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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8>제20대 장수왕(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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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의 한성공함을 기점으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잃고 남쪽으로 밀려났지만, 《동사강목》의 설명처럼 한성을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웅진백제의 역사에서도 한성 즉 한산은 꼬박꼬박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려가 백제로부터 탈취한, 백제가 고려에게 잃었다고 분해한 위례는 지금 한강 권역 가운데서도 한강 북쪽을 가리키는 곳이며 백제에서는 이곳을 북한성(北漢城) 또는 북한산(北漢山)이라 불렀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 국학자들까지 일관되게 양주(楊州), 지금의 서울 강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성이라는 게 있으면 당연히 남한성(南漢城) 즉 남한산(南漢山)이 있어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지명이 백제에 분명 있었다. 《동사강목》에서는 남한성은 곧 백제의 첫 도읍지이자 온조왕이 정한 하남위례성이며 위치는 광주(廣州)ㅡ지금의 하남시라고 적고 있다.

 

위례성이라는 단어는 한성백제 수도의 이름을 가리키는 명사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고유명사로 지금의 서울 한 곳만을 가리킨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고, 《삼국사》에 나오는 한성(漢城)과 동일한 곳이라는 보장도 없다. 다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록들을 보면 백제는 일단 한강을 기점으로 한강 남쪽과 북쪽에 모두 유사시 수도로 삼을 수 있는 거점을 만들어 두고 있었고, 전자가 한성 즉 하남위례성이고 후자가 위례성 즉 정약용이 말한 하북위례성이며 고려군이 이레 밤낮에 걸쳐 공격해 함락시켰던 북성(北城)이 바로 이곳이다. 한강 남쪽에 있었던 한성 즉 남성(南城)은 고려의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함락당하는 지경에까지는 용케도 이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백제의 수도를 '위례성'이라고 불렀던 건 분명하지만, 온조왕 때에 한강 남쪽으로 '위례성'을 옮긴 뒤에는 그 신도시 신(新)위례성에 최초로 '한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한강 북쪽에 있던 구(舊)위례성은 그대로 위례성이라고 부르고 남쪽의 위례성은 '한성'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문제는 백제가 수도를 좀 많이 옮긴게 아니라는 거. 강의 남북으로 거점을 두 개나 만들어놓고 필요하면 무슨 이방저방 드나들듯 옮겨다니니 이게 위례성인지 저게 한성인지, 어제는 여기가 한성이었는데 오늘은 저기가 한성이래. 구별하는 것도 골치아픈 일이었다. 거기다 근초고왕 때 왕이 한성(남한성)을 떠나 위례성(북한성)으로 가면서 또한번 혼선이 생겼다. 지금까지 왕이 머무르는 수도를 '한성'이라고 했는데 왕은 '한성(남성)'이 아니라 '위례성(북성)'으로 가버렸으니 위례성을 한성(왕이 머무르는 성)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기존의 한성은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남성이니 북성이니 하는 말을 적은 《한산기》는 엄밀히 말하면 신라의 문헌이다. 신라 사람들이 적은 것으로 백제 사람들은 자기네 왕이 살고 있는 수도의 이름에 감히 남쪽이니 북쪽이니 하는 방위를 쓰지 못했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머무르는 수도는 언제나 '세상의 중심'이어야 했기 때문이다.(희한한 발상이군) 백제에 비하면 그 왕에 대한 부담이 없었던 김대문은 별 대수롭지 않게 방위에 따라 백제의 수도를 남성, 북성 하고 적었겠지만 백제 사람들이 그랬다간 당장에 목 날아갔을 일. 여기서 굳이 둘다 백제왕이 수도로 쓰는 곳인데 북한성이니 남한성이니 하고 방위를 붙여서 부르기보다는 차라리 왕이 살고 있으면 한성이라고 부르고 왕이 거기 안 살고 있으면 위례성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낫다고 백제 사람들은 판단했다. 여기서 한강 남쪽과 북쪽의 백제 수도를 각각 한성과 위례성으로 구별해 부르는 구별법이 생겼다. 다만 백제 왕실이 한강 남쪽을 북쪽보다 더 선호한 까닭에(《삼국사》에는 '북한성'이라는 이름은 나와도 '남한성'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한성 하면 으레 강남의 거길 가리키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된다.(하여튼 그 시대나 지금이나 강남 좋아하는 건)  

 

거련왕은 백제의 위례성(북한성)을 차지한 뒤, 그곳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했다. 고려도 백제와 마찬가지로 태왕이 머무르는 곳에 감히 남쪽이니 북쪽이니 하는 방위를 붙이지 않았다. 원래는 장수산성에 있던 자신들의 남평양을 북한성으로 확장시켜 버린 것인데 나중에 다시 이곳을 백제에게 빼앗긴 뒤에는 다시 재령으로 옮겨가서 남평양을 다시 설치한 것 같다. 아무튼 한성 공함 이후 551년까지의 남평양은 이곳, 강북의 서울에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시대, 그리고 거련왕의 시대. 부자가 이어가면서 고려(고구려)의 최전성기를 만들어 나갔던,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시대. 할수만 있다면 그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똑같을 터. 평양 천도 49년만에, 고려는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고 한반도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六十四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遣使入魏朝貢.]

64년(476)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킨 뒤 고려와 북위의 외교관계는 지속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토록 'Help'를 외치던 백제를 나몰라라하고서 잘도 놀고 있다. 《삼국사》백제본기에 보면 근개루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제 문주(文周)는 우유부단한데다 유약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제왕의 자리에는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 해 3월, 그러니까 고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내고 한 달만에 문주왕은 앞서 백제를 저버린 북위 대신 남조의 송(宋)에 사신을 보냈는데, 실패했다. 《삼국사》 백제본기 문주왕 2년조에는 "3월에 사신을 송에 보내어 조회하게 했으나 고려가 길을 막으므로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三月, 遣使朝宋, 高句麗塞路, 不達而還]."고 적고 있다.

 

육군만큼이나 또 강력했던 고려 수군은, 이번에는 서해 바다에 백제에겐 말도없이 전세계약을 해놓고 백제가 남조로 가는 뱃길을 막아버렸다. 거련왕으로서는 이미 한번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려와 전쟁을 벌여주시오"하고 청했던 전과(?)가 있는 백제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킬수 있는 해양봉쇄령, 강력한 금고(禁固)정책이 필요했다. 중국과의 교섭루트였던 서해가 고려 수군에 막혀버린 백제는 자신들의 힘이 되어줄 동맹세력을 찾아 남쪽의 육지로 눈을 돌렸다. 고려의 영향력이 그나마 미약하거나 아직 그렇지 못한 저 동쪽과 남쪽의 나라를 찾아서. 그곳에는 신라와 가야, 그리고 남해 너머의 탐라와 왜(倭)가 있었다.(이 무렵까지 아직 탐라는 제주도 일대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이루고 그들의 군주를 모신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었다.)

 

[六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65년(477)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동사강목》에선 《문헌통고》라는 중국 문헌을 인용해,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물길국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고 적었다.

 

이 해에 물길(勿吉)이 위에 조공하였다. 물길은 곧 말갈인데, 이때 처음으로 그의 신하 을력지(乙力支)를 보내어 위에 조빙하고 말 5백 필을 바치면서 말하였다.

“우리 나라가 먼저 고구려의 부락 열 개를 깨뜨리고서 가만히 백제와 힘을 합해 물길[水道]를 따라 고구려를 취하려 공모하고 사신을 대국에 보내어 그 가부를 묻나이다.”

위왕이 대답하였다.

“세 나라가 다 같이 번부(藩附: 제후의 나라로 붙어 있는 것)된 처지이니 함께 화순(和順)하고 서로 침략해 싸우지 말라.”

《동사강목》 권제2하(下), 정사년(신라 자비왕 20년, 고구려 장수왕 65년,

백제 문주왕 3년ㆍ삼근왕三斤王 원년, 477)

 

'을력지'는 일본 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에 따르면 '사자(使者)'를 가리키는 퉁구스어 '일치'에서 나온 말로, 단재 선생은 《삼국지》위지 동이전에서 한(韓)의 관직으로 나오는 '읍차(邑借)'와 고려의 관직 '울절(鬱折)' 명장 을지문덕의 '을지(乙支)'는 모두 같은 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단재 선생은 이걸 '일치'라고 읽으셨던 것 같지만 '사자'라는 건 심부름하는 사람이고서로의 소식이나 정보를 주고받는 중간매개자인만큼 '일치'보다는 '잇이(읻이)'나 '일이'로 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잇다'는 말에 명사 '-이'를 붙여서.)

 

477년은 백제 문주왕 말년이자 삼근왕 원년. 백제가 고려에 맞서서 물길국을 끌어들이려고 했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문주왕의 강건한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이긴 하지만 북위의 거절로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길국이 정말 말갈족의 국가라면, 말갈족은 기마민족인데 물에서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 학교 교수님한테 예전에 여쭤봤는데 말갈족이 사는 곳에는 강이 많고흑룡강은 몇천 km나 되는 거대한 강이라 선사시대부터 이미 해양문화가 발달했었다네. 기마민족인데도 해적이 있을 수가 있다는 거지.

 

《북사》에 실린 물길 열전에 보면, 물길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어 말갈이라고도 불렸다 했다. 고려나 백제, 신라와는 달리 읍락마다 제각기 '대막불만돌(大莫弗瞞咄)'이라 불리는 군장이 다스리면서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북사》에 기록된 것만 갖고 보면 모두 일곱 부족이었다고. 그 중에서도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속말부(粟末部) 족은 강한 군사가 수천이고 무용한 이가 많아 숱하게 고려를 쳐서 도적질을 벌이곤 했다. 그 북쪽의 백돌부(伯咄部) 족은 강병 7천을 거느리고 있었고, 백돌부 동북쪽의 차골부(車骨部)와 동쪽의 불날부(拂涅部), 불날부 동쪽의 호실부(號室部), 안거(安車) 서북쪽에 있었다는 흑수부(黑水部), 마지막으로 속말부 동남쪽에 있었다는 백산부(白山部).

 

불날부 동쪽으로는 숙신의 풍속을 닮아, 모두 흑요석 화살촉에 독을 발라 썼다는 이들 말갈족은 성질이 굳세고 사나워서 동이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족속이었다고 전한다. 활쏘기를 특히 좋아하는 것이라던지 서로 품앗이로 농사를 짓는다던지, 산을 공경한다던지 하는 것은 우리랑 닮았지만 언어가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했으니, 이들을 동족으로 본다는 건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일곱 개나 되는 말갈 부락들 중에서도 속말부나 백돌부를 빼면 나머지 부족은 모두 3천 이하의 군사를 거느렸고 그 중 흑수부가 가장 강성했다고 《북사》는 전하고 있다.

 

말갈의 땅에는 속말수(速末水)라 부르는 너비 3리 되는 거대한 강이 있었다는데, 훗날 발해를 세우게 되는 대조영이 속말말갈이 살던 곳에 살았다는 것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신당서》는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더부살이하던' 족속이라고 했는데, '더부살이'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속말수는 지금의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

 

[六十六年 遣使入宋朝貢 百濟燕信來投]

66년(478)에 사신을 송에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의 연신(燕信)이 내투해 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백제에선 이때까지 실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근개루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주왕이 실권을 쥐고 전횡을 일삼던 병관좌평(병조판서) 해구의 손에 손에 살해되고,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삼근왕마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 그러던 차에 해구가 드디어 대두성(大豆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좌평 진남이 이끄는 2천 관군을 격파했지만 덕솔 진로의 5백 관군에게는 패하여 해구는 잡혀 죽었다. 은솔 연신은 이때 해구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고려로 도망친 것으로, 《삼국사》백제본기는 도망친 연신 대신 그의 처자를 잡아다 웅진의 저자에서 조리돌림한 뒤 모두 죽였다고 적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삼근왕은 이듬해 죽고, 부여곤지의 아들 모대가 귀국해 동성왕으로 즉위한다.

 

[六十七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67년(479) 봄 3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거련왕 67년, 중국 남조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한족이 세운 유씨조 송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가 쫓겨나고, 별볼일 없는 집안 출신으로 여러 내란에서 군공을 세워 병권을 장악한 중령군장군(中領軍將軍) 소도성이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고려의 영향권하에 있던 거란족이 고려에게서 이탈해 북위에 가담한다.

 

고구려는 국토가 동북의 여러 오랑캐에 연하였는데, 유유(蠕蠕)와 더불어 지두우(地豆于)을 취해서 그 땅을 나눠 갖기로 꾀하였다. 거란은 옛날 고구려가 자신들을 침범한 것을 원망해서 그 부락 1만여 구를 거느리고 위에 부속하여 백랑수(白狼水) 동쪽에 머물러 살았다.

《동사강목》 권제2하(下), 기미년(신라 자비왕 22년ㆍ소지왕 원년, 고구려 장수왕 67년,

백제 삼근왕 3년ㆍ동성왕 원년: 479)

 

거란족이 고구려에게 정벌당했다는 것은 광개토태왕 때의 일이다. 영락 5년에 비려를 정벌해 '셀수 없이 많은 소와 양'을 얻은 일이 있다고 했으니까. 이 고려가 유유라는 종족이 세운 유연과 함께 거란족이 사는 지두우의 땅을 나누어가지겠다고 한 것. 유목국가로서 지금의 대흥안령 산맥에서 내몽골 지방에 위치했던 지두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 국경에서도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이런 곳을 두고 유연과 땅따먹기를 할 정도였다면 대체 고구려의 국경은 여기서 얼마나 더 넓어져야만 되는 걸까.

 

소와 양이 많고, 특히 명마로 이름이 높았던 지두우 주민들은 가죽옷을 지어 입고, 짐승의 고기와 젖을 주식으로 먹었다. 실위는 그 지두우의 동쪽, 물길의 남쪽에 살고 있던 몽골과 퉁구스의 혼혈 족속들로서, 철이 안 나서 고려로부터 공급을 받았다고 《동사강목》은 적고 있다. 고려가 장악한 지금의 요동 반도는 만주 대륙 최고의 철 생산지. 훗날 수나 당의 침략 전쟁에서 고려가 수차례 격퇴할수 있었던 힘도, 이곳 요동 지역의 철광에서 생산된 우수한 철제 무기가 바탕이 되었다. 물론 그러한 우수한 철생산지라는 것이, 수나 당이 계속 저 땅에 눈독을 들여 쳐들어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지만서도(그리고 결국은 우리 땅이었던 요동을 저기 짱깨들에게 뺏겼지.)

 

[六十八年, 夏四月, 南齊太祖蕭道成策王爲驃騎大將軍. 王遣使餘奴等, 朝聘南齊, 魏光州人, 於海中得餘奴等, 送闕. 魏高祖, 詔責王曰 "道成親弑其君, 竊號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越境外交, 遠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不以一過掩卿舊款, 卽送還藩, 其感恕思愆, 祗承明憲, 輯寧所部, 動靜以聞."]

68년(480) 여름 4월에 남제(南齊)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에 조빙하게 하였는데, 위의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대궐로 보냈다. 위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하였다.

"(소)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은 망한 나라를 옛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劉氏)에게 잇게 하려 하는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蕃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하고 하겠느냐? 이제 한번의 잘못으로 경의 이전의 정성을 덮을 수 없어 사신을 돌려 보내니, 그 용서함에 감사하고 잘못을 새겨 법도를 받들어 지킬 것이며, 그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동정을 보고하라."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남제 태조 소도성. 10년만 천하를 다스린다면 이 땅의 모든 흙이 금값이 되게 할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인물. 그러나 그가 세운 나라는 반백년은 커녕, 40년도 못 갔다. 소도성 자신은 재위 4년만에 죽었을뿐 아니라, 우완지(虞玩之)의 건의에 따라 원가(元嘉) 27년(450)의 호적을 기준으로 호적을 정리하고자 설치한 교적관(校籍官)은 제 구실을 못했다. 

 

이 무렵 가난에 시달리던 남제 백성들은 항상 호적을 거짓작성했다는 명목으로 처벌받아 변방에 수자리 서거나 성 쌓는데 동원되어야 했다. 호구조사를 철저하게 해서 사람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물려야 되는데, 그게 싫어서 호적에 어떻게든 이름을 빼려고 하니까.토지세에 인구세까지 내야 하는 농민들은 자식을 낳아도 그걸 숨겨버리고, 적발되면 저렇게 변방이나 축성 공사로 끌려간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먹고 죽을래도 세금낼 돈이 없는걸.

 

그래 가난한 농민들은 호적신고 제대로 안했다고 끌려가 벌받고, 양쯔 강 일대의 땅을 개척해 부를 쌓은 지주들은 뇌물에 청탁에 온갖 수단 다 써서 호적 뜯어 고치고도 법에 안 걸리니. 이러한 시대모순과 불합리한 세태는 나라가 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거쳐야만 하는 필수 수순. 그리고 마침내 영명 3년(485) 부양(富陽)에서 일어난 당우지(唐虞之)의 반란으로 그 분노는 폭발했다. (소도성의 아들 때에 가서야 겨우 진압)

 

하긴 이런 나라에게 뭘 믿고 동맹이며 수교를 제의할수 있겠나. 저쪽에서 먼저 수교하자 그래도 싫다고 거절해야 할 판인데. 그리고 북위로서도 고려와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사건 진상 보고해 올리라 요구해도, 그리 강경한 책임 추궁은 아니지. 결국 이 사건은 흐지부지 넘어갔고, 고려는 예전처럼 양다리 외교를 계속한다.

 

아참, 이때에 종산(鐘山)에서 초당사(草堂寺)라는 절이 개창되었고, 승랑은 그곳으로 옮겨가 주석하게 되었다.

 

[六十九年, 遣使南齊朝貢.]

69년(481)에 사신을 남제(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미쳤니. 우리가 너네 시키는대로 하게. 북위의 적은 곧 고려의 친구가 될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를리가 없잖니. 그렇게 북위의 경고를 마치 엿먹으라 비웃기라도 하듯, 고려는 다시 남제에 사신을 보낸다. 부패해서 언제 개작살날지 모르는 나라래도 북위 발목 정도야 잡아줄수 있을테고, 또 혹시 알아? 저렇게 처음에는 휘청거리다가 갑자기 확 일어나서 북위와 맞먹을 정도로 커질지.

그만큼 국제정세란 건 변수가 엄청 많은 거거든.(누가 들으면 내가 엄청 외교전문가인줄 알겠네. 에이 젠장할.)

  

[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 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3월에 고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 ·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쫓아가 이하(尼河)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3년(481)

 

거련왕 시절 고려의 대외 원정 기록으로는 이것이 유일한 패배 기록이다.(흥해읍은 지금의 경상도 포항시 흥해읍 일대를 말한다.)

 

[七十二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時, 魏人謂我方强, 置諸國使邸, 齊使第一, 我使者次之.]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 사신을 첫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북위에서도 고려를 어쩌지 못했다. 남제에 사신 보내지 말라는 북위의 경고를 고려가 무시했는데도, 고려는 북위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다. 1등급 대접을 받은 남제 사신의 숙소 바로 다음에, 고려 사신을 둔 것이다. 그리고 백제는.... 여전히 고려 수군에게 밀려 외교관계에 제약을 받는다.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가을 7월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했다. 약사는 서해에 이르러 고려 군사를 만나서 가지 못했다.

《삼국사》 권제26, 백제본기4, 동성왕 6년(484)

 

남제에서 고려와 수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백제 동성왕은, 고려를 견제하고자 경쟁하듯 남제에 사신을 보냈지만, 그 사신, 백제 내법좌평 사약사(사택약사)는 남제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려 수군의 견제를 받아 결국 가지 못했다. 이 무렵까지, 백제는 고려 수군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문주왕이 유송에 사신을 보내려다 실패한 뒤, 두 번째 좌절이었다.

 

[七十三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73년(485) 여름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四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74년(486) 여름 4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五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75년(487) 여름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이건 뭐, 《삼국사》가 아니라 조공사 아닌가.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려는 700년 내내 조공만 하다가 망한줄 알것 아냐. 뭐 《삼국사》라는 역사책 자체가 고려 멸망 이후 4백년이나 지나서 만들어진 책이니까 모자라는 기록을 중국 책에서 갖다붙였다는 속사정을 이해하고서라도, 그래도 참 너무 조공기사만 부각시킨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수가 없다. 망할 부식이 영감태기.

 

[是歲, 紀生磐宿禰跨據任那, 交通高麗. 將西王三韓整脩宮府, 自稱神聖. 用任那左魯, 那奇他甲肖等計, 殺百濟適莫爾解於爾林<爾林高麗地也.> 築帶山城, 距守東道. 斷運粮津, 令軍飢困. 百濟王大怒遣領軍古爾解, 內頭莫古解等, 率衆趣干帶山攻. 於是, 生磐宿禰進軍逆擊. 膽氣益壯, 所向皆破. 以一當百. 俄而兵盡力竭. 知事不濟, 自任那歸. 由是, 百濟國殺佐魯, 那奇他甲肖等三百餘人.]

이 해(487)에 키노 오이와노 스쿠네(紀生磐宿禰)가 임나에 있으면서 고려와 교통하였다. 장차 서쪽에서 삼한의 왕 노릇 하고자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하다 일컬었다. 임나의 좌로(左魯)와 나기타갑배(那奇他甲肖) 등의 계략을 써서, 백제의 적막고해(適莫爾解)를 이림(爾林)에서 죽였다.<이림은 고려 땅이다.> 대산성(帶山城)을 쌓고 동쪽 길을 지켰다. 식량을 운반할 항구가 끊어져 군사들은 기아에 빠졌다. 백제왕은 크게 노해서 영군(領軍) 고이해(古爾解)와 내두(內頭) 막고해(莫古解)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대산을 쳤다. 이에 오이와노 스쿠네(生磐宿禰)는 진군하여 요격하였다. 더욱 용기를 내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뜨렸다. 일당백이었다. 조금 있으니 군사는 다하고 힘이 빠졌다. 일이 안 될 것을 알고 임나에서 돌아왔다. 때문에 백제국은 좌로와 나기타갑배 등 3백여 명을 죽였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5, 겐죠키(顯宗紀) 3년 정묘(487)

 

고려와 관련이 있길래 일단 실어놓긴 하는데, 이건 또 뭐야? 거련왕이 왜놈 자식의 허영심을 적당히 이용해서 백제와 임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한 건가?

 

[七十六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秋閏八月, 遣使入魏朝貢.]

76년(488)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윤8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조공 기록 넌 좀 빠질 수 없냐?

 

[七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

77년(489)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이때의 고려의 위상을 보여주는 기록이 중국측에 남아있는데,

 

무제(武帝) 영명 7년(489)에 평남참군(平南參軍) 안유명(顔幼明)과 용종복야(冗從僕射) 유사효(劉思斅)가 위노국(魏虜國)에 사신으로 갔다. 위노국의 초하룻날 조회에서 고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에 안유명이 위노국의 주객랑(主客郞) 배숙령(裴叔令)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천자의 명으로 경의 나라에 왔다. 우리와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오로지 위(魏) 뿐, 그 나머지 외방 오랑캐들은 우리에 비하면 하찮은 존재다. 더구나 저 동쪽 오랑캐인 소맥(小貊)은 우리 조정에 신하노릇 하고 있다. 지금 감히 우리와 나란히 앉게 한단 말인가?”
유사효 역시 위의 남부상서(南部尙書) 이사충(李思沖)에게 말하였다.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위의 사신을 대우함에 일찍이 작은 나라와 나란히 서게 한 적이 없음을 경 역시 잘 알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다. 다만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전(殿) 위로 오르지 못할 뿐, 이 자리도 매우 높은 데이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에 유사효가 말하였다.

“옛날 이도고(李道固)가 사신으로 왔을 때는 바로 의관으로 간격을 두었다. 위의 사신이 필시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올 것인데 어찌 쫓겨나겠는가.”
안유명이 또 위노국의 임금에게 말하였다.

“두 나라가 서로 비슷비슷하기로 오로지 제(齊)와 위(魏)가 있을 뿐인데, 변경의 작은 오랑캐가 감히 신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남제서》

 

그러니까 남제에서 북위에 사신을 보냈는데, 북위에서 고려 사신을 남제 사신과 동급으로 대접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남제 사신이 항의하고, 북위의 접빈사 측에서는 남제 사신에게 쩔쩔매며 변명하는 그런 상황인데 고려가 남제의 신하였다는 증거로 중국 학자들이 제시하곤 하지만 뒤집어보면 고려가 남제나 북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외교적 자주성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고려는 자신들이 상국으로 모시던(?) 남제가 뭐라건 그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북위에 사신을 보냈다는 점인데, 다른 나라에 신하 노릇이나 하고 있는 나라에는 독자적인 외교권이 성립될 수가 없다. 북위에서 남제에게 변명하는 것도 구차하기 짝이 없지만, 남제에서 북위에게 항의한다는 것도 고작 '고려와 동급으로 대우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고 고려가 남제를 무시하고 북위에 독자적으로 사신 보낸 것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는다. 고려가 방자하다고 꾸짖는게 아니라 고려가 왜 자신과 동급으로 대접받느냐고, 고려가 아닌 북위에게 따지고 있다. 별꼴이다.

 

북위도 그렇다. 고려가 자신들의 신하로 사신 보내서 조공까지 하는데, 남제에서 '쟤는 우리 부한데?!'하고 따지고 있는데도 원래대로라면 고려에게 대고 '니들이 조직을 배신해?'하고 화내기는커녕 남제 사신들을 달래기에만 급급할 뿐 고려에게 뭐 달다쓰다 말한 흔적이 없으니... 북위 신하처럼 굴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제 신하처럼 굴지도 않은 저 고려를 대체 누구 신하로 잡아넣으려고 그러는지 참 나 원. 입맛 한 번 다시기. 쩝.

 

[夏六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兵侵新羅北邊, 陷狐山城.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여름 6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고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77년(489)

 

이것은 신라본기를 참조하자면 소지왕 11년의 일이었는데, '갑자기' 고려가 신라의 과현(戈峴)이라는 곳을 침공하고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한다. 호산성은 지금 어디인지 모르지만 아마 북쪽 어디에 붙어있는 성이었겠지 뭐. 이 무렵 승랑은 섭산의 어느 절에 자신의 승려 법도와 함께 주석하게 되었다.

 

[七十八年,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遣使入魏朝貢.]

78년(490) 가을 7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이제 조공 기록 쓰는 것도 끝이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 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勾麗王, 諡曰康.]

79년(491) 여름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나이 98세였으며, 왕호를 장수왕이라고 하였다. 위 효문제(孝文帝)가 이것을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어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태부(太傅)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왕[高勾麗王]으로 추증 책봉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평양 대성산성 성벽. 대성산성은 고려의 대궐 안학궁을 방호하는 방어성이었다.>

 

재위 79년에 왕은 죽었다. 어찌나 오래 살았던지 아들이 먼저 죽었고, 그래서 시호를 장수왕이라 했다고.... 하지만 태조왕(119세)이나 차대왕(96세), 신대왕(92세)의 세 분 선대왕이나, 이 무렵 국상을 지냈던 명림답부(113세)를 생각한다면 장수왕의 수명(98세)란 그닥 길다고는 볼수 없는 일. 그러고 보면, 고려 사람들은 타고난 명복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나 오래 살고 말야(괜찮다면 그 비결이나 좀 알았으면 싶은데). 차가운 얼음땅에서 살면서 글 읽는 것 빼면 대부분은 활 쏘고 말 달리면서 전쟁하는 것이 일과였던 고려 사람들이니 이렇게 건강한 몸을 가지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아들이 먼저 늙어죽었단다 글쎄.)

 

자기네들이 '속국' 이라고 지껄이는 나라의 왕에 대해서, 북위는 꽤나 엄청난 대접을 한다. 장수왕이 죽었을 때에, 북위 효문제가 흰 위모관에 상복을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식을 거행했다는 것. 하긴 선비족으로서 동이예맥족 고려계(문소황후)의 피가 섞인 효문제였으니, 고려 사람인 장수왕이 남같지만은 않았을 법도 하다. 자기 외조 쪽의 장례라 여겼던 걸까? 하지만 사실 중국 기록들 중에서, 중국 황제가 직접 이렇게 외국 왕에게 애도식을 해준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로 그 기록을 찾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다. 신라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654)에 당 고종이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해 주었고, 신라 무열왕이 죽었을 때(661)에도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밖에는 뭐, 조문 사신 보내서 부조금 명목으로 재물 보내주는 것이 대부분의 상례였다.

 

《신찬성씨록》에 수록된 한반도계 도래씨족 가문의 하나인 고마노미야츠코(狛造)의 조상은 고려의 왕이었던 부련왕(夫連王)에게서 비롯되는데, 여기서 장수왕의 휘인 거련(巨連)을 문득 떠올려본다. 부련이 만약에 대련(大連)을 잘못 쓴 거라면 어떻게 될까? 대(大)나 거(巨)는 똑같이 '크다', '위대하다'의 뜻을 지닌 한자로 서로 바꿔써도 이상할 것이 없는 글자. 《신찬성씨록》에서 거련왕을 대련왕이라 쓴 고마노미야츠코 가문의 족보를 보고 '대'를 '부'로 잘못 적어넣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런지. 아무튼 장수왕의 시대는 북위나 유송, 남제 같은 중국의 왕조 앞에서 전혀 꿇릴 것이 없었던, 유연하면서도 탄력있고 자주적인 외교를 펼치며 광개토태왕 시대의 영광을 계속해 이어나갔던 시대였다. 장수왕은 충실하게 아버지의 나라를 이어받아 발전시켰고,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룩해냈다.

 

하지만 산을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 법이고, 둥글게 찬 보름달은 다시 이그러들어야만 하는 법.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그리고 문자명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고려는 점차 이상해지기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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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다들 지금의 통구에 있는 장군총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네 변의 길이는 35.6cm의 정방형에 높이는 12.4m. 네모로 다듬은 화강암을 층층이 쌓아 만든 7층 방형계단석실묘. 돌은 제각기 크기가 달라서 큰 것은 길이 5.7m에 폭이 1.12m, 두께가 1.1m에 달하는 것도 있는데 이런 걸 1100개를 모아서 이 거대한 무덤을 쌓았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 고구려 고분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장대한 규모이다.>

 

유명한 무덤이지. 여기. 오죽하면 장군총을 가리켜서 '동방의 피라미드'라고까지 부르겠나. 저것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조차도 논란이 많은 무덤이다. 저 정도로 거대한 무덤을 만들 정도라면 고려의 왕권이 상당했다는 의미일 터, 일단 근처에 있는 광개토태왕의 무덤 태왕릉이 장군총과 형식이 같은 것을 보면 5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나라를 세울 때에, 그들의 수도가 곧 그 나라의 중심이고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에 태백산의 높은 꼭대기로 내려왔듯이, 높은 산은 곧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통로였고, 그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가장 가깝고 높은 통로를 모방해 고려인들은 저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을 거라고 혹자는 주장하셨다.

 

장군총의 특징은 몸체마다 기대놓은 커다란 돌덩어리들인데, '정호석'이라 불리는 이 돌들은 장군총 사면에 한 면마다 세 개씩 모두 열두 개를 갖다 놨는데 지금은 열한 개만 남아있다던가. 돌무덤이 너무 무겁다보니 균형이 깨지고 무너지고 하는 것을 막을 요량으로 갖다놓은 거란다. 석촌동 고분 앞에도 장군총의 정호석과 비슷한 모양의 돌들을 기대놓은 것이 있고, 사면마다 세 개씩 맞춰서 놓은 이유를 두고 고려인들이 '3'이란 숫자를 소중하게 여겼다고 보기도 한다.

 

더욱이 저 무덤 꼭대기에는 목조건물ㅡ기와를 얹은 사당이 있었던 흔적이 1964년에 확인되었다. 그, <고구려는 우리의 미래다>라는 책에 보니까, 이 무덤이 실은 고려의 개국조 추모왕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책의 저자께서 환인 지역을 답사하다가 오녀산성 부근에서 용의 전설이 있는 용산(龍山)이라는 산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 집안에도 물론 용산이라는 곳이 있어서 이 장군총은 우산(禹山)과 용산 사이의 들판 가운데서도 용산 기슭에 있단다. 국내성 동쪽 지역의 중심장소다. 태왕릉보다도 더 중심에 있고 내부 현실도 더 큰 이 장군총에 묻힐 정도로 고려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숭모를 받았던 왕이 추모왕 말고 누가 있겠는가.

 

나 자신은 식견도 없는 주제에 무턱대고 글이나 써보겠답세 뛰어들어 갈팡질팡하고 있는 몸으로써 여러 석학들 말씀에 뭐라 토를 달 계재는 못 되나, 추모왕같은 거물급 인물의 무덤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벌어진 이 지루한 전쟁에 나름 변수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조상에 대한 신앙을 강하게 가진 민족들. 제사를 지낼 권리를 얻는다는 것은 곧 그 일족의 가계(왕실의 경우에는 왕통)를 이어 정통성을 확보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진짜 추모왕의 무덤을 평양에 있는 저것으로 믿어도 되는 건지, 아니면 아직 옛 홀본성에 있는 건지, 장군총이 진짜 추모왕의 무덤이라면 평양의 추모왕릉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아, 머리 아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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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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