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 - 광인

고구려/인물 2014. 7. 4. 03:21
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38070334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4>제25대 평원왕(5) - 광인"에서 온달 관련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온달

(전략)

아무튼간에, 그런 식으로 고려는 새로운 적과 맞닥뜨려야 했다. 비대한 통일왕조 수(隋) 앞에서. 그런데 평원왕이 마침 이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고, 수와 일전을 겨루는 그 대업은, 그의 뒤를 이은 태자 원, 고려 제26대 영양왕에게 맡겨지게 된다. (《삼국사》 본기에 재위 32년에 죽었다고 한 것과는 달리,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재위 31년에 죽었다고 해서 1년 차이가 있다) 그리고, 평원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한 그 해에, 온달은 죽었다.
 
[及嬰陽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고려인들의 영토관념에 대한 것인데, 백제의 역사에 대해서 잡문을 쓰려고 이것저것 찾다보니까 고려인들은 대체로 한수 이북까지는 모두 고려의 영토라고 생각하는 관념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장수왕이 백제의 근개루왕을 죽이고 한성을 함락시켰던 역사는 고려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럽고 통쾌한 역사로 남게 되었고, 그때 장수왕이 넓힌 영토를 고려의 최대 판도이자 고려가 차지한 땅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충주 계립령의 하늘재. 온달이 되찾아 오겠다며 나섰던 계립령이 이곳이다.>
 
여기 《삼국사》 온달열전의 기록만 보더라도 온달은 영양왕에게 '우리 한북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북이라면 한수의 북쪽, 지금의 한강 북쪽의 모든 땅을 가리키는 말일터.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고려인들은 한강 이북의 땅을 모두 고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인의 영토 관념은 훗날 왕건의 후고려에까지 이어졌다. 고려의 남방영토는 지금의 한강을 경계로 그 이북을 모두 차지한다는 관념이, 《고려사》 지리지에 표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楊廣道, 本高句麗百濟之地.<漢江以北高句麗, 以南百濟.>]
양광도는 원래 고구려와 백제의 땅이다.<한강 이북은 고구려, 이남은 백제다.>
《고려사》 권제56, 지10, 지리지1, 양광도
 
성종조에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에도, 고려 조정에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이른바 '할지론'이 대두되었을 때에(미친 놈들!) 서희가 반대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서경 이북을 떼어주게 되면,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 옛 땅[三角山以北亦高句麗舊地]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해도 다 내주시렵니까?" 삼각산ㅡ지금의 서울 북한산 이북도 서희는 고려의 옛 땅이라고 말했다. 온달이 전사하고도 5백년이 지난 뒤에까지, 이곳의 고려인들에게는 한강이 곧 고려의 최남단 국경선이고 그러한 인식이 고려에서부터 변함없이 유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시킨 475년부터 비롯된 영토관념이었다.
 
[臨行誓曰 “鷄立峴 · 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踣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고, 나아가 신라군과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쓰러져 죽었다. 장사지내려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으니,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아아, 돌아갑시다.”
하였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옛날 신라가 훔쳐간 땅을 되찾아오겠다고 말하고서 전쟁터로 나가더니.... 전쟁터에 나가기에 앞서 그는 말했다. 만일 그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예전에 김득구 선수가 미국으로 떠날 때 관 가지고 가면서, '이기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던가. 그리고 온달과 김득구 선수는 결국 같은 운명을 맞고 말았다.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한 것이 원한이 되었을까? 그 자리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관을 공주가 와서 어루만지면서 "이제 다 끝났으니 돌아갑시다"라고 말했더니 그제서야 움직여서 돌아갈 수 있었다고.
 
그의 죽음 앞에서는 숙연함까지 느껴진다. 누가 온달의 최후를 듣고 그를 바보라고 하겠는가? 왕에게까지 알려졌던 바보를 이렇듯 위대한 용장으로 만든 것이 모두 공주의 힘이었으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리라.

그가 싸우다 죽었다는 아단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지금도 충청북도 단양에는 온달산성(溫達山城)이라 불리는 성이 있다. 이곳의 전설에 의하면, 온달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곳, 기록속에 나오는 그 아단성이며, 그가 죽었다는 비보를 받고 달려온 공주가 움직이지 않는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권유했던, 온달 장군이 공주와의 이별과 함께 이승에서의 인연을 끝마친 장소. 
 

<단양 온달산성. 온달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이제 사람은 가고 성벽은 남았다. 그러나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천년 전의 그 이야기만은 사라지지 않고 이 성터와 함께 남았다. 이 무상한 세월, 제자리를 지켜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 그나마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언제 죽어도 행복했을까. 그 두 사람은. 

<평양 진파리 4호분. 북한에서는 이 무덤이 평강공주와 온달의 합장묘라고 주장한다.>
 
몰랐는데, 북한에서는 지금 동명왕릉 근교에 있는 진파리 4호 고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무덤 안에는 역시 아름다운 벽화들이 많이 그려져있는데, 특이하게도 북쪽 벽에다 현무를 그리지 않고 용을 그려넣었다. 벽화에 나오는 신선들은 대부분 머리를 틀어올린 여성들이다. 이것은 북한에서 이 무덤을 고려의 왕녀, 그 중에서도 평강공주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진파리 4호분 벽에 그려진 소나무. 무덤과 벽화는 2004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진파리 4호분에 그려진 그림들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탈색만 되지 않았더라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예술 걸작이 되었을텐데. 나아가 나같은 정신나간 사람에게 미술적으로 영감을 불어넣어줄 아이디어 뱅크가 되어주었을 것 아닌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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