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VGEUcq

<11> 온달 (하)
고구려의 명장 단양 아단성에 잠들다
2010. 05. 13   00:00 입력 | 2013. 01. 05   05:35 수정
 
북한이 주장하는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합장묘.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묘 인근에 있는 진파리 4호 무덤이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 아래 온달동굴 내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중국의 사서들에는 온달의 이름이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지만 ‘동사강목’에는 온달을 대형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평강왕 19년(578년)의 일로 기록돼 있다. 어쩌면 온달은 순박한 성격의 하급무사였다가 인재등용의 무대인 낙랑언덕의 사냥대회와 북주의 침략을 격퇴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당시 고구려 군부의 신진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평강공주와 눈이 맞아 몰래 한 연애 끝에 대왕에게 발각돼 공주가 궁에서 쫓겨나 동거를 하다가, 마침내 임금의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이란 벼슬까지 받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온달 내외는 그때부터 도성의 변두리인 하부에서 중심부인 상부로 옮겨가 살기 시작했다. 또 평강왕 28년(587년)에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했을 때에도 온달의 가족은 상부의 귀족들과 함께 이주했을 것이다. 장안성은 양원왕 8년(552년)에 쌓은 새 도성으로서 고구려의 천도는 장수왕 15년(427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남천한 지 159년 만의 일이었다.

새 서울로 옮긴 지 3년뒤인 서기 590년 10월에 온달의 장인이요 공주의 친정아버지인 평강왕이 재위 32년 만에 죽고 태자가 즉위하니 곧 영양왕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위·진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일어나 주변국들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로서도 새로운 강적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북쪽 요하 방면의 방어도 문제지만 근래 들어 팽창한 국력을 주체하지 못해 걸핏하면 남쪽 국경을 침범하는 신라 역시 골칫거리였다. 등과 배 양면의 적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까, 그것이 당면 최대의 안보문제였다. 이에 따라 새로 즉위한 대왕은 긴급 어전회의, 요즈음으로 치면 비상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온달이 이렇게 말했다.

“신 온달이 아뢰고자 합네다. 이제 수나라 오랑캐는 통일전쟁을 마무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대군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우리에게는 방비할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봅네다. 그동안 후방의 적을 제압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인가 합네다.”

“신라를 먼저 치자는 말이디요? 하지만 군사를 양분하면 힘도 그만큼 쪼개질 터인데 그래도 괜찮갔소?”

“폐하,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인바 신라 간적들에게 빼앗긴 이래 그 땅의 백성이 늘 통분하며 부모의 나라인 우리 고구려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두고만 보갔습네까? 대왕께서 신을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맡겨 주신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옛 땅을 회복하여 폐하의 심려를 덜어드리고자 하옵네다!”

그 자리에는 영양왕 8년(598년) 수 문제의 30만 대군과 영양왕 12년(612년) 수 양제의 백만 대군을 여지없이 무찌른 주역인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高建武)를 비롯해 강이식(姜以式)·을지문덕(乙支文德) 같은 명장과 대신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온달 장군의 말이 옳다고 동의했으므로 그날 국가안보회의는 온달을 총수로 하는 남정군을 파견하기로 결론이 났다.

대궐에서 집으로 돌아온 온달은 아내 평강공주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출전을 알리고 작별을 했다. 그때 눈먼 홀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떴지만 사랑하는 평강공주와 귀여운 자식들과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정말 몰랐다. 이튿날 군사들을 점고하고 출정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온달은 이렇게 맹세했다.

“군사들아, 잘들 들으라우! 우리에겐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야! 신라 놈들이 아리수(한강) 이북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서 모조리 되찾지 못하면 내 결코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갔어야!”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도성을 출발해 질풍노도처럼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때 온달이 되찾고자 출전한 계립현 이서, 죽령 이북, 고현 이내는 오늘날 강원도 지역 대부분이다. 

진격을 거듭한 온달의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운명의 땅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 편은 전한다. ‘드디어 떠나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에 맞아 길에 쓰러져 죽었다.’

그렇다면 온달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했다는 아단성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아단성은 서울 성동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백제의 옛 성터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비정해 온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아차산성을 온달의 전사지 아단성으로 추정한 이유는 첫째, 아단의 단(旦)과 아차의 차(且)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데서 비롯된 착각과 견강부회의 결과요, 둘째는 위치가 한강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즉, 온달의 말 가운데 ‘신라는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한 구절을 들어 온달의 마지막 싸움터를 오늘의 서울 한강 북쪽 아차산성으로 추정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어느 사서나 지리지를 찾아봐도 아차산성이 곧 아단성이란 대목은 없다.

또한 ‘한수 이북’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강 하류인 오늘의 서울 강북만이 아니라 남한강 상류 이북은 모두 해당하는 말이니, 온달이 가리킨 한북의 땅은 곧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인 오늘날 강원도 대부분과 충북 일부를 가리킨 것이다. 이 가운데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삼국사기’ 지리편에 따르면 아단 두 글자가 붙은 지명은 오로지 이곳밖에 없다.

옛 지명이 을아단인 영춘면에 가면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이 쌓았고, 온달이 이곳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산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 산성이 있다. 사적 264호로 지정된 온달성 아래에는 천연기념물 261호인 온달동굴이 있고, 근처에는 온달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으며, 온달 부부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졸지에 총수를 잃은 고구려군이 온달의 유해를 군영으로 옮겼다가 도성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영구가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열전은 이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관이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고, 온달의 전사를 원통하게 여긴 군사들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평양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22㎞ 지점인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릉 인근에 진파리 4호 무덤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바로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대받던 하급 무사를 낭군으로 삼아 고구려 제일의 용장이 되도록 정성껏 내조한 적극적 성격의 고구려 여걸 평강공주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고구려 대왕의 사위가 되고 실지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온달 장군의 지순한 사랑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여전히 크나큰 감동을 안겨준다.

다음은 수나라 침략군 백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대표적 명장 을지문덕의 위업을 돌아보기로 한다.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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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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