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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3>제4대 민중왕

<바람의나라 中 해색주의 등장 장면>

 

[閔中王, 諱解色朱, 大武神王之弟也. 大武神王薨, 太子幼少, 不克卽政. 於是, 國人推戴以立之. 冬十一月 大赦.]

민중왕(閔中王)은 이름이 해색주(解色朱)이고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어려서 정사를 맡아볼 수 없었으므로 국인(國人)이 추대하여 세웠다. 겨울 11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민중왕.

고구려 4대 국왕.

성씨는 물론 해(解)씨이며, 이름이 색주(色朱)인데 《삼국사절요》에는 읍주(邑朱)라고 되어있다.

색(色)과 읍(邑)의 글자 생긴 모양이 비슷해서 《삼국사절요》가 착각한 것 같으니 가볍게 넘어가고.

그는 3대 대무신왕의 아우(《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해놨다)이다.

앞서 말했지만 대무신왕에게는 분명히 해우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태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좀더 나이를 먹을 때까지 삼촌이 나라를 맡으라고 신하들이 의논해서 결정한듯 한데,

말하자면 정식 국왕은 아니고 임시 국왕인 셈이다.

좀더 먹물 들어간 사람틱하게 말하자면 '권지왕사(權知王事)'쯤 되려나?

(그냥 직설어법으로 말하면 국왕 대리인.)

 

[二年, 春三月, 宴臣.]

2년(AD. 45) 봄 3월에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해색주라는 인물은 바람의 나라 1권부터 처음 등장했었다.

(유리왕의 대사 중에서 "글만 읽느라 몸을 상하게 하지 말고"라고 당부하는 게 있었지)

<바람의 나라>에선 일단 외유내강의 인물로 묘사되기는 했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방향에 대해서 무력과 패도를 중시하는 대무신왕과는

미묘하게 의견차이가 났던 인물로 필자는 기억한다.

 

[夏五月, 國東大水, 民饑, 發倉賑給.]

여름 5월에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2년(AD. 45)

 

기실 <바람의 나라> 안에서만 그렇게 그려진 것이 아니고,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가 별달리 국정을 주도하려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내정도 외치도 모두 정력적으로 의욕적으로(지나칠 정도로) 계획하고 추진하던 형에 비하면,

민중왕은 너무 소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국정에 대해서 최대한 자신의 의견을 아꼈던 모양이다.

자신이 일단 임시로 국왕의 자리를 맡고 있기에 별로 큰 책임의식을 못 느꼈던 것인지,

 

[三年, 秋七月, 王東狩獲白獐. 冬十一月, 星于南, 二十日而滅. 十二月 京都無雪.]

3년(AD. 46) 가을 7월에 왕은 동쪽으로 사냥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에 살별[星]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야 없어졌다. 12월에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바람의 나라>를 읽은 감동 때문인지 어쩐지 이유는 차치하고,
대무신왕이 재위하던 시절에는 드문드문 일어나는 기상현상 하나하나가 신비하게,

혹은 심상찮게 느껴졌던 분이 있다면,

아마도 민중왕 때의 살별 출몰 기록을 보면서는 '그랬냐?'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고개 끄덕이는 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필자는 그랬었다).

그리고, 민중왕이 동쪽으로 사냥 나갔던 것에 대해서, 조선조 권근이라는 양반의 한 마디,

 

남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건 아들이 되었다는 것인데, 지금 민중왕이 상을 당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1년이 채 못 되어서 사냥하였으니, 스스로 그 잘못을 드러냈구나.

 

아, 그랬어?

 

[四年, 夏四月, 王田於閔中原. 秋七月, 又田, 見石窟, 顧謂左右曰 “吾死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4년(AD. 47) 여름 4월에 왕은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7월에 또 사냥하다가[田] 석굴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내라. 결코 새로 능묘(陵墓)를 짓지 말라.”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조선조 세조가 죽을 때의 유언인데, 자기 무덤에 석실을 만들지 말라고 그랬단다.

나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쓰지 마라.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죽기 전까지 이런 유언을 남길만큼 풍수에 능했고,

또 백성들의 고충을 줄여주려고 애썼던 군주이기도 했다.

 

민중왕이 세조처럼 자기 조카를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석굴을 보면서 여기에 묻히면 무덤을 만드는 수고도 덜수 있지 않나하고.

나름대로는 백성들을 위해서 죽은 자신을 위해서까지(그것도 국왕 대타인데) 

무덤을 만들어주는 수고를 덜어주려고 그랬던가.

 

[九月, 東海人高朱利獻鯨魚目, 夜有光. 冬十月, 蠶支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後漢書云『大加戴升等萬餘口』]

9월에 동해 사람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를 바쳤는데 (그 고래의) 눈이 밤에 빛이 났다. 겨울 10월에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에 투항하였다.<《후한서(後漢書)》에는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구(口)』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4년(AD. 47)

 

그런 생각을 한 것까지는 좋은데 대체 뭘 어떻게 해먹은 건지.

1만여 가가 낙랑으로 해서 한에 투항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잠지락부라는 곳에 대해서 안정복 영감은 고구려 남쪽의 변방 부部의 이름이라고 했다)

 

이 친구 대리직이라고 너무 널널하게 한거 아닌가.

왕이란게 일단 반란 일어나 쫓겨나던지 지가 스스로 양위한다면서 옥좌 박차고 나오던지,

그럴 일 없는 한 국정은 모두 재상이나 신료들한테 떠맡긴채 

하루종일 널널하게 드러누워 놀고 먹어도 누가 뭐랄 사람 하나 없는

초특급 철밥통을 지닌 1급공무원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고래 눈에서 빛이 난다는 이야기는 또 처음 들어본다)

 

[五年, 王薨. 王后及臣, 重違遺命, 乃葬於石窟, 號爲閔中王.]

5년(AD. 48)에 왕이 죽었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유명(遺命)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민중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민중왕

 

뭐 어쨌거나.

왕 자리 그까이거 그냥 뭐 대충~~

도망친 대가(大家) 애들 그까이거 그냥 뭐 대충~~~

거의 밋밋함과 소심함의 간선교차도로를 달리듯,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국왕 대리 임무

5년간 충실히 수행하고, 그는 조카에게 '뒷일을 맡기마'하고 사라지는

어느 만화속 짜증 지대로인 조연처럼 하늘로 날랐다.

그리고 소원대로 민중원의 석굴이라는 그곳에 묻히고,

묻힌 자리 이름을 따서 민중왕이라는 시호도 얻었다.

대리 국왕의 인생 치고는 꽤,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 아닌가?

 

그런데 뭐 해먹은게 있어야 평을 적든지 말든지 하지.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대충대충 하다간 이 맹물같은 양반을 도대체 뭐라고 평해야 할지.

이걸 그냥 끝내기도 그렇고...

그렇지. 이 양반이 이렇게 오기까지, 고구려 초기 3대 동안, 저기 남쪽에 내려간 애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한번 얘기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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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백제부터 시작하자.

본편이 아니니까 일단 《삼국사》를 보고 간이하게 말씀을 드리면,

(이 영감태기가 백제 초기에 대해서 진짜 잡다하게 많이 실어놨는데

대략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단 사실관계는 책임질수 없음을 양해바람.)

그러니까 난을 피해서 내려오기 전에, 졸본땅 홀승골성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를 연타발(延陀勃)이라는 사람이 다스리고 있었지.

그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첫째하고 막내는 떼먹고 둘째 이름이 소서노(召西奴).

일찍이 우태(優台)라는 남자와 혼인을 했는데, 우태라는 이 남자로 말하자면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시니, 부여 왕실과는 혈연이 있는거라.

그래 이 남자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이 바로 백제본기 첫머리를 장식하는 용감했다 두 형제.

맏아들 비류(沸流)와,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우태가 죽어버려서, 소서노는 졸본에서 애 둘 딸린 과부로 지냈겄다.

 

<추발소와 호동의 대화중 간략하게 등장하는 소서노. 바람의 나라 17권中>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져 내려왔거든.

그 남자 이름이 추모, 즉 주몽이가 북부여에서 도망쳐갖고 졸본부여까지 왔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애 둘 딸린 자기 둘째 딸 소서노를 아내로 삼게 한거라.

나이로만 보면 이 여자가 연상이야. 주몽보다 나이가 한 8살쯤 더 많아.

거기다 애까지 둘 딸린 과부.

그러고서 졸본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동명왕으로 즉위한거라. 

동명왕 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하는데 이 여자의 도움이 무지하게 컸었지.

재정적으로도 뭐로도 이 여자 아니었으면 그냥 떠돌이 신세였을터.

그걸 잘 아는 동명왕은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더라.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자기 자식 대하듯이 귀여워하고 아껴주었으니

(요즘같은 세상에 이만큼 자식사랑할수 있나.)

장차 이 두 아이 중 한명이 고구려의 다음 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게 웬일인가.

고구려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유리가 갑자기 떡 하니 밀고 내려와서

굴러온 돌 박힌 돌 빼내는 식으로 태자 자리를 떡 하니 차고 앉아버리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리 친식구처럼 서로 아껴주고 가시버시하던 사이가

왕좌 먹으러 온 이 불가사리같은 놈의 등장으로 하루아침에 서먹서먹해져버렸은즉.

이쯤하여 이 두 형제가 문득 생각을 하는 거라.

곱게만 자란 자기들은 분명히 저 험한 곳에서 모난 돌처럼 삐뚤삐뚤하게 자란

저놈의 유리인지 자기인지 하는 놈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들은 서로 의논한다.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疣贅]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리하야 이 두 형제간에 의견이 섰다.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언뜻 보면 대기업 떠나서 벤처기업 하나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렵고 무서운 결정.

그러나 그것이 차라리 여기 있다가 찬밥 신세 되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고 생각을 했던가.

드디어 이 둘은, 어머니과 함께,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자신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남쪽의 땅 한산(漢山)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이라.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주몽에게 말하는 소서노. 바람의 나라 17권中>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이었다.

 

이것이 바로 백제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십제라는 조그만 구멍가게처럼 시작하는 듯 보였던 백제.

조그만 구멍가게 십제가 수퍼마켓 백제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비류는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그러게 뭐든지 입지 선정을 잘해야 앞날이 창창하다니까.

옛날 어른들이 괜히 풍수란걸 만들었겠어?

다 이유가 있는거지.

그렇게 온조의 구멍가게 십제는, 형의 구멍가게까지 인수해서 가게를 더 늘렸고,

간판도 십제에서 백제로 바꿔 건다.

삼국 시대의 시작이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원년(BC.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온조가 가게를 늘린 뒤에 먼저 한 일은....

동명왕묘를 만들었다고?

아, 물론 이때에 동명왕이 이미 죽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사당을 세우냐...?

고구려에선 친아들도 아직 안 만들었는데 양아들이 먼저 만들다니.

이게 어떻게 된거냐 궁금하면 《삼국사》를 좀더 파헤쳐야 한다.

온조왕 원년, 이맘때에 세워진 시조사당 건립에 대해서,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는

"그 시조 구태(仇台)의 묘(廟)를 나라의 도성에 세우고 1년에 네 번 제사지냈다."

고 했고, 《해동고기(海東古記)》에선 이때 사당의 주신이 된 것이 

"시조 동명(東明)"이라고도 하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라고 하였으며,

《북사(北史)》 및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어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고 하였으니, 《책부원귀》도 "시조 구태"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동명이 시조임은 사적이 명백하니, 그 나머지는 믿을 수 없다ㅡ고 김부식 영감이 그랬는데,

몰라. 뭐 아무튼 동명왕묘를 이때에 지었다고만 해두기로 한다.

(부록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시길.)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2년(BC.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해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다. 마땅히 무기를 수리하고 양곡을 저축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冬十月, 雷, 桃李華.]

3년(BC.16) 가을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의문이 많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순암 노인네는 이때의 말갈 침공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오랑캐'들이 쳐들어온 사건의 시초라고 말한바 있다.

말갈은 우리가 아는 한 분명히 저너머 대륙쪽에 우글우글 몰려사는 녀석들일텐데,

어떻게 경기도 한복판에 있는 백제까지 와서 그런 전쟁을 벌였다는 것인지.

옛날 학자들도 그건 굉장히 의문이었던듯, 이런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말갈은 지역이 가장 북쪽인데, 어찌 고구려를 넘어 와서 신라와 백제를 침범했겠는가? 알 수 없지만, 따로 한 종족이 있어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의 사이에 끼어 살았거나, 아니면 뱃길로 바다를 건너 와 두 나라와 상통한 것이 아닐까?”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이것도 설마 그 소위 '대륙백제설'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혹은 더욱 커져만 간다.

 

[四年, 春夏, 旱, 饑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4년(BC.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五年, 冬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5년(BC.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하였는데 신비스러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六年, 秋七月辛未晦, 日有食之.]

6년(BC.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대부분의 고대사 기록들이 해마다의 일을 기록하면서 진짜 띄엄띄엄 가는 것에 비하면,

온조왕의 이야기는 2,3,4,5,6... 이렇게 순서대로 가주는 것이 너무도 감사할 따름이다.

친절한 부식씨도 아니고 말야.

 

[八年, 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舊好, 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有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8년(BC.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니,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서 뜻이 한 집안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하지 않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할 것이다.”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런 걸로 화친과 우호를 저버릴수 있겠는가? 집사(執事)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 나라[小國]도 생각이 다 있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마수성과 병산책.

이 둘로 인해서 백제는 낙랑과 마찰을 겪게 된다.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見之卽退.]

10년(BC.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말갈은 유독 백제에 많이 쳐들어왔다.

그리고 백제는 그런 말갈과 많이도 싸웠다.

도대체 무슨 원수가 있어서 고구려를 놔두고 그토록 애를 먹였는지.

온조왕 10년에 쳐들어온 것이 세번째. 이 온조왕 무렵만 해도 무려 차례에 걸쳐서

백제로 쳐들어와 속을 썩였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拘川兩柵, 以塞樂浪之路.]

11년(BC.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꼭 하나씩은 있다. 경사난 자리에 가서 물 끼얹는 놈.

낙랑이 말갈을 시켜서, 눈엣가시같던 병산책을 깨뜨리고 백제 사람 1백명을 해친다.

온조왕도 지지 않고, 독산과 구천의 목책을 두 개 더 늘려서,

아예 낙랑이 내려올 길을 막아버린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BC.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이 남자로 변하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에 들어왔다. 왕모가 돌아가셨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졌다.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해야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천도를 고하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했다. 북으로는 패하(浿河), 남으로는 웅천(熊川),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으로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이리하여 온조가 새로 가게를 이전한 곳.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워 위례성 민가들을 옮겼다는 그곳....

순암 선생 왈 그곳은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이때 온조왕이 정한 가게 영역.....

또한 순암 안정복 노인네가 말씀하신 바, 지금 평산(平山)의 저탄(猪灘)인 패하,

남쪽으로는 지금의 공주(公州)인 웅천, 동쪽으로는 지금의 춘천(春川) 지방인 주양.

장사 13년만에 백제 수퍼마켓이 또한번 크게 확장되는 순간이었더랬다.

 

[十四年, 春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4년(BC.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BC.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했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가게를 늘리고, 새 집을 짓는 일은 1년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차곡차곡 하나하나 나라를 정리하고, 조그만 구멍가게였던 십제를

이만큼 제법 행세하는 큰동네 수퍼마켓으로 확장을 시켜놨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17년(BC.2)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지냈다.

 

대소가 하던 짓을 그대로 본받았나.

한창 잘 커가려던 가게를, 계속 보고 있으려니 배가 아팠던지.

낙랑이 쳐들어와서 아예 불을 질러버린다.

싸그리 남김없이 불을 질러서 다 없애버리려고 그랬던지.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인걸. 700년 대기업의 신화는.

 

위례성이 불타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해 여름 4월, 국모의 사당이 세워진다.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18년(BC.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칠중하....

안정복 영감의 말로는 지금의 적성(積城)이란다.

그곳에서 다시 말갈과의 5차 전투를 치르고, 추장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둔다.

지난번에 낙랑의 사주를 받아, 백제에 쳐들어와서 병산책을 부숴버린 놈들.

그리고 지난번 새 가게를 불태운 복수를 하기 위해 낙랑의 우두산성.

안정복 영감이 말한 지금의 춘천(春川)을 공격하려고 구곡이라는 곳까지 다다랐으나...

하필 눈이 오는 바람에 일단은 돌아오고 말았더랬다.

그래도 추장을 잡아 저 멀리 마한에 보내버렸으니 당분간 저것들이 쳐들어올 일은 없겠지.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天地. 異鳥五來翔.]

20년(AD. 2) 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

 

이때에 이르러서.

백제는 스스로 일어설 준비를 시작한다.

이 때에 세워진 제단은, 백제가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다.

《책부원귀》에 보면

"백제는 매년 네 철의 가운뎃 달[四仲之月]에 왕이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지냈다."

라고 했는데, 이건 사실과 다르다. 이 제단이 처음 세워진 온조왕 20년(AD. 2) 봄 2월에 천지에 제사를 지낸 후, 38년(AD. 20) 겨울 10월, 다루왕 2년(AD. 29) 봄 2월, 고이왕 5년(238) 봄 정월, 10년(243) 봄 정월, 14년(247) 봄 정월, 근초고왕 2년(347) 봄 정월, 아신왕 2년(393) 봄 정월, 전지왕 2년(406) 봄 정월, 모대왕(牟大王) 11년(489) 겨울 10월에도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다루왕 2년(AD. 29) 봄 정월에 시조 동명(東明)의 묘(廟)에 배알하고, 책계왕 2년(287) 봄 정월, 분서왕 2년(299) 봄 정월, 계왕 2년(345) 여름 4월, 아신왕 2년(393) 봄 정월, 전지왕 2년(406) 봄 정월까지 제사를 지냈다고 《삼국사》는 《고기》의 기록을 인용해서 말한다.

 

사중지월이란 네철, 즉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가운뎃달인

2월, 5월, 8월, 11월을 말하는데, 위에서 보시다시피 백제에서 제사지낸 계절은

봄 정월에 제사지낸 것이 7번, 봄 2월과 겨울 10월에 제사지낸 것이 각 2번으로

중국에서 말하는 것과는 맞지 않는다.

조선조 보수 꼴통 유학자들의 시선에서 비판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면 이건 중국에서 말한 예법이 아니라, 백제만의 고유한 예법이었기 때문이다.

 

공자의《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에는,

『천자(天子) 즉 황제는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는 사직(社稷)에 제사지낸다.』

고 했다. 하늘과 땅 즉 천지에 제사지내는 것은 천자만의 고유한 특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는 이렇게 독자적으로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냄으로서

중국의 예법을 따르지 않고 당당히 '자신들만의 길'을 택한 것이다.

자주성의 발로라고만 해두자.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2년(AD.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1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사로잡은 포로[生口]를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못잊어서 또왔네. 미련때문에~~

나훈아의 못잊어서 또왔네를 흥얼거리며 다시 백제로 말갈은 왔다.

이번에 온 것이 꼭 6차.

그리고 한번만에 깨지고 포로가 되어 백제 장수와 군사들의 노비 신세가 되고 만다.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24년(AD.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웠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마한이라는 이 나라.

삼한의 하나이며, 큰 나라는 1만여 가(),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로 구성된 78개 소국을 거느린 당당한 삼한 땅의 맹주.

더구나 옛날 위만에게 찬탈당한 준왕이 내려와 세운 나라라는 점에서,

안정복같은 조선조 보수꼴통 성리학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나라 아니던가.

그러나 이런 소수 의견(?)은 차치하더라도, 백제에게 마한은 무척 버거운 상대임엔 분명했다.

아직 건국된지 100년은커녕, 50년도 안된 신흥중소기업 백제였고,

2백년이나 이곳에 발붙이고 있으면서 텃세가 장난이 아닌 대기업 마한이다.

애초부터, 둘은 힘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는 형국이었다.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國之應也.”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25년(AD.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입니다.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辰韓)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한마디가 백제와 마한, 앞으로의 우리나라 역사의 판도를 바꾸게 될줄.

왕궁 우물물이 넘치고 말이 소를 낳는 괴변을 가리켜 말한 일관 자신도 몰랐으리라.

똑같다.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라니.

고구려도, 부여왕이 보낸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까마귀를 얻고 나서,

부여를 칠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확신이 서면 그다음에는 행동으로 옮겨야 되는 법.

역시 뭐든지 사상이 뒷받침이 돼줘야 된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爲他所幷,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26년(AD.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려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왕은 확신을 행동으로 옮긴다.

사냥하는척 하면서 마한을 습격해 멸망시켜버린 것이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AD.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그리고 1년만에.

마한은 무너진다.

무려 78개나 되는 계열사를 아래에 두고 부리던 마한이라는 대기업이.

백제라는 이름의 중소기업(그것도 자기 계열사나 마찬가지로 여기던)에게 무너진 것이다.

삼성이 이름 모를 벤처기업에게 인수합병 당한대도 이보다 더 충격이 클수 있을까?

구멍가게에서 시작해 창업한지 겨우 27년밖에 안되는 중소기업 백제가,

창업 2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거대한 뿌리 하나를 통째로 뽑아버린 것이다.

엄청난 시대의 대반전이다.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28년(AD.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던 마한도 합병했으니 이제 후계자를 생각할 때도 됐지.

마한을 무너뜨린 이듬해, 온조왕은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무를 맡아보게 한다.

 

[三十一年, 春正月, 分國內民戶爲南北部. 夏四月, 雹. 五月, 地震. 六月, 又震.]

31년(AD.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적은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 있는 법이다.

우박에 이어서 난데없는 지진이 두 차례에 걸쳐 1달 간격으로 발생하고,

가뭄이 이어지면서 굶주리는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백제라는 기업의 큰 위기였다.

 

[三十三年, 春夏, 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33년(AD.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 영감은, 온조에게는 비교적 관대하신 편이다.

남북의 2부를 나눈데 이어 동서로 2부를 더 설치한 온조에게, "나라 제어하는 도리를 안다고 할 만하다"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복 영감의 말에 따르면, 무릇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성곽을 쌓고ㆍ종묘를 세우고ㆍ궁실을 지으며ㆍ강계(疆界)를 정하고ㆍ관직을 만들고ㆍ군읍(郡邑)을 설치하고ㆍ조교(條敎)를 확립하며ㆍ법령 반포하는 것등의 일들은,

나라라는 기업을 다스리는데 모두 차례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수적인 일들이란다.

 

일찍이 한산(漢山)에다가 도읍을 옮겨 세우고,

나라의 강역(疆域)을 정하여 순행하면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농사짓기를 권장하고,

성곽과 궁궐을 세우고 묘단(廟壇)을 이룩하며,

지금 다시 수도를 4부(四部)로 나누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그 깐깐하고 보수꼴통에 성리학밖에 모르는 안정복 선생을 대단히 흡족하게 했다는 거다.

 

어떻게 생각하든 뭐.

온조왕은 안정복 선생의 찬사를 받으며, 굶주린 백성들을 직접 찾아가 달래고,

자칫 기업 전체가 위험할수도 있었던 초유의 사태를 진정시킨다.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34년(AD.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마한의 마지막 충신이었을지도 모를 주근은 그렇게 죽는다.

이미 8년전에 망한 조국을 다시 부활시킬 그날만을 기다렸는데.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렇게 죽을 줄이야.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AD. 18)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마한도 합병했고 위기도 넘겼겠다.

이제 여기저기에 체인점을 낼때도 됐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새로이 성을 쌓고 수리하며, 사람들을 그 성에 나누어 살게 하는 등,

시장 개척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는 백제기업 창업자 온조왕이었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AD.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 했다. 참새처럼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어서 6월에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친 자가 1천여 집[戶]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마한의 최후 저항도 거뜬히 물리쳐낸 기업.

이번에는 또다른 위기가 몰려온다.

자연의 재앙.

참새가 맞아죽을 만한 크기, 달걀만한 우박이 내리고, 2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고.

급기야 굶주림에 지친 백성 1천 호가 고구려로 달아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天地.]

38년(AD. 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일단 이듬해부터 왕은 구제작업에 들어간다.

지방을 직접 돌아보면서, 동쪽과 북쪽 경계를 50일간 순시하고,

3월에 이르러서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면서,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이렇게 간신히 하나의 기업을 지켜낸다.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拒擊之.]

40년(AD. 22)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7,8차 말갈의 습격.

백제에 뭐 꿀단지라도 뺏겼는지 시도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이 깡패같은 것들에게

이젠 좀 익숙해졌을까? 각다귀같은 저것들에게.

뭐 저것들이야 어떻든, 일단 기업은 잘 돌아간다.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41년(AD.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다.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여기서 안정복 영감은 다시 한번 온조에게 걸쭉한 찬사를 보내신다.

"온조가 창업(創業)을 쉽게 한 것은 사람 쓰는 법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인재를 얻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거니와,

인재를 얻되 능히 그를 신임하고, 신임하되 능히 오래한 뒤에야

가히 그 성공을 바랄 수 있다ㅡ는 것이 안정복 선생의 생각인데,

뭐 그러시다면야 뭐, 이 하찮은 중생이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요.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百餘集王宮 日者曰 “鴻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AD.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닷새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였다[納款].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역시 소문난 기업에는 사람이 저절로 모여드는 법이라니까.

남옥저에서까지 사람이 20집이나 와서 귀순을 하고 말이야.

이 너그러운 창업자도 그렇지만, 두번이나 점쳐서 맞힌 이 일관도 용해.

홍대 앞에 돗자리 깔던지 아니면 사주카페 하나 열어서 한 사람당 천원만 받아도

1년이면 대박날텐데. 청와대며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의원들이며 대통령 후보들이

줄줄이 줄서서 잘좀 봐달라고 굽실굽실. 제가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ㅡ.

그러다가 나중에는 미국에까지 소문이 퍼져갖고 백악관에서 헬기 보내서

우리 미국으로 와주쉽쇼우~~하고 부시가 직접 전화까지 하고...

야, 야! 지금 무슨 헛소리야? 뭐 소설 쓰냐?

아주 삼천포로 빠질래? 우리나라 역사 얘기 하는데 백악관이 왜 튀어나와?!

(난 농담도 못해. 궁시렁궁시렁.)

 

[四十五年, 春夏, 大旱, 草木焦枯. 冬十月, 地震, 傾倒人屋.]

45년(AD.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46년(AD. 28) 봄 2월에 왕이 죽었다[薨].

 

온조왕은 46년동안 백제라는 구멍가게를 커다란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를 아들 다루에게 남긴채 재위 46년만에 숨을 거둔다.

그래도 뭐. 그 창업자만큼이나 위엄있고 후덕한 후계자가 있으니까.

700년 백제 기업은 앞으로도 계속될것이다.

이 이야기 끝날때까지 주욱.

다루왕때부터의 백제가 궁금하시면 네이버 검색창에 삼국사기 쳐서

디지털한국학 삼국사기 사이트에 들어가서 본기를 직접 읽어보시기를.

아무 것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는 내 설명보다는 차라리 그게 더 나을테니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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