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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2>제3대 대무신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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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를 읽다보면 가장 황당한게,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기상관측이나 천문관측에 대한 기록이다. 오늘은 어디서 무슨 별이 어디에 있었다든지, 무슨무슨 날에 일식이 있었다던지 하는 것은 당대에 하늘의 움직임이 인간에게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 생각한 신앙적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줏어들었다만, 기상현상 기재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있다.

 

[十四年, 冬十一月, 有雷, 無雪.]

14년(AD. 31) 겨울 11월에 천둥이 쳤으나 눈은 내리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아시다시피 김부식 그 영감탱이가 《삼국사》라는 책을 지으면서, 우리 나라의 역대로부터 전해온 수많은 《고기(古記)》며 신라 때부터 전해진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같은 야사들, 그리고 《구당서》, 《책부원귀》, 《양서》, 《자치통감》등 무수한 중국측 기록까지 죄다 가져다 우리나라 관련 기록을 뽑아서 엮었다. 그런 탓에 지금 그 전문이 전하지 않는 고기류 역사책들을 제외한다면, 중국과의 관계를 기술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들 시각에서 쓴 기록을 의 여과없이 실어놓은 경우가 많다.

(조공 어쩌구 한 것이나 우리가 중국을 침범했다고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이지)

 

중국 기록을 참조하지 않고 우리 기록을 참조한 대목(개인적으로는 그것을 국록國錄이라 부르고 있다) 절반은 모두 기상현상에 관한 것인데, 여름에 겨울 옷을 입는 사람이 있었다던지, 폭풍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던지 하는 것이다. 물론 기상현상이 농사에 영향을 미치기에 중요하다는 건 맞는 말이겠지만, 나무가지가 서로 붙었다던지 겨울인데도 얼음이 안 얼었다던지 하는건 대개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실어놨는지, 난 알수가 없다.

 

이러한 일련의 기이한 현상들은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나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백제 말년에 괴이한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나, 고구려 보장왕 때에 평양에 붉은 눈이 내렸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모두가 왕조의 멸망을 암시하는 전조로 기록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왕조의 멸망을 앞두고 하늘에서 경고를 하기 위해 기상현상으로 혹은 천문현상으로 암시를 준다고 믿었고, 간혹 그런 것들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어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했다. 그랬기에 고대의 통치자들은 기상이라던지 천문현상을 꼼꼼하게 관찰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그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사상적인 도구로 사용했다....는 어려운 말따위는 집어치우고.

 

[十五年 春三月, 黜大臣仇都·逸苟·焚求 等三人爲庶人. 此三人爲沸流部長, 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其所欲, 有不與者卽鞭之. 人皆忿怨. 王聞之欲殺之, 以東明舊臣, 不忍致極法, 黜退而已. 遂使南部使者鄒勃素, 代爲部長.]

15년(AD. 32) 봄 3월에 대신 구도(仇都) · 일구(逸苟) · 분구(焚求) 등 세 사람을 내쫓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이 세 사람은 비류부장(沸流部長)이 되었는데, 그 됨됨이가 욕심이 많고 야비하였다. 남의 처첩과 가축[牛馬], 가진 재산[財貨]를 제멋대로 뺏고, 주지 않는 자는 채찍으로 때렸다.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원망스럽게 여겼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들이 동명왕의 옛 신하[東明舊臣]들이었기에 차마 극형에 처하지는 못하고 내쫓는데 그쳤다. 마침내 남부사자(南部使者) 추발소(鄒素)를 대신 부장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어떤 의미로는 '숙청'이라고도 불릴 이번 내정개혁의 골자란, 선대 동명왕 때부터 조정에서 신하 노릇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던 폐신(弊臣)들을 조정에서 내쫓는 것이었다. 비류부는 원래 송양의 비류국으로 고구려에 최초로 복속된 나라였다. 그 책임자 송양의 딸은 유리왕의 비가 되었으니 이곳은 대무신왕에게는 외가이기도 한 곳. 그러니까 고구려 왕실의 외척인데, 외척이라는 신분을 믿고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그들의 벼슬을 빼앗고 내쫓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죽이지는 않고, 그냥 귀척의 신분을 깎아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일반 서인으로 만드는데 그쳤다. 백성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들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선대로부터 조정에서 봉사한 원로대신이니까, 체면치레는 해준 셈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단순하고, 또 지극히 당연한 일 같지만, 대무신왕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모험이었고 또한 자신이 가진 왕권의 표출이었다. 단순히 부패한 탐관오리를 내쫓고의 의미가 아니다. 비류부는 고구려 5부의 하나. 고구려 건국에 일조한 토착 세력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이었다. 그런 비류부의 수장격인 비류부장들을 왕명만으로 내쫓고, 그 자리에 왕이 명하는 새 사람을 앉혀놨다는 것은 그만큼 고구려의 왕권이 초창기에 비해 많이 강력해졌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왕이 자기 마음대로 관리를 갈아치우는데 그게 어떻게 연맹국가의 약한 왕권에서 나올 힘인가? 엄연한 중앙집권국가지)

 

[○素旣上任, 別作大室以處, 以仇都等罪人, 不令升堂. 仇都等詣前, 告曰 “吾小人, 故犯王法, 不勝愧悔. 願公赦過, 以令自新, 則死無恨矣.”素引上之, 共坐曰 “人不能無過. 過而能改, 則善莫大焉.” 乃與之爲友. 仇都等感愧, 不復爲惡. 王聞之曰 “素不用威嚴, 能以智懲惡, 可謂能矣.” 賜姓曰大室氏.]

발소는 부임해서 따로 큰 집[大室]을 짓고 살았는데, 구도 등이 죄인이었기에 당(堂)에 오르지 못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나와 고하였다.

“저희들은 소인이어서 왕법을 범하여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공께서 잘못을 용서하시고, 개과천선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발소는 그들을 이끌어 올려 같이 앉아

“사람이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잘못하여도 고칠 수 있으면 선(善)이 매우 큰 것입니다.”

고 말하고, 그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구도 등이 감격하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발소가 위엄을 쓰지 않고 지혜로써 악을 징계하니,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하고는 성(姓)을 주어 대실씨(大室氏)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추발소. 고구려 대무신왕 때 남부사자로서 비류부장을 역임했던 남자. <바람의 나라> 후반부에서 호동왕자의 보좌로서 꽤나 비중있는 역할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정작 《삼국사》같은 역사 기록에서 보이는 건 꼴랑 이때 이게 전부다. 기록만 갖고 보자면 이 추발소라는 사람은 무척 사람이 좋았던 모양이다. 왕이 직접 내쫓아버린 신하들, 그것도 조정과 비류부의 위신에 먹칠만 하던 것들에게"사람이 잘못할수도 있지요"하면서 관용을 베풀어 개과천선시키고, 이것이 왕의 마음에 들어서 성씨까지 부여받아(그 무렵에 성씨를 받는다는 것은 왕의 측근이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했다는) 원래 추(鄒)씨였는데 이때 대무신왕으로부터 새로운 성씨를 하사받아 대실(大室)씨라 바꾸고 대실발소(이름한번 참 뭐같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대실씨는 조선조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57권 양엽기에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의 이상한 성씨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하긴, 고구려 초년의 극씨니 중실씨니 부정씨니 하는 그 이상한 성씨가 지금까지 내려오는게 있으면 우리가 지금 왜 서로 조선시대 족보나 붙잡고 우리는 조선시대 고려시대 무슨 무슨 파 누구누구의 후손이었는데 어쩌고 하면서 조상싸움이나 하고 있겠나? "우리 할아버지는 고구려 귀족이셨어!" 그걸로 게임오버인데. (여담이지만 내가 고등학교 있을때 내 친구 중에서 강씨가 둘 있었는데 진주 강씨라서 볼때마다 어이 고구려 양반 이러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뭐 그런 이야기다.

 


<바람의 나라 中 추발소, 그리고 호동왕자>

 

아참참. 한가지 더. 고구려 초기의 5부에 대한 것인데, 안정복 영감은 이때에 고구려에서 5부를 처음으로 나누었다고 적어놨다.《통전》과 《신당서》를 참조한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 이전인 대무신왕 5년(AD. 22)에 이미 부여왕의 종제 낙씨를 연나부에 두었다고 했으니, 5부라는 것은 이미 고구려 초기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계루부(桂婁部)인데 내부(內部) 혹은 황부(黃部)로서 곧 비류부(沸流部)가 되고, 

둘째는 절노부(絶奴部)로 북부(北部) 혹은 후부(後部)로 개편되었으며,

셋째는 순노부(順奴部)로 동부(東部) 혹은 좌부(左部),

넷째는 관노부(灌奴部)로 남부(南部) 혹은 전부(前部)로 곧 관나부(貫那部)이고,

다섯째는 소노부(消奴部)로 서부(西部) 혹은 우부(右部)라 칭하였으며,

 

각각 대신을 뽑아서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ㅡ고. 그렇다면 추발소가 보임된 비류부장이라는 직책은 계루부장이면서 내부장, 혹은 황부장이 되겠다. 고구려의 중심이었고 중추였으니까, 꽤나 막중한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도 패거리들이 괜히 그렇게 싸가지없게 군 게 아니라, 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거지.(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시길. 어디까지나 안정복 영감의 주장이니까)

 

여담이지만 단재 선생의 《조선사연구초》에 보면 단재가 북경 순치문의 석등암에 살다가 만난 어느 동몽골 승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키며 몽골말로는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동쪽은 준라, 서쪽는 열라, 남쪽은 우진라, 북쪽은 회챠다.”라고 대답한 것을 듣고 경기(驚起), 즉 크게 놀랐다고 한다. 동몽골 승려가 말한 그 단어들은 고구려의 순나(順那), 연나(涓那), 관나(灌那), 절나(絶那) 등의 동서남북 4부와 그 발음이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동쪽은 '새', 서쪽은 '한', 남쪽은 '마', 북쪽은 '높'이라고 부른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기묘한 한자단어들이 모두 고대 우리말의 음을 따라 적은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셨다나.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遂同歸以女妻之.]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다.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느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낙랑(樂浪). 이 시기 낙랑은 두 개가 존재했다. 하나는 대륙 곧 요동에 있던 낙랑군으로 옛날 한 무제가 두었다는 한사군의 잔존.그리고 하나는 지금의 평안도 일대에 존재했던 최씨낙랑. 곧 낙랑국이다. 안정복 영감이야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이 그 세력이 왕과 같았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그를 왕이라 부른 것이라고 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낙랑군 말고도 낙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독립국, 낙랑국이 존재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거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추세인듯 하다.(단재 선생도 그렇게 주장을 하셨고)

 

그 당시 낙랑국은 신라나 백제와 국경을 접하고서 자주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등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언제나 그런 낙랑을 치려고 별렀다. 그러나 낙랑은 손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낙랑의 국왕이 옥저로 놀러온 호동왕자를 발견하고 그를 자신의 사위로 맞이했다. 그것은 아마 정략결혼 비슷하게 고구려를 얽어매서, 고구려가 방심하는 틈에 쳐서 멸망시키고 복속시킬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북국신왕'으로까지 불리며 주변의 소국과 부족을 무력으로 쳐서 복속시켜나가던 대무신왕의 정복군주로서의 위용은 이미 낙랑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그러한 고구려의 팽창을 낙랑은 무척 경계하고 있었다.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호동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 아름다워 왕이 심히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얼굴이 아름다워 이름을 호동이라 지었다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훈남'이라고 할까나? 왕의 후궁은 갈사왕(曷思王)의 손녀. 갈사왕은 부여국왕의 막내동생이다. 예전에 소개한대로, 대무신왕이 부여국을 치고 대소왕이 전사하는 와중에, 대소왕의 막내동생이 그것을 무서워해서 해두국으로 도망쳐 나라를 세워 이름을 갈사수라는 강가에 세운 갈사국이란 나라를 세웠다. 그의 손녀가 바로 대무신왕의 후궁으로 호동왕자의 어머니다.

 


<연은 바람의 나라에서 게임도우미로 등장하기도 했다는.>

 

그냥 갈사국왕의 손녀라고만 기록되어있는 이 대무신왕의 차비에 대해서, 언제 죽었다던지 하는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김진 작가는 《삼국사》에 딱 한줄 언급된 이 기록에 또다시 상상력을 부여해 '연'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연은 어린 나이에 무휼에게 시집을 와서 호동을 낳았고, 호동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는다는 설정이며, 차후 바람의 나라 전개과정 내내 무휼의 내적 갈등을 자아내게 만드는 키워드로 등장한다.(기실 실제 역사에서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 호동이 자결할 당시에 살아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호동이 차비 즉 후궁의 소생이었다는 것은, 궁중 내에서 호동에게 있어선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들여다봐도, 첩실 후궁의 소생이 정실왕비의 소생에게 재주로나 외모로나 월등히 뛰어나더라도, 일단 첩실의 소생인 이상 정통성과 명분에 있어선 정실 소생에게 밀리는 것이 당대의 세상 이치였고, 불과 백년 전까지도 그러했다. 같은 왕자라도 다 같은 왕자가 아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고대 사회에서, 정실 소생에게 무슨 하자가 있지 않는 한 후궁의 소생으로서 한 나라의 국왕이 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다. 홍길동이 그랬지 않은가. 홍길동에 비하면 좀더 호동이 마음이 약했던 것이 둘의 운명을 가른 차이이긴 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아래의 내용을 더 읽어보면 안다.

 

[後好童還國, 潛遣人告崔氏女曰“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則自鳴, 故令破之.]

나중에 호동은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의 딸에게 말하였다.

“만약 너의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다. 때문에 그것을 부수도록 한 것이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적이 쳐들어오면 스스로 울어서 그것을 알렸다는 낙랑의 신보 자명고. 바람의 나라 17권中>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고구려가 낙랑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은 그 나라에 있는 기이한 보물 때문이었다. 이른바 '자명고(自鳴鼓)'라 불리는 이것은, 적군이 침략할 때에는 누가 울리지 않아도 스스로 소리를 내어 적의 침공을 미리 알렸다는 신비로운 물건이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고구려는 여태 낙랑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라는 설정이 되겠다.(무슨 판타지도 아니고...) 호동왕자는 이것을 알고서, 귀국한 뒤 자신과 혼인한 낙랑의 공주에게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다.

 

중국 연변의 연변대학교 조선문학연구소에서 조선족들 사이에 전승되는 민간설화를 모은 《민간설화자료집》 3권에 '자명고'라는 제목으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거기서는 처음부터 낙랑의 자명고를 부술 작정을 하고 일부러 낙랑에 들어간 것이라 했다. 그리고 낙랑에 가서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왕자호동은 백마를 타고 궁전을 나섰다. 왕자호동은 고구려와 악랑(낙랑)의 번계에 이른후 날마다 말타기를 했다. 몇 달동안 질풍같이 백마를 달려 말타기를 하니 악랑사람들도 너남없이 그를 알고 그를 '백마소년'이라고 불렀다. 이때 악랑태수 최리의 딸은 백마소년이 말 잘 타고 인물이 절색이라는 말을 듣고 백마소년을 보려고 궁중루락에까지 올라갔다. 악랑공주가 백마소년을 보니 선관(仙官)이 천마를 타고 지상에 내린듯하였다. 그리하여 악랑공주는 매일과 같이 누각에 올라가 백마소년을 바라보았다.

연세국학총서73, 민간설화자료집(3), 자명고

 

낙랑왕 최리를 만나는 이야기도, 그를 만나러 나왔다가 자칫 위기에 빠진 낙랑왕을 호동이 구해주었다고 전승에서 말하고 있다.

 

하루는 악랑태수 최리도 백마소년의 소문을 듣고 소년도 볼겸 들놀이도 할겸 산으로 나갔다. 헌데 최리가 탄 말이 갑자기 네굽을 안고 뛰는데 말발굽에서 불꽃이 이는것만 보이고 말과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태수 최리의 생사가 경각에 이르렀건만 악랑사람은 누구도 최리가 탄 말을 멈춰세우지 못하였다. 이것이 백마소년에게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였다. 백마소년은 백마를 잡아타고 나는 듯이 달려가서 놀란 말을 잡아세우고 악랑태수 최리를 구원하였다. 

연세국학총서73, 민간설화자료집(3), 자명고

 

뭐 민간전설이니 곧이 곧대로 믿을수는 없겠지만 당시의 사실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 <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서, 북의 면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찢고서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게 하였다. 최리는 고각(鼓角)이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않다가, 우리 군사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뒤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는 나와서 항복하였다.<다른 기록에는 『낙랑을 멸하고자 혼인을 청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은 뒤, 본국으로 돌아가 무기[兵物]를 부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바람의 나라 中에서 낙랑공주 사비> 

 

다들 흔히 낙랑공주 낙랑공주 그러시다보니 낙랑공주의 '낙랑'이 이름인줄 아시는데, 사실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도, 호동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처럼 기록된 것이 없다. 나라 이름으로 자기 공주 이름을 지었을 리도 없고, 그냥 '낙랑의 공주'라는 말을 줄여서 낙랑공주 낙랑공주 이렇게 부르다보니, 언젠가부터 낙랑공주라는 말이 굳어져서, '낙랑'이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린 것인데(바람의 나라에서는 낙랑공주에게 '사비'라는 이름을 붙여놨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낙랑공주의 진짜 이름은 '낙랑'이 아니고 '아무도 모른다'라고. (설마 '아무도 모른다'는 이걸 또 이름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 싶지만) 그런데 난 왜 낙랑공주라고 부르냐고? 그거야 간단하지. 나도 '낙랑공주' 이렇게 부르는 이게 더 익숙하거든.

 

나라를 선택할 것인지 사랑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것은, 웬만한 연애소설에서 다루는 시시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라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다 안봐도 비디오다. 그리고 만인의 예측대로 그녀는 사랑을 택하고, 자신의 나라를 지켜주는 호국의 보물을 스스로 부숴버린다. 호동왕자가 그녀를 사랑했든 아니든, 그녀가 호동왕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나라가 망할줄을 뻔히 알면서 나라를 지켜주는 보물을 부수라는 호동의 명을 들었을 리가 없지.(《손자병법》 용간편에는 간첩을 활용하는 방법을 다섯 가지 논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인 '내간內間'은 적국의 고위 관리를 포섭해서 첩자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여기서는 낙랑공주가 고구려의 '내간' 역할을 한 셈이다)

 

결과는 비참했다. 낙랑공주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다. 나라를 지켜주는 보물만 믿고 있었을 것인데, 그것이 망가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가 막히고 황당했을까?(좀 비정하다만 나라도 아마 그 상황에선 딸을 죽였을거다.)그런데 요령 지역의 조선족 전승에서는, 공주와 친해진 호동이 그녀에게 낙랑의 보물인 자명고를 몰래 보고 싶다고 말했고, 마지 못해 공주가 그를 데리고 자명고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공주가 아닌 호동이 자명고를 보는척하면서 찢은 뒤,공주에게 자신이 고구려로 돌아가서 혼례를 청하겠다고 말하고 오겠다고 하며 고구려로 돌아갔고, 자명고가 부서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대무신왕은 군사를 내어 낙랑을 쳤으며, 호동은 이때 공주가 잘못될까봐 가장 먼저 앞장서서 질풍같이 내달았다고.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공주는 이미 아버지 최리의 칼에 죽은 뒤였고, 백마소년, 즉 호동왕자는 공주의 시신을 끌어안고 "님 죽고 내 살아서 무엇하냐"하며 통곡하고서 그 시신을 싣고 고구려로 돌아와 고구려땅에 시신을 묻어주었다고 한다. 전승이 기록과 다른 점은 자명고를 찢은 것이 공주가 아니라 호동이라고 나오며, 호동왕자는 원래 처음부터 낙랑의 자명고에 접근해서 자신의 손으로 자명고를 찢은 뒤 낙랑을 급습해서 항복을 받고 공주를 구해서 정말 혼인할 생각이었지만,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보고 분노한 최리는 공주를 불러 묻는데 공주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기 딸에게 형벌에 고문까지 해가면서 끝내 호동이 그랬다고 하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리고 분노한 최리왕은 서 발이나 되는 긴 칼로 자신의 딸을 내리찍어 두토막을 내서 죽였다ㅡ

라고, 전승은 말하고 있다.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은 자살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호동의 운명 역시 비참했다.

 

[元妃恐奪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첫째 왕비는 계승권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고 참언하였다. 왕은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오?”

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소서.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

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죄를 물으려 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이거 무슨 삼류 AV도 아니고 뭐 그딴 더티한 이야기로 사람을... 할수도 있겠는데 고구려 초기 풍속을 생각하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고구려의 풍속이 흉노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선우가 죽으면 그 아들이 대를 잇되, 아버지의 첩을 자신의 비로 맞이하는 것. 그것이 흉노족의 혼인 풍속이며 전통. 고구려도 예외는 아니다. 어차피 피도 안 섞인 사이인데 뭐. 호동이 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아버지의 부인을 자기 부인으로 삼는대도, 자기 친어머니가 아닌 이상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거다. 여기까지 얘기해도 여전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정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5백년간 유교윤리 속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따져보면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직접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그 당사자들이야 로맨스고 낭만이고 외치겠지만 보는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그러니까 그냥 닥치고 보자.(죄송합니다!!!) 그러게 고대사는 유교적인 시각으로 보면 진짜 이상하게 보인다. 유교적인 시각을 걷어치우고 봐야지 안 그러면 곡해하기 쉽다. 옛날 족보는 이렇게 다 개같은 족보였나 하고.

 

[或謂好童曰“子何不自釋乎?” 答曰“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당신은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소?”

하고 물으니,

“내가 만약 변명을 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다. 어떻게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호동은 자신이 믿는 방법으로 효를 행했다. 아무리 친어머니가 아니라고 해도 아버지의 아내인 이상 자신의 어머니인데, 자신이 진실을 말하게 되면 그 어머니가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날 것이고, 아버지인 왕이 그것을 알고 슬퍼할 것인데, 자신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어머니가 죄를 받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게 된다며, 호동왕자는 스스로 자살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고서 칼을 거꾸로 세워서 그 날 위에 엎어져 자결한다. 그러나 그의 효는 곧 불효가 되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그의 아버지 대무신왕을 그저 헐뜯는 말만 믿고 죄없는 아들을 죽게한 비정한 아버지로 만들었던 것.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其不仁不足道矣, 而好童不得無罪. 何則, 子之見責於其父也, 宜若舜之於瞽瞍, 小杖則受, 大杖則走, 期不陷父於不義, 好童不知出於此, 而死非其所, 可謂執於小謹而昧於大義. 其公子申生之譬耶?]

논하노니, 지금 왕이 헐뜯는 말만 믿고 사랑하는 아들을 죄없이 죽였으니 그가 어질지 못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호동도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한테 혼날 때는, 마땅히 순(舜)이 고수(瞽瞍)에게 하듯이 해서 회초리면 맞고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했어야지, 호동은 이걸 모르고 마땅하지 않은 데서 죽었으니, 사소한 것을 조심하는 데만 집착해서 대의에 어두웠다고 할 수 있다. 공자(公子) 신생(申生)에게나 비유할까?

 

순(舜)이란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의 이름이다. 흔히 요순시대라고 하면 태평성대를 가리키는데, 요임금으로부터 나라를 선양받아 나라를 잘 다스린 성군이었던 그는 또한 효자로서도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수라는 사람으로 장님이었고, 어머니를 일찍 잃고 새어머니를 맞았다. 속이 좁고 악랄한 새어머니와, 그 소생의 동생은 걸핏하면 순을 못살게 굴고 학대했으며, 못난 아버지 역시 새어머니 말만 믿고 툭하면 순을 때렸다. 이때 순의 대처법이란 것이, 아버지가 우선 회초리로 때리면 그냥 군말없이 맞았지만, 아버지가 굵직한 몽둥이로 때리려고 하면 꼭 멀리 도망쳐서 그 매를 맞지 않았다. 이를 두고 공자는, 자칫 굵직한 몽둥이에 맞고 자신이 어디 몸이 다치거나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아버지가 그것을 깊이 후회하고 슬퍼할까봐 어린 마음에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부모에게 받은 몸을 다치지 않게 잘 간수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라고 말씀하셨다.(사실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면 자기가 때린 매에 아들이 다치거나 죽는다고 해서, 이 아버지라는 작자가 후회하거나 슬퍼했을 것 같진 않지만)

 

어떻게 보면 참 슬픈 운명의 고리다. 유리왕은 황룡국 왕의 선물인 활을 꺾은 해명을 죽게 만들었고, 그 아들 대무신왕은 왕비의 헐뜯는 말을 듣고 자신의 아들 호동을 죽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자식간의 고리가 이토록 핏빛으로 얼룩지다니, 권력이라는 것을 다루는 저 상층은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공을 세우고도 권력싸움에 밀려 죽은 사람은 그 한 명이 아니지만,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권력의 생리라는 것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 말해주는 것으로 오로지 상층부, 그것도 왕좌 앞에서만 벌어지는 개싸움이다. 대무신왕의 선대에서는 유리왕이 해명에게 그랬고, 지금 호동이 그렇게 되었으며, 저 유명한 사도세자도 총명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죽었다. 그리고 이 일은 두고두고 후세 사람들의 비판거리가 되었다. 호동이 딴에는 효를 위해서 택한 자결이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비정한 냉혈한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어쩌면 호동의 저 대답은 표면적인 이유였을 수도 있다. 낭만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가 죽었는데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가뜩이나 죽고 싶은 판국에 저런 얘기까지 나오니 '차라리 죽지 뭐'하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그래도 다행이다. 호동은 자신의 죽음을 웃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겠는가. 이 자신의 입을 스스로 막음으로서 (양)어머니의 악행을 덮고 나아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그리고 저승에서는 자신을 반겨줄 아내를 만날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칼을 가슴에 꽂고 죽음 직전에 옅게 미소지었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거다.

 

눈 내리는 어느날이였다. 왕자호동은 궁전을 나와 공주무덤에 이르렀다. 왕자호동은 무덤우에 덮인 눈을 헤치고

"살아도 죽어도 너와 같이 있자."

면서 무덤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하였다. 펑펑 쏟아지는 백설은 무덤을 끌어안고 우는 왕자호동의 몸에 내려쌓이며 그를 묻어버렸다.

왕자호동이는 쌓이고 쌓인 눈을 털지도 않고 울다가

"나는 이제야 그대와 한집에서 살게 되였구나."

하고는 흰눈을 덮어쓴채 영영 세상을 하직하고말았다.

연세국학총서73, 민간설화자료집(3), 자명고

 

그렇게 그 이야기는 어느 이름 모를 《고기》의 기록속에 담겨 훗날 김부식 영감이 《삼국사》를 지을때 대무신왕의 낙랑국 정벌기사 속에 담긴 짤막한 사화로 남게 되었고, 조선족들 사이에서도 민간전승으로 남았다. 거기서는 호동왕자가 자결하지 않고 시름시름 앓아 몸이 약해져서 추운 겨울 어느날 공주의 무덤을 끌어안고 죽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조선족들은 대부분 17세기부터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란 점을 감안하고 보면 아마 그때까지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서북 지역의 조선인들에게도 전승될 정도로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였던가보다.

 

이러한 류의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면, 어느 한 구석은 원전과 바뀌게 되기 마련이다. 《삼국사》와 조선족 전승을 비교해봐도 그것을 알수 있다. 물론 어떤 문헌을 참조한 《삼국사》가, 언뜻 보기에는 사실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 슬프고도 비극적이었던 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삶을 동정했을 것이고, 나아가 낙랑국 정벌에서 전공을 세우고도 결국 자결로 인생을 마감한 왕자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로 깊이 동정했을 것이다.

 

둘다 허무하고도 비극적으로 서로의 짧은 삶을 마감했지만, 전승 속에서 그들의 삶은 깊은 여운을 남기면서 메아리가 되어 우리 머릿속을 울리고서, 다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그 역사를 만든 왕자 호동과 낙랑의 공주, 둘 모두 인간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 것도 모두 그들과 마찬가지로 슬프고 애달프기만 한 이 현실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밝게 보려는 '인간'이었다.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太子. 遣使入漢朝貢, 光虎帝復其王號. 是立武八年也.]

12월에 왕자 해우(解憂)를 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한(漢)에 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建武) 8년이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AD. 32)

 

《삼국사》에는 사신을 한에 보낸 것이 대무신왕 15년이라고 기록했지만, 《해동역사》는 이보다 앞선 대무신왕 14년에 이미 고구려에서는 한에 사신을 보낸 적이 있다고 《후한서》를 인용해서 적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상국(上國)에 조빙(朝聘)한 것은 이것이 시초이다."라는 설명을 부기했다. 이 시기를 즈음해서, 중원에서는 변화가 일어났다. 서한(西漢) 곧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웠던 왕망이 16년만에 쫓겨나고, 전한의 왕족으로서 고조 유방의 9세손이었던 유수()가 새로이 황제가 되어 신을 무너뜨리고 한을 부활시킨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한(東漢) 곧 후한이며, 《삼국지》의 처음 시작 배경이 되는 나라이다. 대무신왕이 사신을 파견한 것은 건무 7년과 8년, 간지로는 태세 신묘와 임술에 해당한다.

 


<광무제 유수, 후한의 초대 황제로 왕망이 멋대로 고친 고구려왕의 왕호를 다시 복구시켰다.>

 

이른바 광무중흥(光武中興)이라 불리는 역사적인 대사건은, 호동왕자가 죽기 7년 전, 그러니까 을두지가 우보가 되어 군무와 국정을 맡던 때인 대무신왕 8년(AD. 25)에 있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대무신왕은 한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청했고(사실 당시 중원의 통일왕조였던 한과 사이가 좋다고 이득이 생기는건 아니었지만 사이가 나빠서 이득보는 것도 없다. 수나 당과 사이가 소원했던 고구려가 어떤 꼴을 맞았던가?), 광무제는 이때 고구려의 왕호를 다시 회복시켜준다. 옛날에 신의 왕망이 우리 장수 연비의 목 받고 구려후 추가 죽은줄 알고 기뻐서는 하구려후랍시고 발음도 뭐같은 뉘앙스가 좔좔 풍기는 이상한 이름 붙여놨던 것을 다시 고구려'왕'이라는 점잖은 칭호로 되돌려준 것이다.

 

저들이 무슨 지네들 속국 대하듯이 주절주절대면서 거만떠는 것이 꼴사납긴 해도, 어쨌거나 저들과 더 싸울 필요는 없지. 하지만 저들이 대국 운운하면서 침공해오면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저들과 맞서 싸운다. 그것이 오랜 옛날부터 지속되어온 우리와 중국의 관계였다. 신라가 자기들 연호를 버리고 의복을 버리면서까지 당에 사대하면서도, 막상 신라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하면 그대로 일어나서 맞서 싸웠다. 고려가 거란에 사신을 보내서 속국 운운하면서도 군사적인 침공에는 반드시 대응하여 맞서 싸웠던 것이나, 조선조 초에 정도전이 명과의 사이가 소원해지자 곧바로 태조에게 요동 공격을 진언했던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사실 조공-책봉 시스템이란게, 형식상의 주종관계와는 전혀 다른 딴판의 관계가 펼쳐진 경우는 숱했다. 더구나 군사력이 곧 나라의 힘이고 그러한 힘을 가진 쪽이 실세이던 고대 시대ㅡ 한(漢)만 하더라도 흉노를 자기네들에게 조공 바치는 변방의 오랑캐쯤으로 여겼지만 정작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한이 그들의 왕녀를 흉노 추장에게 시집보내가면서까지 평화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양자간 힘의 차이는 누가 봐도 뚜렷하게 흉노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 있었으며, 중국 역사상 태평성대라 불리는 당 태종의 시대마저도 그 이면을 뒤집어보면 서쪽의 토번(티베트) 왕 송쩬감포(松贊干布)에게 왕족의 딸을 황제의 영애 문성공주라 속여서 시집보내면서까지 평화를 구걸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거란과 여진, 서하, 몽골 같은 이민족의 침입 앞에서 해마다 막대한 세폐를 바쳐야 했던 송(宋) 시대는 말할 것도 없다.

 

솔직히 저들이 우리보고 오랑캐라 부르든 속국이라고 부르든, 그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고구려나 티벳이 결코 중국의 역사가 될수 없다는 것도. 일단 저들이 우리를 뭐라고 부르든 그래 우리만 아니면 그만이고 무시하면 그만인데,왜 무시 안하고 대응하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짜증나니까.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20년(AD. 37) 왕은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그리고 마침내 대무신왕 20년(AD. 37), 그는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킨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을 잃고서 그 행복을 얼마나 누렸을까. 그도 보았다면 알았을텐데. 형이 아버지 손에 죽는 것을 보았다면 아버지의 길을 걷지는 않으리라고 말이다. 내가 들으니 고대에는 가족끼리 한 집에 모여사는 일은 없었다고 하니, 지금과 같은 가족의 정은 기대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옛날의 권력자는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대우했는가에 따라, 그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도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기록을 읽고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나라를 버린 낙랑공주나,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닌 계모에게도 효도를 다하겠다고 죽은 호동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눈으로서도 무척 슬프기만 하다. 왜 사마천도 그러지 않았던가. "역사란 과연 의로운 것인가[天道是非]?"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정이라 하니, 그 중에서도 질기고 질겨서 끊을 수 없는 것이 혈육의 정, 그리고 남녀간의 운우의 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조차 고구려에서는 무색하였으니,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그 아들은 또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들었으며, 그 속에서는 남녀간의 사랑마저도 무참히 짓밟혀 가루가 되어버렸으니, 천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세상사라는 것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二十四年, 春三月, 京都雨雹. 秋七月, 隕霜殺穀. 八月, 梅花發.]

24년(AD. 41) 봄 3월에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매화가 피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매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8월에 피었을까.

 

[建虎十八年, 伐伊西國滅之, 是年高麗兵來侵.]

건무[建虎] 18년(AD.42)에 이서국을 쳐서 멸하였다. 이 해에 고려병이 와서 침범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1, 제3대 노례왕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이야기인데, 대무신왕이 정말 신라에까지 군사를 보냈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에 이렇게 나오는게 있길래 실어봤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27년(AD. 44) 가을 9월에 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해서,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다. 살수(薩水) 이남이 한에 속하게 되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이 무렵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어 낙랑을 다시 빼앗아 한의 영지로 소속시킨다. 호동왕자가 자신의 아내를 죽여가면서까지, 대무신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빼앗은 그 땅을 다시 빼앗겼다. 물론 광무제 시기에 아직 내부 통합도 제대로 되지 않고 불안정하던 그 무렵에 군대를 바다 건너까지 보내어 땅을 차지할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이긴 하다만. 어쩌면 고구려에게 나라를 빼앗긴 낙랑국왕 최리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후한과 내통해서 후한의 군대를 낙랑의 땅에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있겠다.(단재 선생의 주장이다)

 


<평양 정백구역의 낙랑고분인 석암리 7호분에서 발굴된 금제대구. 낙랑에서 발견되는 중국계 유물은 대개 1세기 이후의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수포로 돌아간 옛 조선의 고토 수복. 대무신왕 생전에는 이 땅을 다시 되찾지 못했다. 낙랑이 한에 빼앗긴지 1달 뒤, 겨울 10월 대무신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 號爲大武神王.]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27년(AD. 44)

 

낙랑을 다시 후한에 빼앗긴 그 해 겨울 10월 눈발 날리는 계절. 왕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40세. 재위 27년. 장지(葬地)는 대수촌원이다. 후한에 빼앗긴 낙랑국의 땅도 되찾지 못하고, 자신이 죽인 아들에 대한 한만 남긴채. 전쟁과 복속으로 점철되었던 파란만장한 인생을 비로소 마감했다. 이후 미천왕 때에 이르러서야, 낙랑이라는 세력은 완전히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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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잡담이지만, 고구려의 초기 왕실역사는 그야말로, 부자간의 골육상쟁, 아들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믿지 못하는 그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그런 콩가루같은 이면을 뒤에 감추고 있었다. (<바람의 나라>에서도 이러한 점이 묘사되고 있긴 하다.) 멀리 고구려 초기부터 말하자면, 동명왕과 유리왕의 사이도 그러했고, 유리왕과 해명의 사이도 그러했고, 대무신왕과 호동의 사이 역시 그러하다. 예전에도 말한바 있지만, 왕은 고대 사회에서 신을 대신하는 존재.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자로서, 보통의 인간과는 모든 것에서 달라야한다. 옷을 입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입으로 내뱉기까지 그 과정이 인간의 것을 뛰어넘어야 하고, 누구보다도 감정에 치우친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왕으로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곧 자신의 신성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단지 왕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왕은 곧 신이니까.

 

신에게 신의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감정'이 있다면, 그런 신을 과연 성스럽다, 엄숙하다, 그렇게 느끼고 두려움에 경배할 사람이 있을까? 신이 두렵다고 하는 것은, 신이 전지전능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느끼는 그것과 같은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어야만 죄에 빠진 세상에 불비와 유황을 퍼부을수 있고, 억수같은 비를 내려 40일 동안 코로 숨쉬는 모든 것을 없앨수 있지. 올림포스 산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하늘을 지배했던 12신들을, 6일에 걸쳐 이 세상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주(主) 여호와와 비교할수 있는가?누가 올림포스 신들의 노여움과 주 여호와의 노여움을 두고 저울질할수 있을까? 우리 마음속 본연에서 그 거룩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머리를 숙인다면 그것은 아마 여호와가 가진 그 찬란하고 성스러우며 위엄있는 빛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런 신이 선택한 왕이기에, 신을 닮아 여타의 감정이 없어야만 한다. 스스로 신이라 생각하고픈 인간에게 감정이란 무척 불필요한 요소이니까. 왕에게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의 법을 따르거나 어긴자에 대해서밖엔, 달리 쓸 곳이 없다. 왕은 대의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또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줄도 알아야 한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아들일지라도.  

 

대무신왕은 그런 신과 같은 위업을 이루어낸 왕이었다. 북쪽으로는 위협적인 존재였던 부여를 치고 남쪽으로는 개마국과 구다국, 낙랑을 치며, 안으로는 내정을 정비하고 한의 침공을 격퇴한 자. 대무신(大武神)의 존호에는 그런 왕의 위대한 업적과 왕의 능력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러한 업적과 함께, 천년이 가도 2천년이 가도 잊혀지지 않을 한스러움을 함께 품에 안고 살아가야 했던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어떤 영웅적인 과업을 이루어낸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따지고 본다면 결국은 인간이다. 하늘로부터 명을 받기 전에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자들이다. 인간과 다른 데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신도 아니니까. 신이 아닌 이상 결국 어딘가 부족할수밖에 없는 거다. 불룩한 자루의 한 모퉁이 터진 구멍에서 밤송이가 흘러나오듯,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들의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소리소문도 없이 동이에서 새어나와 바닥을 적시는 물처럼 소문이 되어 떠돌다가 언젠가부터 실제의 이야기처럼 굳어져버리는. 그것을 사람들은 야사(野史)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야사 속에는 우리가 정사(正史) 속에선 미처 짐작도 못했던,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는 어딘가 사뭇 다른 모습들이 있다. 사람들은 야사 속에서 그들이 본 왕의 모습, 자신들과 닮은 인간의 면모를 왕에게서 찾아내고서, 그런 이야기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설이나 민담, 신화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전했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이야말로, 우리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올수 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 상상해보았고, 한번쯤은 다 겪어봤을 그런 이야기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는 이야기들. 야사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전해지며 기억된다. 나는 그런 야사를 주워모아서 사람들 속에서 노래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하는 자다.

 

대무신왕에 대한 선대 사람들의 평에 대해서는 이미 대무신왕편을 처음 시작하면서 말했었고, 지금의 내가 내리고 싶은 평가는 여기 아래에, 1993년 김진 작가께서 <바람의 나라>에서 무휼에 대해 자평하셨던 말을 부기함로서 대신하고자 한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신라 1000여년의 영광을 위해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축소 왜곡했다고 신채호 선생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그 왜곡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대무신왕'편인데, 그의 기록이 몹시 축소되었다는 것은 역사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느낄 정도이다. 일단 나이대가 형편없이 맞지 않고, 《삼국유사》와 《사기》가 서로 다른 부분까지 있는 것이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왕이나 신왕이라는 건, 어지간한 왕의 앞에 붙는 찬사도 아닐진대, 대무신왕이라 이름 붙여질 정도의 왕에 대한 기록이 이 정도일 리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고, 사실 신채호 선생님이 말한 한(漢)과의 9년 간의 전쟁을 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는 것이 이 작품의 기본 요지이다.

 

호동과 낙랑과의 관계는 사실 그의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고 그의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인간이나 사람에 대한 어떤 계산된 속성을 표현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나의 주제는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생을 지배하게 될 필연적인 양심과 진실의 눈물에 있다. 화려한 치장,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는 긴 인생 중에 한 번 입어보는 의상에 불과할 뿐 생의 전부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목표란 늘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에도... 그러므로 나는 그가 늘 울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의 눈물은 역사에도 씌어 있다. 난 아버지로서 결국은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걸었던 그를, 그가 흘렸던 눈물과 함께 몹시도 오래 생각했었다. 그는 강하고 매력적이었지만 결코 행복할 수는 없었다. 그의 의지는 그를 늘 불행하게 했었고, 그의 대왕과 신왕이라는 찬양의 이름뒤에는 서글픔이 인지되었다. 그래서 난 그를 왕이어서 불행한자로 사랑한다.

 

우리 역사의 잊혀진 부분 신화의 시대에 존재하였던 가장 뜨거우면서도 가장 냉정했던 왕... 그리고 그럼으로써 내가 몹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가 무휼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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