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12725

'못생긴' 후궁, 광해군 사로잡은 비결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16편] 광해군이 좋아한 여성들
11.08.18 15:21 l 최종 업데이트 11.08.18 15:21 l 김종성(qqqkim2000)

▲  광해군 때에 세워진 경희궁. 서울 종로구 신문로의 서울역사박물관 뒤에 있다. ⓒ 김종성

조선시대의 대표적 개혁군주인 광해군. 소수파인 대북당을 이끌고 조선의 변혁을 꿈꾼 광해군. 그가 얼마나 개혁을 갈구하고 얼마나 동지를 갈망했는지는, 흥미롭게도 그의 이성관계에서까지 드러난다. 

광해군 5년 12월 30일자(1614.2.8)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그와 가장 친밀한 여인들은 궁녀 김개시, 정소용(소용 정씨), 임소용(소용 임씨)이었다. 소용(昭容)이란 정3품 후궁에게 주어진 작위다. 

<광해군 일기>에서는 "이 세 명이 후궁의 으뜸이었다"고 했다. 김개시는 후궁이 아니라 상궁에 불과했지만, 임금과 잠자리를 가진 승은상궁이라 하여 후궁의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그를 2명의 후궁과 엮어서 '후궁의 으뜸'이라 평한 것이다. 

실록의 분위기를 볼 때, 셋 중에서 광해군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김개시고 그 다음은 정소용이었다. 두 여인이 광해군과 각별했던 이유는 좀 독특하다. 임소용의 경우에는 미모가 특출했지만, 두 여인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광해군은 두 여인의 어떤 점을 좋아했던 것일까?

정소용, 문서 처리에 능해 임금의 업무 부담 덜어줘

먼저, 정소용. <광해군 일기>에서는 그가 애교를 잘 부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와 광해군이 친해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광해군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에 능숙했다. 들어오고 나가는 문서를 관리하고 왕을 대신해서 재가를 내리니, 왕이 갑절로 신임했다."

정소용은 행정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문서처리에 능했다. 광해군을 대신해서 공문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재가까지 대신해서 처리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82조에서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서명)한다"고 했다. 여기에 나타난 문서행정의 원칙은 조선시대에는 한층 더 엄격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지만, 한국의 왕은 기본적으로 문서로써 통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왕들은 문서처리의 부담에 항상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이 정소용을 가까이한 것은 그가 자신의 업무부담을 덜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실무적 보조에 힘입어, 광해군은 개혁정국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해군이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 

김개시, 뛰어난 계략으로 임금의 마음 사로잡아


▲  <서궁>에서 김개시 역할을 했던 이영애. ⓒ kbs

다음으로, 김개시. 상궁 김개시(이영애 분)를 소재로 한 1995년 KBS2 드라마 <서궁>을 시청한 사람들은 실제의 김개시도 꽤나 예뻤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와 드라마는 정반대였다. 김개똥 혹은 김가희라고도 불린 김개시는 상당히 못난 외모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그의 외모가 역사기록에까지 남았을까. 광해군 5년 8월 11일자(1613.9.24) <광해군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다.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으며,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金尙宮名介屎. 年壯而貌不揚, 兇黠多巧計.)

'나이가 들어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못생겼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오늘날 우리처럼 남의 외모를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외모를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김개시의 경우는 외모가 하도 '특별'해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였기에 그 점을 사료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평가할 수도 없었기에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그의 외모를 평한 것이다. 

그럼, 김개시는 '고운 마음'으로 광해군의 관심을 끌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위의 <광해군 일기>에서 부분적으로 소개됐다.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기 때문에 광해군의 마음을 샀던 것이다. 

<광해군 일기>는 광해군 정권을 전복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지라, 이 책에서는 광해군 쪽 사람들의 인간성이 나쁘게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정적의 외모는 있는 그대로 평가하더라도 정적의 인간성만큼은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외모의 비중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에 비해 인간성이 매우 중시됐기 때문에, 역사의 승자는 패자의 인간성만큼은 어떻게든 폄하하려 했다.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표현은 승자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므로, 이것은 중립적 관점에서 수정해야 한다. 이 표현은 '영리하고 아이디어가 풍부했다'로 이해해야 한다. 

정치 활동 위해 후궁 자리 거절하기도

위의 <광해군 일기>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우리는 김개시가 그런 두뇌를 바탕으로 광해군 정권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개시는 핵심적인 국정 현안에서 광해군에게 조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 쪽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궐 밖으로 자주 외출했다. 그가 광해군 정권의 몸통이라는 점은, 광해군의 계모이자 정적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기록된 <계축일기>에서 김개시가 이 정권의 원흉으로 지목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김개시는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후궁 자리를 거절한 것은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궐 밖으로 수시로 나가 광해군 정권의 지지기반을 다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광해군이 갈 수 없는 영역으로 가서, 광해군이 할 수 없는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당시의 반대파들은 그가 궐 밖의 남자들을 만나러 다닌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것은 근거가 불충분한 흑색선전에 불과했다. 그는 비상한 머리를 무기로 광해군의 개혁정치를 지원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광해군이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 


▲  광해군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번지. 붉은 동그라미 아래가 광해군묘다. ⓒ 네이버 항공사진

행정능력과 문서처리능력이 출중해서, 임금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 중 하나였던 공문 처리를 도운 정소용. '교활하고 계략이 많은' 덕분에, 광해군을 위해 전략을 짜고 조직활동을 벌인 김개시. 

이런 여인들이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광해군과 가장 친밀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가 개혁의 완성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과 연애를 구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을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은 것을 보면 그가 개혁의 완성을 얼마나 갈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두 여인이 광해군의 정치적 파트너가 된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가 동지를 얼마나 갈망했는지도 알 수 있다. 주변에 얼마나 동지가 없었으면, 일 잘하고 머리 좋은 여인들을 애인으로 삼아 동지를 만들려 했을까. 서자 출신이라 설움 받고 소수파 정권의 수장이라 설움 받은 광해군의 인간적 고뇌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