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5>제20대 장수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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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단연컨대 이 한반도에서 고려에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강국. 하지만 광개토태왕의 전술에 밀려 56개나 되는 성을 고려에 빼앗기거나 할양하고, 금관가야나 왜국과의 동맹도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뒤, 백제는 고려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동맹이라는 건, 두 나라 사이의 이해관계 즉 '순망치한'이라는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저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관계가 바로 '순망치한'의 관계다. 특히 백제와 왜 사이에서 그러한 이해관계가 두드러진다. 왜에게 백제는 자신들을 지켜줄 방어막이면서, 나아가 선진문물을 선물해줄 수 있는 스승이었다. 왜에는 없는 물건을 가져올 수 있는 교역창구이기도 했고.
《손자병법》에 보면 사지에 몰린 상태에서 군사들은 흩어지지 않고 더욱 처절하게 맞서 싸우는데, 그냥 도망쳐버리거나 항복해버릴 수도 있는데도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는 것은 용병술에 능숙한 장수가 병사들 사이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두 나라 사이의 의리라던가 우호국 사이의 도리라던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본질을 따져보면 두 나라 사이의 이해득실이 서로 일치했고, 그것이 똑같이 위협받을 처지에 몰린 상황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로 원수지간으로 지내던 오와 월의 사람이 같은 배 타고 가다가 폭풍 만났는데 서로 싸우고 있어봐. 다 죽을 거 아냐. 서로 싸울 때 싸우더라도 폭풍우는 일단 면하고 싸워야지. 목숨이란 소중한 거니까(아닌가?).
[秋七月, 百濟遣使請和, 從之.]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에 따랐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17년(433)
그러한 이해득실 따지기의 팽팽한 구도 속에서, 백제가 먼저 신라와의 관계개선을 주도했다. 이른바 나제동맹. 《삼국사》에 기록된 바 신라와 백제 사이에 두 번째로 결성된 동맹이었다.
전쟁에서 패한 뒤, 금관가야와 왜까지 거느린 남방해양동맹의 맹주였던 자신들 백제가 고려에 패한 요인을 분석하면서 그들은 전쟁에서의 '변수'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신라. 1차 나제동맹이 독산성주의 망명사건으로 결렬된 뒤, 신라는 고려에 가서 붙어있으면서 백제라는 골칫덩이로부터 피하려 애썼고, 그러다가 고려에 군사를 청해서 백제의 동맹이었던 금관가야를 무너뜨리고 왜병을 내쫓아버렸다. 이 사건으로 고려는 한반도 정세에 깊숙이 개입해 백제와 금관가야, 왜 사이에 맺어져 있던 남방해양동맹의 고리까지 끊어버리고 신라에 대한 복속을 더 강화시켜나갔다. 즉 신라가 고려와 더 가까워지게 됐다는 것. 백제는 전략을 수정해 고려와 신라 사이의 동맹을 끊고 대신 신라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길을 택했다.(고려가 자신들에게 썼던 전술을 반대로 써먹는 거지)
[冬十月, 吳國, 高麗國並朝貢.]
겨울 10월에 오국과 고려국이 나란히 조공(?)하였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1, 닌토쿠키(仁德紀) 58년 경오(보정연대 433년)
다 믿겠는데 얘네들은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다.
[十八年, 春二月, 百濟王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王以黃金·明珠, 報聘百濟.]
18년(434) 봄 2월에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에 왕이 황금과 야광주[明珠]를 백제에 예물로 보내 보답하였다.
《삼국사》 권제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18년(434)
백제가 먼저 손을 내밀고 신라가 그 손을 잡는 형식으로 맺어진 동맹은, 일단 백제 쪽에서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형세였다. 이 무렵 백제의 왕이었던 비유왕은 두 나라 사이에 동맹이 맺어진 것을 기념해서 좋은 말 두 필과 흰 매를 보냈고, 신라에서도 황금과 야광구슬을 보내 답례하는 형식으로, 두 나라 사이의 동맹은 어느 때보다도 더 굳게 맺어졌다. 비록 신라와의 동맹이 타결된 이후 왜와의 사이가 상대적으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고려라는 거대한 나라에 맞서기 위한 두 나라의 동맹은 이후 전개될 역사에 중대한 변수로 다가오게 된다.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系及諱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李敖, 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麗王. 秋, 王遣使入魏謝恩.]
23년(435) 여름 6월에 왕은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고, 또 그 나라의 휘(諱)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황실의 계보와 휘를 적어서 주게 하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왕(高麗王)으로 삼았다. 가을에 왕은 위에 사신을 보내 사은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위는 북위이고, 연은 북연이다. 《후위서》에 기록된 바 후위 세조 태연(太延) 원년, 간지로는 태세 을해(435) 6월 병오일. 안정복 영감은 《동사강목》에서 중국의 《북사》 기록을 인용해 이 무렵 고구려가 요동 남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황해도 해주에서 충청도 당진에 이르는 소해(小海), 북쪽으로는 부여에 이르러, 인구가 조위(曺魏) 때(3세기)보다 3배가 되었다고 했고, 이때 고려에서 북위로 조공 가는 사신이 갖고 가는 물품이 한 해에 황금 2백 근, 백은(白銀)이 4백 근이었단다.
한편 북위는 고려의 후손들이 세운 북연을 정벌하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실행에 책수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거련왕 23년에 해당하는 유송 원가 12년(435) 6월 무신에, 북위 세조는 낙평왕(樂平王) 비(丕),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도하(徒何)ㆍ굴원(屈垣) 등에게 명하여 북연을 정벌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魏人數伐燕, 燕日危蹙. 燕王馮弘曰 “若事急, 且東依高麗, 以圖後擧.” 密遣尙書陽伊, 請迎於我.]
위 사람들이 연(燕)을 자주 쳤으므로, 연이 날로 위급해지게 되자, 연왕 풍홍(馮弘)이
“만약 사태가 급하면 동쪽으로 고려에 의지하다가 나중에 일어나기를 도모하겠다.”
고 하고,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몰래 보내 우리에게 맞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3년(435)
북위가 북연을 위협하는 와중에, 태상(太常) 벼슬에 있던 양민은 북연왕 풍홍에게 태자를 북위에 보내어 입시시키라고 권했지만, 풍홍은 일이 다급해지면 고려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겠다며 양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고려는 신의가 없다며(뭐?!) 믿을수 없는 나라라고 양민이 말렸지만, 풍홍은 끝내 듣지 않고 거련왕에게 자신을 받아달라고 청한다. 《자치통감》의 설명이다.
[二十四年, 燕王遣使入貢于魏, 請送侍子, 魏主不許, 將擧兵討之. 遣使來告諭.]
24년(436)에 연왕이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고 시자(侍子)를 보내겠다고 청했으나, 위왕이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하였다. 사신을 보내 통고해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시자는 아들을 인질로 하여 천자를 시종하게 하는 것으로, 질자(質子) 즉 인질과 같은 말이다. 북연에서 북위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겠다고 했음에도, 예전부터 북연을 압박하면서 칠 기회만 노리고 있던 북위는 이러한 북연의 요청을 거절했고, 마침내 북연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개시하면서 고려를 포함한 주변 제국에 북위를 도우라는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서 3월 신미에 북위는 평동장군(平東將軍) 아청(娥淸)과 안서장군(安西將軍) 고필(古弼)을 시켜 북연을 치게 한다.
[夏四月, 魏攻燕白狼城, 克之. 王遣將葛盧·孟光, 將衆數萬, 隨陽伊至和龍, 迎燕王.]
여름 4월에 위가 연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왕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으로 가서 연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북위가 북연의 화친제의를 거절하고 군사를 일으키면서 주변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북연을 돕거나 황제의 망명을 받아들이면 그날이 너네 제삿날인줄 알아."라는 경고였다는, 《해동역사》의 설명을 빌리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미리 고려와 북연 사이에는 비밀스럽게 약조가 되어있었던 터(고려로서는 이게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던지), 거련왕은 갈로와 맹광 두 장수(게임 '천년의 신화'에서 영웅 유닛으로 나왔었지)를 북연의 화룡으로 보내 풍홍을 데려온다. 화룡은 북연의 수도 용성이다.
[葛盧 · 孟光入城, 命軍脫弊褐, 取燕武庫精仗, 以給之, 大掠城中. 五月, 燕王率龍城見戶東徙, 焚宮殿, 火一旬不滅. 令婦人被甲居中, 陽伊等勒精兵居外, 葛盧·孟光帥騎殿後, 方軌而進, 前後八十餘里.]
갈로와 맹광은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헤진 옷을 벗게 하고, 연의 무기고에서 예리한 무기를 가져다가 나누어 주었으며, 성 안을 많이 약탈하였다. 5월에 연왕이 용성(龍城)에 거주하는 가호(家戶)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웠는데, 열흘이 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은 갑옷을 입고 가운데 있게 하고, 양이 등은 정예군을 통솔하며 바깥에 서게 하고,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대열의 맨 뒤에 서서, 벌린 대열을 하고 나아가니 앞뒤가 80여 리나 되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4년(436)
고려의 장수 갈로에 대해 《위서》 본기에는 갈만로(葛蔓盧), 《북사》에는 갈거로(葛居盧)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가 한 글자 떼고 갈로라고 적은 것은 《자치통감》을 따른 듯 하다. 이름표기에 뭔가 탈자가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위서》에 나오는 표기가 옳은지 《북사》에 나오는 표기가 옳은지는 확답할수 없고, 나 자신은 전자를 따르지만 이것도 정론이라고 내세우는 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갈씨 성을 가진 만로(蔓盧)일 것인데 만로라는 건 사람 이름이 아니라 벼슬 이름이 아닐까?
《동사강목》에는 장수왕이 파견한 갈로와 맹광이 용성에 당도하기 전의 일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북연 말기에 일어난 반란과도 연관이 있다. 북연의 상서령 벼슬을 지낸 곽생(郭生)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고려로 가는 골 꺼려하는 용성 백성들의 심리를 간파하고그걸 빌미로 풍홍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침 북연왕을 데리러 동문으로 들어오던 고려군과 황궁 밑에서 충돌했다. 그리고 고려군에게 패해 화살만 맞고 도망쳤다. 곽생의 군사를 격퇴한 뒤, 갈로와 맹광은 자신들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에게 낡은 갑옷과 무기 대신 북연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새 갑옷과 무기를 지급한 뒤, 용성 안을 크게 노략질하였다ㅡ고 《삼국사》와 《동사강목》은 말하고 있다.
고려군이 얼마나 용성 안에서 노략질을 벌였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황궁은 풍홍 자신이 직접 태워 없앴다. 《북사》에 입전된 북위의 지휘장 고필(古弼) 열전을 보면, 고려군이 풍홍을 데리고 도망칠 때 고필의 부장 고구자(高苟子)가 고려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마침 술에 취해 있던 고필이 칼을 뽑아 중지시키는 바람에 풍홍이 달아날 수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魏主聞之, 遣散騎常侍封撥來, 令送燕王. 王遣使入魏奉表, 稱 "當與馮弘, 俱奉王化." 魏主以王違詔, 議擊之, 將發隴右騎卒, 劉絜·樂平王丕等諫之, 乃止.]
이 소식을 들은 위왕은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보내 연왕을 보내라고 했다. 왕은 위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핑계[稱]를 댔다.
"마땅히 풍홍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들겠나이다."
위왕은 조(詔)를 어겼다며 공격할 것을 논하고 농우(隴右)의 기병을 보내려 했는데, 유결(劉絜)과 낙평왕 비(丕) 등이 간하자 그만두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4년(436) 가을 9월
풍홍의 송환을 요구하는 북위에 거련왕은 "풍홍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겠다"는 내용의 표문을 올렸다. 정중한 언사를 띤 '거절'이었다. 격분한 북위 세조는 고려와 전쟁까지 벌이려 했지만, 낙평왕 탁발비(원비)가 “화룡(和龍)이 새로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농상(農桑)을 장려하여 군비를 쌓은 뒤에 가서 차지하면 출동 한 번에 그들은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간언하는 것을 듣고 그만두었다.
북연과는 미리 맺어놓은 약조도 있고 해서 그렇게 고려로 받아온 것 뿐이지만, 그렇다고 북위와 원수질 생각도 없고, 북위가 내놓으란다고 순순히 내놓을만큼 힘이 딸리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국력이 고려에게는 있다.만약 북위가 북연왕을 내놓지 않으면 쳐들어오겠다고 무력시위를 했어도 굴하지 않았을 판인데, 용케도 북위에서는 더이상 고려에 대해 북연왕 송환을 독촉하지는 않는다. 아무튼간에 북연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건국 28년만의 일이었다.
[二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25년(437)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그럼에도 고려와 북위는 참, 질긴 관계를 유지했던 듯 하다. 고려에서도 북위와 괜히 사이 틀어질 이유를 찾지 못한 것 같고, 북위로서도 아직 남쪽의 유송과 대치하고 있는 판에 고려라는 적을 또 하나 만들 필요는 없었던 것. 거련왕 시절에는 북위에 사신 보낸 기록만 손가락으로 꼽아 열 건이 거뜬히 넘는다.
[二十六年, 春三月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豐. 弘素侮我. 政刑賞罰猶如其國.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26년(438) 봄 3월이었다. 이전에 연왕 홍이 요동으로 왔을 때, 왕께서는 사신을 보내 위로하시고 말하였다.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이 벌판으로 행차하시느라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소이다.”
홍은 부끄럽고 화가 나서 천자를 칭하면서[稱制] 왕을 꾸짖었다. 왕께서는 그를 평곽(平郭)에 두었다가 곧 북풍(北豐)으로 옮기게 하셨다. 홍은 평소 우리 나라를 업신여겼다. 여전히 정치와 형벌[政刑], 상주고 벌 주기를 마치 자기 나라에서 하던 것처럼 했다. 왕께서는 그의 시자를 뺏아 버리고, 그 태자 왕인(王仁)을 잡아와 인질로 삼으셨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고려기》에 보면 "평곽성은 지금의 이름이 건안성(建安城)이다. 나라 서쪽에 있고 본래 한(漢)의 평곽현이었다[平郭城, 今名建安城. 在國西, 本漢平郭縣也]."라고 설명되어있다. 물론 《한원》에 인용된 것이다. 《한원》에서는 또 《한서》지리지와 를 인용해"요동군(遼東郡)에 속했고 철관(鐵官)과 염관(鹽官)이 있었다[屬遼東郡, 有鐵官鹽官]."고 증언하고 있다. 《십육국춘추》에 따른다면 이 해는 대흥(大興) 6년이다.
아직도 이 자가 잠을 덜 깼나. 아니면 나라 망한 현실 앞에서 술로 살다가 알콜중독이라도 걸렸나. 고려에 도망쳐와서 빌붙어 얹혀사는 주제에 저게 무슨 추태인가. 제깟 게 천자면 천자지. 여긴 북연이 아니고 고려야 이 사람아. This is Corea!!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 宋太祖遣使者王白駒等迎之, 幷令我資送. 王不欲使弘南來, 遣將孫漱·高仇等, 殺弘于北豐, 幷其子孫十餘人.]
홍이 이것을 원망해서 송(宋)에 사신을 보내고 표(表)를 올려 맞이해 줄 것을 구하였다. 송 태조가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고, 아울러 우리에게 명령하여 (연 왕에게) 노잣돈을 마련해 보내라고 하였다. 왕께서는 홍이 남쪽으로 못 가게 하려고, 장수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그 자손 10여 명까지 죽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6년(438) 3월
결국 거련왕은 외국 황제 한 명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고야 말았다. 망명객으로서 외국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니 조금은 동정심이 들기는 하지만, 자기 처신도 하나 제대로 못하고 중구난방 여전히 자신이 천자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자기 화를 자기가 자초한 것이니, 뭐 객관적으로 봐서는 동정의 여지는 '없다'고 해야 되리라.
《동사강목》에 보면 지금의 평안도 운산현(雲山縣)에, 풍홍을 장사지낸 '황제무덤'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살해당한 풍홍은 거련왕으로부터 소성황제(昭成皇帝)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거련왕은 인질로 잡아두었던 그의 아들 풍왕인을 비롯한 풍홍의 자손 열 명도 모두 죽이고, 아울러 자신의 장수를 살해한 유송의 사신 왕백구도 체포해서 본국으로 송환해버린다.
[白駒等帥所領七千餘人, 掩討漱·仇, 殺仇, 生擒漱. 王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太祖以遠國不欲違其意, 下白駒等獄, 已而原之.]
백구 등은 거느리고 온 7천여 군사를 이끌고 손수와 고구를 습격하여,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왕께서는 백구 등이 제멋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사신을 시켜 그를 잡아 보냈다. 태조는 (고려가) 멀리 있는 나라이므로 그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백구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후에 풀어주었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6년(438) 3월
거련왕이 고려 국법으로 처결할수 있는데도 굳이 송으로 보낸 것은, 사실 송에 대한 경고였다. 송에서 온 수군이 고려 장수를 죽이는 사태 앞에서, "니네들이 어떻게 처치하는지 보자" 하는 묵언의 협박인 셈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유송 태조가 취한 행동이란 누가 봐도 고려를 의식한 저자세였다. '멀리 있는 나라의 뜻을 거스르지 않게 하려고' 거련왕이 잡아보낸 사신을 잠시나마 감옥에 억류한 것만 봐도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와 마찰을 빚지 않으려는 '배려'이자 '대책'이었긴 하다만, 이 정도로 두 나라 사이에는 힘의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二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 十二月, 遣使入魏朝貢.]
27년(439) 겨울 11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고려는 북위와 꽤나 우호적인 사이를 유지한 편이지만, 439년부터 462년에 이르기까지 고려에서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439년을 기점으로 고려는 북위에 보내는 사신을 중단해버리고, 대신 남조의 유송과의 관계에 신경쓰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유송의 태조가 북위를 치기 위해 고려의 말 8백 필을 사갈 때에 선뜻 내준 것을 보면 말이다.
고구려가 말[馬]을 송에 바쳤다. 8백 필인데, 송이 위를 정벌하고자 조명으로 구했기 때문이다.
《동사강목》 신라 눌지왕 23년, 고구려 장수왕 27년,
백제 비류왕 13년 기묘(439)
고려의 수도가 있던 평양에서 유송의 수도가 있던 난징(南京)까지 가려면 직선거리로 대략 700km쯤 된다고 한다. 배 타고 한 1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이게 참... 말한테나 말 실어 나르는 사람에게나 참 쉽지 않은 항해다. 예전에 어떤 만화책(교육만화였음)에서 읽은 표현을 빌려오자면 '쪽박없는 물(바닷물)도 마시고 숭어하고 입도 맞추는' 끔찍한 항해였다.
이 무렵 '말'은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로서(지금으로 치면 미사일 800기와 맞먹는다나?) 몹시 귀한 교역품에 해당했다. 이미 동천왕 때에 강남의 손권이 다스리던 동오에 말 80필을 배에 실어보낸 전과가 있다. 선비족 왕조인 북위가 말을 직접 기르고 생산한 것과는 달리, 유송이 있던 강남 일대는 대규모로 말을 기르기에는 자연환경이 안 따라주기 때문에, 북방의 어디에서든 말을 사들여 와야만 했고, 그 '어디'는 북위 아니면 고려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 군수품 및 교역품으로써 페이가 엄청 높다보니까, 각국에서는 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추세였다. 고려만 하더라도 소나 말을 다치게 했다가는 거의 살인죄에 준하는 처벌을 받았다고, 《수서》 고려열전은 전하고 있다. 백제의 경우는 근초고왕 때에 고려로 도망친 백제 사람 사기의 죄목이 '나라에서 기르는 말의 발굽을 다치게 한 죄'였으니, 말이나 소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귀하게 여겨지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에는 말 훔친 사람을 6~8백명씩 묶어서 저기 평안도나 함경도 변방으로 내쫓든지 곤장을 치던지, 팔뚝에다 '말도적'이라고 인두로 글씨를 지졌다나. 말이 귀하긴 귀했나보다.
말의 숫자는 조선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글거렸겠지만 이 말을 또 보내는 게 쉬운게 아니다. 북쪽으로는 북위로 가로막혔으니 바다로 가야 될텐데, 해안선을 따라 가는 연안 항해로 간다고 해도 몸집이 큰 생명체(그것도 살아있는 것)를 배로 운반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평양에서 난징까지 말 6백 마리를 실은 배를 띄우는 건 당시로서는 조선술이라던지 항해술 같은 것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야지 안 그러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고려의 조선 기술과, 그렇게 만든 배를 띄워 항해를 하는 기술은,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뭐 아무튼 고려는 북위하고도, 유송하고도 친하게 지낸다. 북위를 치려 하니 말 좀 보내달라고 하는 유송의 다소 '거만한' 말도 다 들어주고. 근거리의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원거리의 유송, 북위의 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서 북위가 감히 고려를 넘볼 생각을 못하도록 힘의 균형을 잡아놓는 것이다. 적의 적은 나의 동지ㅡ라는 거지.
더구나 말의 수요가 적은 강남을 상대로 한 군마 장사는 이문이 엄청나거든. 고려로서는 군침 도는 시장인 셈이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강남의 남제와 대치중이던 북위의 사신 송변이 북위의 말을 가져와 바치는(파는) 등, 적국 사이에서도 군수물자를 파는 일들이 공공연히 성행하던 이 시기의 상황에 비추어 볼때, 고려가 남조에 말 장사를 하면서 북위의 눈치를 받고 안 받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장사꾼은 돈 되는 일이라면 칼날이라도 핥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잖아.
확실히 아버지만큼의, 어쩌면 그보다 더 뛰어난 역량을 태왕은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청출어람(靑出於藍)ㅡ. 남색은 청색에서 나왔지만 청색보다도 더 진한 법. 하지만 남색이 청색보다 진한 것이 낫다고는 말할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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