慰之特厚.]

12년(424)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왕은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위로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삼국유사》에서 신라가 고구려에 억류된 인질을 거의 '빼가다시피' 데려간 것에 비하면, 그 신라의 사신에게 장수왕은 후한 대접을 하고 있다. 이 무렵의 신라로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처지였으니, 《삼국사》의 말대로 말로 살살 달래서 빼갔든 《삼국유사》의 말대로 계획 치밀하게 세워놓고 빼가서 고구려에게 눈총을 샀든, 고구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서는 신라로서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물왕 때에 신라를 침공한 백제-금관가야-왜의 연합 대군을 5만 보기로 임나가라(고령) 종발성까지 밀어붙여 작살을 낸 강력한 군사력의 소유자 고구려다. 내물왕 18년(373) 백제에서 투항해온 독산성주의 무리를 송환해 달라는 근초고왕의 말을 거절한 이래 백제와의 관계도 소원하던 차, 남쪽의 가야와 바다 건너 왜(倭)를 주적으로 두고 있던 신라로서는 의지할 곳이 고구려밖에 없었다. 『광개토태왕릉비』에서 신라 사신이 호소했듯이, 그러한 공격을 자력으로는 막아낼 힘이 없었던 신라는 고구려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결속을 유지해야만 했다. 신라로서는 고구려가 자국의 왕실, 사직과 백성을 유지하게만 해준다면야, 저들이 뭐 조공을 달래든 인질을 달래든 그럴 용의가 있었다. 군대를 보내 구원해준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요구를 받아들여, 왕족 실성을 인질로 홱 보내버린 역사를 봐도 그러하다.

 

게다가 고구려 역시 신라 안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있던 신라의 왕족 실성이 내물왕의 세 왕자를 제치고 신라 국왕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원래 왕위계승서열에도 끼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내물왕의 피를 이은 세 왕자들 대신 왕이 될수 있었을까? 그 정도로 고구려가 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면, 인질 한 명 놓쳤다고 그렇게 군사까지 보내서 뒤쫓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지 않을까 한다. 굳이 인질이 없어도 손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신라에서 인질을 보내건 말건 고구려가 신라같은 '소국'이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댈수 있다고 어디 생각이나 했겠는가.

 

[秋九月, 大有年. 王宴群臣於宮.]

가을 9월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왕은 왕궁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12년(424)

 

아무튼 이 무렵의 고구려는 꽤나 조용했다. 흉년도 풍년도 적절하게 들어 나라가 평안했고, 그토록 숱하던 전쟁도 치르지 않고, 마치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함처럼, 태풍의 눈 속에 들어있는 산처럼 국내성은 바람의 고요함과 사람들의 풍요만이 가득 차있었다.

 

[十三年, 遣使如魏貢.]

13년(425)에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남조와 대치한 북쪽의 북조는, 선비족 척발씨가 다스리는 위(魏: 북위北魏, 386~550)가 한창 세력을 떨치며 남동쪽의 북연을 압박하고 있었다. 북위뿐만이 아니라, 동위(東魏: 534~550), 서위(西魏: 535~556), 제(齊: 북제北齊, 550~577), 주(周: 북주北周, 557~581), 그리고 수(隋: 581~618)에 이르기까지. 이들 다섯 나라를 가리켜 북조라고 부른다.

 

이들은 모두,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 대흥안령 산맥 북쪽 산기슭인 알선동 일대에서 발흥한 유목민족 선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대택이라 불리는, 지금의 내몽골 호륜패이(呼倫貝爾) 일대를 거점으로 삼고서, 고구려 초부터 자주 우리에게 쳐들어왔고 그래서 유리왕이 동명왕의 개국공신이자 장수였던 부분노를 시켜 정벌한 적도 있고, 그랬는데 나중에 점점 세지더니 고구려에 쳐들어와서 환도성을 아주 깽판죽여놓고 갈만큼 커져있더라.

 

중국 북조의 다섯 개 나라를 비롯해, 후대의 수(隋)나 당(唐) 역시 엄밀히 그 계통을 따져보면 다 이 선비족의 후손들이고, 그 선비족 최후의 왕조라 할만한 당은 전연이 환도성을 파괴하고 고구려를 작살냈던 것처럼 신라와 작당해 결국 마지막에는 고구려를 무너뜨리고야 말았으니, 선비족과 고구려의 질기고도 질긴 원한관계란 대충 설명하자면 이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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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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