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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제3대 대무신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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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제3대 대무신왕(2) -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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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2>제3대 대무신왕(3) -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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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없는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였다. 서로 국경을 넘지 않는다는 맹세를 어겼다. 

국경을 넘어온 사람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우리 사신을 죽여 위협했다.

우리와 예허(葉赫) 부족 사이의 혼인을 방해하고 여자를 몽골에게 주었다.

우리가 경작한 토지의 수확을 인정하지 않고, 군사를 내어 쫓아 버렸다.

예허족을 믿고, 우리를 경시했다. 하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예허족을 도왔다....

 

1618년 후금의 건국자였던 건주여진의 아이신교로 누르하치가 명(明)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는 여진족이 명을 쳐야만 하는 명분으로 일곱 가지의 이유를 내세웠다.

훗날 역사에서 '칠대한(七大恨)'이라 불리게 된 이 일곱 가지 이유는

여진족이 명이라는 이민족과 싸워야만 하는 그들의 이유이고,

그들을 이끌던 수장 누르하치의 대명전쟁 명분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명에게 살해당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조상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유교적 대의를 표방한 셈이었다.

 

<후금의 건국조 누르하치. 명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그가 전쟁 명분으로 내세웠던 '칠대한'의 첫번째는 명군이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에 대한 복수였다.>

 

모든 전쟁엔 다 나름의 명분이 있다.

사람 목숨을 뺏는 일인데, 아무래도 뒤가 켕기니까,

대개는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고서,

이 전쟁이 그저 혼자서의 의지가 아니라 모두의 공론이기에 어쩔수 없다고.

전쟁을 일으키는 쪽은 보통 그렇게 그들을 정당화하곤 한다.

 

계획된 거짓말. 대의명분하에 일으킨 전쟁이란 것은 대개 그런 류들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대의와 명분을 앞세워 일어난 전쟁은 한둘이 아니다.

오히려 형식적이든 실제로든 그런 명분이 없는 전쟁을 잘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빠뜨릴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다 납득할수 있는 이유가 없다면, 적군은 고사하고 자기 아군마저도 설득시키기 힘들고,

전쟁은커녕 나라의 체제도 유지시키지 못할 것이다.

막대한 경비와 인력이 동원되는 전쟁을 겪기 싫어하는 것은 비단 적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과의 전쟁을 선포한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칠대한을 내세웠듯,

부여와의 전쟁을 선포한 고구려에도 그런 것은 있었으리라.

나라를 위해서, 국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는 어느 정도의 대의명분.

고구려 초기 국왕 3대 가운데서 가장 용병술이 뛰어났고

그런 까닭에 대무신(大武神)이라는 칭호를 얻은 그가,

그런 것도 없이 부여 정벌을 천명하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록은 없지만, 대무신왕 스스로가 내세운 어떤 대의명분,

고구려 안의 모든 역량과 공론을 하나로 모으기 충분한 만큼의 그것은 있었을 것이고,

그런 것에 우리측 아군들이 모두 동의하고 끌렸다고 한다면,

일단 전쟁을 일으킬수도 있고 또 전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적군이 그것에 동의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態.]

5년(AD. 22) 봄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다.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이미 앞서의 여러 이벤트(?)를 통해 사기가 충천한 고구려군이다.

부여의 남쪽까지 밀고 올라온 고구려군은 진흙이 많은 그 땅에서 진을 치고 부여군과 대치한다.

진흙이 많았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강 근처였던 것 같은데, 이 진흙이 고구려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

 

[扶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濘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 斬頭.]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은 이때 괴유에게 지시하였다.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만군이 무너져 지탱하지 못했다. 그대로 나아가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AD. 22) 봄 2월

 

그, 《손자병법》에 보니까, 행군할 때의 전술에 대해서 말해놓은 것이 있다.

눅눅한 수렁이나 늪지를 행군할 때에는 가능한 한 머뭇거리지 말고 재빨리 지나가라고.

만약 그런 늪지 지역에서 적과 싸우게 되면 근처 풀숲을 활용하든지 우거진 나무를 등지고,

그걸 장애물로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을 먼저 차지하라고.

그것이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수렁 및 늪지에서의 행군시 요령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행군시 마주치는 지형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걸 꼽아보자면

 

1) 앞뒤 험한 절벽으로 막히고 그 사이로 물이 가로질러 흐르는 지대

2) 사방이 높은 언덕으로 이루어지고 복판이 푹 꺼져서 계곡 물이 모여들어 낮은 습지로 이루어진 우물 모양의 지형(이게 뭔데?)

3) 세 방향만이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들어오기는 쉬워도 물러나기는 어려운 짐승 우리 모양의 지형(배산임수?!)

4) 수풀이나 가시덤불이 우거져서 그물처럼 감싸고 있는 지형

5) 지대가 매우 낮아서 비만 오면 쉽게 진흙탕을 이루어 빠지기 쉬운 함정 모양의 지형

6) 좁다란 계곡 사이에 난 긴 도로 모양의 지형

 

이 중에서 대소왕이 마주친 것은 다섯 번째,

지대가 매우 낮아서 비만 오면 쉽게 진흙탕을 이루는 함정같은 지형이었다.

이런 불리한 지형에 대해서 《손자병법》에서는 곧바로 피해가고

절대 가까이 가거나 거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지형을 벗어나 앞에서 바라보면서

적군을 그곳으로 유인해 거길 적군이 등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찌기 몸소 5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가,

폭설로 인간 동태만 무수히 만들고 돌아갔던 경험이 있는 대소왕이다. 

상대가 예전 학반령에서 부여군을 궤멸시킨 전력이 있는 대무신왕인 이상,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은 그도 짐작했으리라.

 

온나라에 총동원령을 내려서 고구려군과 맞서기 위해 내려온 대소왕.

그러나 황당하게도 그만 진흙탕에 빠져서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 빠진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고구려군에 참전한 장수 괴유가,

괴성을 질러 부여군을 놀라게 하고는 그대로 걸어가서 대소왕의 목을 벤다.

 

진흙수렁에 빠졌긴 했지만, 그래도 왕인데 그 옆에 호위하는 군사가 없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괴유라고 하는 사람의 검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에 대한 것은 상상에 맡기고,

사실 옆에 군사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들이 이 진흙늪에서 얼마나 맥을 추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일단 왕이 저꼴이 됐는데 다른 군사들이라고 별수 있었겠는가. 

키가 9척이나 되었으니 그런 진흙늪쯤이야 볼풀 걷는 것보다도 더 쉬웠을터.

그리고 그의 칼에 대소왕의 목이 떨어진다.

 

대소왕.

이 자는 어찌 보면 고구려의 원수이면서, 고구려의 성립에 한몫한 왕이기도 하다.

부여에 있었을 때부터, 피가 섞이지 않은 동명왕 주몽의 천재적인 활솜씨를 시기해서,

나무에 묶기도 하고 부왕에게 아뢰어 마구간에 밀어넣기도 하는 등, 항상 그를 죽이려 별렀던 자.

그를 피해서 동명왕이 졸본부여까지 도망쳐서 나라를 세우고, 한국사의 형성에 일조했으니까.

어찌보면 부여 안에서 이름없는 왕자로 늙어죽었을 주몽을 왕으로 만들어준 어둠의 인물.

금와왕의 뒤를 이어 소원하던 부여왕의 지위도 얻었고,

고구려가 계속해서 자신들 앞에 머리를 숙여준다면 하고 바랬으리라.

그러나 고구려는 그러지 않았다.

 

어찌 알았겠나. 자신이 이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줄.

인생이란 원래 그렇게 허무한 것이지.

왕이든 천민이든 죽어서 그런 진흙이 되는 게 세상의 이치이지.

그러나 뜻하지 않은 반격이 들어온다.

 

[扶餘人旣失其王, 氣力折, 而猶不自屈, 圍數重. 王以糧盡士饑, 憂懼不知所爲, 乃乞靈於天. 忽大霧, 咫尺不辨人物七日. 王令作草偶人, 執兵立營內外爲疑兵, 從間道潛軍夜出. 失骨句川神馬沸流源大鼎. 至利勿林, 兵飢不興. 得野獸以給食.]

부여 사람들이 왕을 잃고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해왔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쩔줄 모르다가 하늘을 향해 영험을 빌었다.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이레 동안이나 지척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샛길로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골구천의 신마와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자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했다. 들짐승을 잡아 먹을 것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AD. 22) 봄2월

 

너희 왕도 죽었는데 왜 계속 반격하는거야?

한참 전쟁하는데 그런 걸 물어볼수도 없었겠지.

원래 그런 것 때문에 독이 올라서 더 싸우는 수도 있으니까.

지금의 우리야 대소왕을 그저 성질 더럽고 난폭한 왕으로 기억하지만,

이때 부여군의 태도로 봐서는 부여 안에서 대소왕의 지위나 카리스마, 통치력이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적의 손에 목이 잘린 왕을 위해서,

후퇴하긴 커녕 더 악이 받쳐서 고구려군을 거의 포위해 피를 말려 죽이려고 달려들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포위된 고구려군을 구한 것은 때아닌 안개였다.

이레 동안이나 사방을 덮은 안개 덕분에 고구려군은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王旣至國, 乃會臣飮至曰 “孤以不德, 輕伐扶餘. 雖殺其王, 未滅其國, 而又多失我軍資. 此孤之過也.” 遂親吊死問疾, 以存慰百姓. 是以國人感王德義, 皆許殺身於國事矣.]

왕은 서울[國]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과인[孤]이 부덕하여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했다.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다. 이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국인(國人)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저마다가 모두 나랏일에 목숨을 바치길 바랬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AD. 22) 봄2월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건 아마, 대무신왕의 부여 정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정말이지 부여왕을 죽였다는 엄청난 사고에 비하자면, 이때의 고구려로서는 그닥 남은게 없는 장사였다.

그래 고작 적의 왕 하나 죽이자고 그렇게 거창하게 신비한 말에 솥에

금인에 병기같은 별의별 이벤트를 일으키며 갔던 건 아니지 않은가.

 

왕이 죽어봤자 다시 도망쳐서 새 왕을 세우고 싸우면 그만이지.

왕이 죽으면 응당 사기를 잃고 돌아서야 할 저것들이 되려 반격해올줄 누가 알았겠냐고.

예전에 금인과 병기를 얻어 사기가 충천해 있었던 그 자리에서,

이제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은 먹을 것조차 없어 들짐승을 잡아 뜯어먹고 연명해야 할 처지였다. 

 

[三月, 神馬駏○, 將扶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車廻谷.]

3월에 신마 거루가 부여의 말 100필을 거느리고 학반령 아래의 차회곡(車廻谷)에 이르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AD. 22)

 

그러나 부여 원정의 효과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대소왕 사후, 부여는 점차 와해되고 몰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여름 4월에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는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 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다. 따르는 자[從者] 백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는데,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았다.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이 되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AD. 22)

 

갈사국이 곧 가서량국, 하슬라국인데 단재 선생께서는 이곳이 바로 동부여라고 하셨다.

부여왕 금와에게는 아들만 일곱이 있었다고 했으니 그 중에 막내아들ㅡ

대소왕에게는 막내동생이 되는 그 양반이 갈사수라는 강가에 도망쳐서,

애매한 해두국왕을 죽이고 그 나라를 찬탈해서 왕이 되었다나.

해두국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죽은 사람만 안 된 거지 뭐.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가을 7월에 부여왕의 사촌 동생이 국인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는데, 왕제는 도망쳐 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 역시 불초하여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구나.”

마침내 1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왔다, 태왕이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那部)에 두었다. 등에 줄무늬가 있다 하여 낙(絡)씨 성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AD. 22)

 

흔히들 하는 오해 중에, 대무신왕이 부여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았다고 알고 있지만,

기록을 보면 그것이 사실과 다름을 알수 있다. 이후에도 무려 4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국의 여러 기록들 속에서 부여가 등장하는 것이다.

 

비록 망하지는 않았지만, 부여는 이 싸움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개박살이 났다.

왕도 죽고 왕족들 중에서도 변변한 사람이 없고, 더이상 나라를 존속시키기가 어려웠으리라.

무엇보다도, 대소왕의 무력을 따를 만한 인물이 부여에 없었다.

대소왕의 죽음을 당하여 군사를 내어 오히려 고구려군을 포위해

사지로 몰아넣을 만큼 강성한 군대를 가진 부여였지만,

정작 대소왕의 죽음 이후 부여를 다시 세울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부여의 비극이었다.

 

대소왕의 죽음에 대해서, 순암 늙은이는 《동사강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할 때는 각각 그 이웃나라가 있으니, 이웃나라와 수교하는데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일로, 작고 약한 나라는 어루만지고 크고 강한 나라는 두려워하여, 오직 신의(信義)를 두어야만 한다. 대소가 임금이 되었을 때 고구려는 바야흐로 흥기하여 한번에 박멸할 수 없었으니, 대소로서는 마땅히 교제를 삼가하여 평화를 잃지 말고 내치(內治)에 힘써서 외모(外侮)를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 대소는 이렇게 하지 않고 강대한 것만 믿고 여러 차례 침범하면서, 자신을 다스리는 도리에는 조금도 주의하지 않으니, 고구려 군사가 한번 일어나자 곧바로 그 도읍에까지 이르러 막힘이 없었고, 한번 싸움에 패하자 몸이 남의 손에 죽으니, 그 망한 것이 마땅하다. 가히 후세에 흔단을 도발해서 화란을 발생하게 하는 사람에게 훈계가 될 만하다.

 


<동사강목>

 

간신히 명맥만 잇고 형편없는 노대국으로 전락해버린 부여.

그때 부여의 꼴이란, 고려 장수왕에 의해 수도 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밀려난 백제의 꼴과 같았다.

비록 왕이 죽고 정치적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왕과 신하들 모두가 백제라는 나라를 붙들고

중흥을 위해 애썼고 마침내 멸망하지 않은채 2백년을 더 이어나갔지만, 부여는 그런 것이 없었다.

대소왕이 죽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왕족들 중 어느 하나,

대소왕의 자리를 잇고서 중흥을 위해 애쓰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조선 이후 만주 대륙의 가장 유력한 지배자 노릇을 해왔던 부여는

고구려 앞에 골방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冬十月, 怪由卒.]

겨울 10월에 괴유가 죽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AD. 22)

 

괴유. 생년 및 출신지 미상.

대무신왕과 함께 부여 원정에 나섰고, 부여왕의 목을 벤 주역.

부여 원정 때에 창을 들고 나섰던 마로라는 사람이 별다른 기록을 보이지 않고 그냥 산화된 것에 비하면,

괴유는 좀 특별한 경우라 볼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망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부여 정벌에서 돌아온 그 해 10월, 괴유는 죽는다.

무슨 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아마 전쟁에서 얻은 것이 아닐까 싶다.

 

[初疾革, 王親臨存問. 怪由言“臣北溟微賤之人, 屢蒙厚恩. 雖死猶生, 不敢忘報.” 王善其言. 又以有大功勞, 葬於北溟山陽, 命有司以時祀之.]

처음 병이 깊어지자 왕이 친히 가서 위문하였다. 괴유가 말하였다.

“신은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두터운 은혜를 거듭 입었습니다. 죽어도 사는 것 같아서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착하게 여겼다. 또한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담당 관청[有司]에 명하여 계절마다 제사지내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5년(AD. 22) 겨울 10월

 

왕이 직접 신하의 병문안을 가는 것은, 그 신하가 왕업의 개창이나 조정의 위기 상황에서

웬만큼 공을 세우지 않은 이상 흔하지 않은 일. 

고작해야 신라적 김유신이 문무왕의 병문안을 받았지만(문무왕은 김유신의 조카면서 고모부뻘이다) 

괴유라는 사람은 왕의 부여정벌에 참전했고 부여에서 대소왕의 목을 벤 전과가 있었기에,

대무신왕은 그의 병을 직접 문안하러 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괴유가 죽었을 때, 왕은 괴유가 태어난 북명의 산 남쪽에 그를 장사지내고,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해마다 그의 제사를 모시게 한다.

우리 나라에서 왕이 신하의 문병을 간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八年, 春二月, 拜乙豆智爲右輔, 委以軍國之事.]

8년(AD. 25) 봄 2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로 삼고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고구려 초년에는 대보(大輔)라 해서 재상직인 국상(國相)을 그렇게 불렀다.

신라에도 있었던 관직인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좌보와 우보로 나뉜다.

조선조 좌의정 우의정쯤 되려나.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毋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9년(AD. 26) 겨울 10월에 왕은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개마국이나 구다국의 존재는 이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동명왕 초년부터, 고구려는 대외팽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한 군사적 행동들을 펼쳐나갔다. 

동명왕 원년의 말갈족 정벌이나 이듬해에 비류국을 함락시킨 때부터,

행인국, 북옥저, 선비족, 양맥, 고구려현, 그리고 이번에 정벌해 약화시킨 동부여와 개마국, 구다국까지.

크고 작은 주변 소국과 부족들이 고구려에게 정복되어 그 군현이 되어갔다. 

 

고구려를 위협하던 가장 큰 세력인 부여를 쳐서 깨뜨린 위세를 몰아 이웃 소국을 친 것인데,

개마국이라는 나라는 지금의 백두산 남쪽 개마산 일대(개마고원), 또는 압록강 상류쯤에 있었던 것 같고,

구다국은 함경도 산간지대에 있었다고 하는데,

먼저 개마국이 고구려에 무너진 것을 보고 구다국은 겁을 먹고 스스로 항복했다.

 

순암 노인네 말을 생각하자면, 개마국이나 구다국 모두 작은 나라였으니,

대국인 고구려가 어루만져야 할 대상이었을텐데, 그걸 쳐서 복속시켜 넓은 땅을 얻은 것을 보면,

대소왕과 대무신왕의 차이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둘다 대외로 뻗어나가고자 군사를 일으켰을텐데, 외치에만 신경쓰고 내정에는 소홀한 탓에

죽은 뒤 나라가 산산조각난 대소왕과는 달리,

대무신왕은 밖으로의 대외팽창만이 아니라, 내정에도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옳은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외치에 신경쓰지 않고 내정에만 신경썼던 조선이 멸망을 맞은 것은 뭐라고 설명하면 옳을까.

내정이나 외치나 다 중요하고, 어느 한쪽이 부실하거나 비대하면 안된다는 대답이 나오긴 하지만,

과연 그 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일일까.

오늘날에도 그걸 제대로 못해서 거의 도산 직전까지 간 나라나 기업이 한둘이 아닌데.  

 

[十年, 春正月, 拜乙豆智爲左輔, 松屋句爲右輔.]

10년(AD. 27) 봄 정월에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이 무렵 고구려는 주변 여러 국가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서로는 한(漢)과, 동으로는 옥저와 동예, 남쪽으로는 낙랑과 백제, 신라에 이르기까지. 

그 뛰어난 용병술로, 북쪽으로 강성하던 부여를 격파하고, 또 개마와 구다의 나라를 얻었으며,

나라 안으로는 좌보와 우보를 나누어 국정을 분담시키고 안팎으로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으니,

위엄이 이웃 나라에까지 떨쳤다.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王會臣, 問戰守之計. 右輔松屋句曰 “臣聞恃德者昌, 恃力者亡. 今中國荒儉, 盜賊蜂起, 而兵出無名. 此非君臣定策, 必是邊將規利. 擅侵吾邦, 逆天違人, 師必無功. 憑險出奇, 破之必矣.”

11년(AD. 28) 가을 7월에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거나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였다.

“신이 들으니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 했습니다. 지금 중국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나는데 명분없이 군사를 출동시켰습니다. 이것은 군신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리고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났으니 그 군사는 반드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험한 곳에 의지해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1년(AD. 28)

 

잘 나가다가, 또다시 위기가 닥친다. 한의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온 것이다.

 

[左輔乙豆智曰 “小敵之强, 大敵之禽也. 臣度大王之兵, 孰與漢兵之多, 可以謀伐, 不可力勝.” 王曰 “謀伐若何?” 對曰 “今漢兵遠鬪, 其鋒不可當也. 大王閉城自固, 待其師老, 出而擊之, 可也.” 王然之, 入尉那巖城, 固守數旬.]

좌보 을두지가 말하였다.

“작은 적은 강해봤자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제가 태왕의 군사와 한의 군사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생각해 봤는데, 꾀로는 칠 수 있겠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왕은 물었다.

“꾀로 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대답하였다.

“지금 한의 군사들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태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나가서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1년(AD. 28)

 

위나암성.

역사속에 등장하는 환도성(丸都城)이 바로 이곳이다.

고구려의 당시 수도 국내성을 방어하는 주요 산성이기도 하다.

이미 말한바 있지만 고구려는 석성(石城)의 나라다.

나라 이름부터 이미 그렇고, 고구려가 다스리던 곳에는 반드시 성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들 고구려의 성은 군사방어와 지역거점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국내성의 위에 환도산성 즉 위나암성이 있었다.>

 

고구려의 방어체계는, 평시에 거주하는 평지성과 전시에 대비하기 위한 산성을 따로 나누었고,

평화시기에는 평지에 있는 성에서 거주하다가, 전쟁이 나면 산성으로 들어가서 싸우는 방어체계가 확립되어 있었다.

 

427년에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옮겨온 수도 평양에도,

평시용의 안학궁과 전시용인 대성산성이 따로 나뉘어 있었고, 그것이 장안성으로 합쳐졌으며, 백제 또한 그러했다.

신라는 수도 경주 주위에만 산성이 세 개나 있었다. 명활산성과, 남산성, 그리고 서형산성(선도산성).

이러한 산성&평지성 구축체계는 곧 우리나라의 특유 전술에 기인한다.

 

이른바 청야수성(淸野守城).

우리나라에선 전통적으로 적이 쳐들어오면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했다.

적군이 식량을 구하면서 장기간 머물 수 없도록 평야 지역을 깨끗이 비워놓고[淸野],

산성을 거점으로 활이나 쇠뇌를 쏘면서 성 사수전에 들어간다.

모든 곡식을 불태우고 우물을 메워서 적들이 물자를 공급받을 곳을 완전히 차단한채,

수시로 기습을 감행해서 혼을 빼놓고, 결국 적들이 지쳐 돌아갈 즈음에

그대로 밀고 나와서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다. 그게 바로 청야수성전술의 핵심이다.

 

이러한 수성전술은 우리나라에서 유래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우리나라의 전매특허나 마찬가지였다.

수나라군은 요동성과 평양성 앞에서 청야전술 때문에 군사들이 굶주려서 쓴맛을 봤고,

저 유명한 안시성 싸움도 전통적인 성곽전술로 당 태종은 결국 안시성을 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고려 때에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세계 최강의 몽골군이 수차례나 공성무기로 돌과 화살을 퍼부어가며 구주성(龜州城)을 공격하고도

끝내 무너뜨리지 못했던 것이다.   

 

[漢兵圍不解. 王以力盡兵疲, 謂豆智曰 “勢不能守, 爲之奈何?” 豆智曰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犒漢軍.”]

한의 군사들은 에워싸고서[圍]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에게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두지가 대답하였다.

“한인(漢人)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 있어 샘이 없는 줄 압니다. 때문에 오래도록 포위하고서 우리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물풀에 싸서, 약간의 좋은 술[旨酒]과 함께 한의 군사들에게 보내 먹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1년(AD. 28)


<바람의 나라 17권 中에서 묘사된 위나암성의 싸움>

 

청야수성을 위해선 우선, 산성 내에 물자가 든든하게 확보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실 식수는 기본이고, 장기전으로 갈 것을 대비해서 식량이나 무기도 충분하게 있어야 하는데,

비록 후대의 기록이긴 해도,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조선에 표류했다가 도망쳐서 쓴 《하멜표류기》에 보면

조선에서는 산성마다 무기와 함께 3년 먹을 양식이 비축되어 있다고 전하고 있으니,

고구려에서도 비슷하게 성곽 안에 그만큼의 식량을 비축하고서 이런 전술을 펼쳤을 것임에 틀림없다.

 

요동태수는 그걸 몰랐던 모양인데, 위나암성이 딱딱한 암반 위에 세워진 성이란 것은 어떻게 알고

물이 고갈될 것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성을 포위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계속해서 성안에만 있을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대무신왕은 을두지의 계책에 따라 물풀에 싼 잉어를 그에게 보낸다.

 

[王從之貽書曰 “寡人愚昧, 獲罪於上國. 致令將軍帥百萬之軍, 暴露弊境. 無以將厚意, 輒用薄物, 致供於左右.” 於是, 漢將謂城內有水, 不可猝拔, 乃報曰 “我皇帝不以臣駑, 下令出師, 問大王之罪. 及境踰旬, 未得要領, 今聞來旨, 言順且恭, 敢不藉口以報皇帝.” 遂引退.]

왕은 그 말을 따라 글을 보냈다.

“과인이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얻었습니다. 장군께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이 없어 보잘것 없는 물건이나마 부하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리하여 한의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어 단번에 함락시킬 수 없겠다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우리 황제께서는 신을 둔하다 하지 않으시고 군대를 출동하도록 영을 내려 대왕의 죄(?)를 물었다. 국경에 다다른지 열흘이 지났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온 뜻을 들으니 그 말씨가 공순하다. 어찌 이대로 황제께 아뢰지 않겠는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1년(AD. 28)

 

여담이지만 만화 속에서 중국 병법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높은 곳에 진을 치지 않는다'고 적어놓은 부분에 대해서 말인데,

《손자병법》에는 높은 곳에 진 치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은 없고 다만 행군편에 보면

 

"주둔할 때는 시야가 탁 트인 고지를 점령하고, 적이 고지를 먼저 점령했으면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면서 공격하지 말라."

 

했고, 군쟁편에는

 

"높은 언덕을 점령하고 있는 적을 올려보면서 공격하지 말고, 언덕을 등지고 있는 적을 정면으로 공격해선 안 된다."

 

고 설명한 대목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한의 요동태수는 위나암성이 높은 지대에 있는 것을 보고

《손자병법》에서 말한 것에 따라 위나암성을 공격하지는 못하고 지구전으로 버티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김진 작가께서 뭔가 착오가 있으셨던 모양이다.

 

[十三年, 秋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來投.]

13년(AD. 30) 가을 7월에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 동생 위수(尉須) 및 사촌 동생 우도(于刀)와 함께 항복해 왔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순간 이들을 부여의 망명객으로 착각한 것은 내 실수였다.

아직 망하지도 않은 나라를 망한 나라 취급을 하다니. 부여는 아직도 멀쩡하게 건재해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대무신왕의 무공(武功)을 깎아내린다거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지는 않으리라.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를 불태우고 개로왕을 전사시켰지만 끝내 백제를 무너뜨리지 않은 것처럼,

대무신왕도 부여 자체의 멸망을 노리고 부여를 친 것은 아니었을테니까.

 

무엇보다도 부여는 고구려의 조상뻘 되는 나라다.

그런 나라를 고구려로서도 함부로 건드리긴 힘들지.

아니면 왕을 잃고도 더 분노해서 고구려군을 반격해 들어온 부여의 군사력에

대무신왕이 조금은, 겁먹은 탓이었을지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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