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mcZR8e <1>대제국 고구려 기틀 다진 용장 부분노 (상)
          http://bit.ly/1mY25Jl  <2>대제국 고구려 기틀 다진 용장 부분노 (하)
* 위 두 기사에서 부분노와 직접 연관된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1> 대제국 고구려 기틀 다진 용장 부분노
용감하고 지략 뛰어난 최고의 장수
2010. 03. 04   00:00 입력 | 2013. 01. 05   05:23 수정


고구려의 건국 수도 졸본성. 부분노 장군은 이 시기에 동명성왕을 도와 제국의 토대를 다졌다.


삼실총 벽화의 고구려 무사도. 부분노 장군도 이처럼 늠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전략)

부분노(扶芬奴)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제2대 임금 유리명왕(琉璃明王)을 보좌해 건국 초기 대제국의 기틀을 다진 장수였다. 그의 대표적 군공은 동명성왕의 명령에 따라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해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고, 유리명왕 때에는 선비족(鮮卑族)을 토벌해 속민으로 삼은 것이다.

특히 선비족을 토벌할 때에는 처음부터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탁월한 지략으로 적군을 공략, 단순히 용맹만 빼어난 장수가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라는 사실도 보여줬다. 그의 선비족 토벌과정은 손자병법을 비롯한 중국 고대의 병법서들이 이미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연구되고, 실전에 응용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한다.

부분노는 삼국사기에 겨우 두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록만으로도 그는 탁월한 장수였고, 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가 매우 컸음을 알게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재위 6년(서기전 32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를 시켜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고을을 만들었다.’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정복한 오이는 동명성왕(추모성왕·鄒牟聖王)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할 때 그를 수행한 세 사람의 심복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마리(摩離)와 협보(陜父)라고 기록은 전한다.
 
(후략)


<2> 대제국 고구려 기틀 다진 용장 부분노
병법 통달한 지장 … 계략으로 선비족 토벌
2010. 03. 11   00:00 입력 | 2013. 01. 05   05:24 수정
 

동명성왕이 망명, 고구려를 건국한 비류수 하류의 졸본부여 땅. 왼쪽 뒤편에 졸본성이 있었다.
 

졸본성 동문터. 지금은 오녀산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전략)
 
추모라는 걸출한 젊은 영웅이 졸본부여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라는 새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수많은 씨족과 부족이 찾아와 신민으로서 보호받기를 자청했을 것이고, 수많은 용사와 재사도 찾아와 대왕의 신하가 됐을 것이다. 어쩌면 부분노도 이 무렵 추모대왕의 장수로 발탁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모대왕은 건국 직후부터 자신이 오래전부터 품어보고 키워 온 원대한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단군왕검의 조선과 해모수의 부여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세운 수십 개의 나라를 합쳐 다시 하나의 대제국으로 아우르고자 했다.

즉위 원년에 대왕은 군사를 이끌고 가장 가까운 말갈족을 쳐서 멀리 쫓아버리고, 그 다음에는 비류수 상류의 송양국을 복속시켰다. 추모대왕과 활솜씨를 겨뤄 상대가 되지 않자 송양왕이 항복하고 나라를 바쳤던 것이다. 대왕이 망명 동지인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해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영토에 편입시킨 것은 재위 6년째인 서기전 32년의 일이었다.

또 재위 10년 11월에는 장수 부위염(扶尉厭)을 보내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영토로 삼는 등 쉴 새 없이 국토를 확장하고 백성을 늘려 힘차게 부국강병의 길을 달렸다. 이러한 정복사업에 오이·마리·협보·재사·무골·묵거 등 개국공신들과 더불어 부분노 장군의 활약도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추모대왕 동명성왕은 서기전 19년 9월에 재위 19년 만에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40세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9년 조에 이르기를,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돌아오니 왕이 기뻐해 태자로 삼았다’고 했는데, 그 5개월 뒤에 동명성왕이 세상을 뜬 것이다. 이렇게 유리명왕이 고구려의 왕위를 이었고, 부분노 장군은 동명성왕에 이어 2대째 제왕을 섬기게 됐다.

부분노가 다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11년, 서기 9년이다. 그해 4월에 유리명왕이 여러 신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선비족이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앉아 지키므로 우리나라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소. 만일 이 선비 오랑캐들을 무찌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큰 상을 내리겠소.” 

그러자 부분노가 나서서 말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튼튼한 나라로서 사람들이 용감하지만 미련한지라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계략으로써 굴복시켜야 합니다.” 유리명왕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부분노가 이렇게 대답했다. 

“첩자로 하여금 적의 성안에 들어가게 해 거짓말로 우리 고구려는 땅이 좁고 군사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감히 선비를 치지 못한다고 하면 놈들이 틀림없이 우리를 만만히 여겨 수비를 게을리 할 것입니다. 소장이 그 틈을 타 정병을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산속에 숨어 적의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때 대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오랑캐의 성 남쪽으로 보내시어 싸움을 걸게 하신다면 놈들은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이때 소장은 정병을 이끌고 놈들의 성으로 쳐들어가고, 대왕께서는 날쌘 기병을 거느리시고 놈들을 양쪽에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리명왕이 부분노의 전략에 따라 선비족 토벌군을 일으켰다. 선비족이 고구려 군사를 얕잡아 보고 성문을 열고 출전하자 부분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 안으로 짓쳐들어갔다. 그러자 소수의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던 선비족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시 성으로 되돌아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부분노가 성안에서 수많은 적군을 목 베어 죽이고, 유리명왕은 강병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서 달려드니 선비족은 앞뒤로 협공당하게 되자 마침내 항복하고 고구려의 속민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 유리명왕은 전공이 으뜸인 부분노에게 상으로 식읍을 내리니 부분노가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모두 대왕의 빛나는 무위(武威) 때문이지 제게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리명왕은 식읍 대신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부분노에게 상으로 주었다. 이 기록을 보면 부분노는 용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진에 간첩을 들여보내고, 아군이 약한 듯이 보이는 허허실실의 전법 등이 모두 손자병법 등에 나오는 전략전술에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초기나 그 이전부터 손자병법 등 중국의 병법서들이 들어와 연구되고 실전에 응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분노 장군은 이렇게 삼국사기에 딱 두 차례만 등장하고 기록에서 사라져버렸다. 

부분노 장군이 선비족을 토벌할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왜냐하면 부분노 장군의 나이가 40세에 세상을 떠난 동명성왕과 비슷하다고 보면 유리명왕 11년에 그의 나이가 50세가 약간 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그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부분노는 백전노장으로서 유리명왕을 도와 고구려 창업기의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다음주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 편이 이어진다.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