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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9. 소재 노수신, 유배 중 진도를 개화시키다
진도 역사박물관
입력시간 : 2009. 11.19. 00:00

진도 운림산방 안에 있는 진도역사박물관 ‘유배문화와 진도’라는 주제관에서 노수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년 유배 후 말년운 좋았던 문장가
사화로 진도 유배…시 쓰며 주민 개화
선조 등극 후 복권돼 영의정까지 올라

두 공은 천상에 있으나
외로운 나그네는 바다 가운데 떠 있네.
다행스럽게 오늘 아침까지 목숨을 이었으나
앞날은 오히려 멀기만 하네.

二公天上在 孤客海中浮 
幸緩今朝死 前導尙自悠 

한 선비가 진도로 유배를 온다. 이윽고 벽파진에 도착한다. 그는 벽파정에서 김정과 송인수의 시를 본다. 시를 읽으니 내 신세도 그들과 비슷하다. 김정은 기묘사화로 죽었고 송인수는 나와 같이 사화를 당하여 사약을 받았다. 나는 목숨을 부지하였으니 그들보다 나으나 앞날은 캄캄하다. 

그 선비는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다.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수찬을 지냈고 1544년 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그는 대윤(大尹)에 속하여 인종 즉위 초에는 정언을 지내면서 소윤(小尹)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세상이 바뀐다.

대윤 윤임 세력이 소윤 윤원형에 의하여 사화를 당한다. 노수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조좌랑이었던 그는 1545년 을사사화로 파직되고 1547년 3월에 순천에 유배된다. 그리고 1547년 9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절해고도 진도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진도에 유배 온 지 약 6개월이 되는 어느 날 노수신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부모님, 아우, 부인 등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치어 시 여덟 수를 지었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동곡칠가'를 모방한 것이다. 동곡칠가는 두보가 전쟁을 피하여 떠돌면서 지은 비애의 시이다. 그의 시 8수중 첫째 수는 자신에게, 둘째 수부터 일곱 수까지는 부모, 외조모, 장인, 아우, 여동생,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수는 절개를 지키기로 다짐한 시이다. 그 첫수를 음미하여 보자.

나그네, 그 나그네, 호는 암실(暗室)이니
바다 섬에서 가진 것은 두 무릎뿐
어째서 쓸모없는 칠나무를 스스로 베었던가.
관 뚜껑이 덮여야 인생사 끝나는 것
뱃속의 기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아, 첫 번째 노래여! 나의 노래 절규하는 데
희미하던 등불 나를 위해 불꽃 다시 피우네.

1548년 늦봄에는 ‘옥주 이천언(沃州 二千言)’ 오언 고시체 400구를 완성하였다. 기름진 땅이라는 의미의 옥주는 진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남쪽 끝 궁벽한 섬의 풍물과 진도사람들의 애환을 시로 적었다. 그 중에는 흉년에 관한 시도 있고, 관리들의 폭정에 대한 시도 있으며 진도 사람들의 못된 풍속을 비판하는 시도 있다. 이 중 흉년에 관한 시를 읽어보자. 

온 고을에 흉년이 들었네.
옷가지를 찐 보릿가루나 밀기울과 바꾸어 먹고
모두가 사나운 병에 걸렸네.
그리고 쑥 풀만 무성하니 
노약자는 모두 구렁에 빠져버렸네.
근심하고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붙잡고 다니니
두려워서 반쯤 열려진 사립문을 닫아버리네.
버려진 아이들의 울음소리 들리네.

소재는 육지 사람이 그리웠다. 부모님이 잘 계신다는 소식이 오기를 , 유배가 풀렸다는 기별이 오기를 기다렸다. 벽파정에서 뭍에서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정자 기둥 사이를 수없이 돌았다. 

벽파정에서 사람을 기다리며 碧亭待人
새벽달에 허전히 그림자 끌고 가니 
누런 꽃 붉은 잎은 정을 듬뿍 머금었네.
구름 모래 아마득해 물어볼 사람 없어 
나루 누각 기둥 돌며 여덟아홉 번 기대었소.

소재의 유배생활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진도에서의 유배생활이 5년 째 되는 1552년. 그는 초옥 3칸을 짓고 그 집을 소재(蘇齋)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호 또한 소재로 하였다. 이제 차분히 초탈하면서 다시 소생하자는 심사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 때 현지 첩도 얻었을 것이다. 
 

소재문집

주자가 생이지지에 가까워도 부지런히 책 읽기를 즐겼는데 노수신은 하늘로부터 받은 재주 고고하게 멋대로 구슬 같은 글을 지었다. 

주책없는 외로운 명예를 엿보려고
그 누가 다섯 수레의 책을 다 읽으리.
높아도 그 뜻 버리지 않으니
행여 병이 나을 거야

노수신이 소재라는 호를 짓고서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운림산방의 진도역사박물관에 붙어 있다. 

그는 진도사람들을 개화시키는 데도 힘썼다. 진도는 섬의 풍속이 애당초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쟁탈하여 버렸다. 밤중에 보쌈 한 것이다. 노수신은 예법을 가르쳤다. 섬사람들에 혼인 의식을 일깨워주고 야만적인 풍속을 없앴다. 그리고 섬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책을 읽도록 한 것이다. 이런 소재의 공을 잊지 못하여 진도사람들은 1602년에 봉암서원에다 소재의 신위를 모시었다.

소재의 명성은 인근 지역에서도 소문이 났다. 영암, 해남에 사는 최경창, 백광훈등 시인이 찾아와서 그에게 시를 배웠다. 특히 백광훈은 나중에 정승이 된 노수신의 천거를 받아 백의제술관으로 중국에 가기도 하였다. 

귀양살이 동안에 소재는 관리들의 횡포로 여러 수모를 당하였다. 어떤 군수는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갖은 방법으로 곤욕을 주면서, “죄인이 어찌 쌀밥을 먹을 수 있나” 하고 좁쌀로 바꾸어 주었다. 어느 군수는 어느 날 밤에 달이 밝아 아이종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죄인이 어찌 잔치를 벌이며 즐길 수 있는가” 하고 그 종을 잡아 가두었다. 

그런데 1565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별세하자 윤원형도 벼슬에서 쫓겨난다. 이어서 사화로 피해를 입은 사림들이 하나 둘씩 사면 되었다. 그 해 12월 노수신도 드디어 진도에서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지가 옮기어졌다.

진도에서의 19년간의 유배가 풀린 것이다. 32살에 진도로 유배 와서 50세에 외딴 섬에서 나온 것이다. 이즈음에 노수신은 아래 시를 짓는다. 

천지의 동쪽 나라 남쪽 
옥주의 성 아래에 두어 칸의 초당 
용서받기 어려운 죄와 고치기 어려운 병을 얻어
불충한 신하, 불효한 자식이 되었도다. 
3천 4백일 귀양살이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요
태어난 해인 을해 년 병진일이 부끄럽구나. 
너 노수신은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임금님에게 받은 은혜 어떻게 갚으려느냐.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노수신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진도에 안치된 노수신은 심지가 고명하고 학문에 연원이 있으며 처신과 행사에 솔선하여 실천함이 모두 정직하였다. 1547년에 적소에 유배된 뒤 방안에서 조용히 지냈는데 지조 지킴이 한결 같았다.'

1567년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자 세상은 달라졌다. 사림들이 중용되었고 사화로 피해를 입은 선비들이 복직되었다. 노수신도 그 해 8월에 유배가 풀리었고 10월에는 복직되었다. 20년 만의 관직이었다. 그래도 품계는 예전 그대로였다. 고봉 기대승이 나섰다. “20년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을 폐하지 않고 곤궁과 환난 중에도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발탁하여 중용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1568년 1월 드디어 선조는 기대승의 건의를 받아 들여 노수신, 유희춘을 특진시킨다. 

선조 시절 노수신은 승승장구 하였다. 대사간·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선조는 그를 가장 아끼었다. 신임이 너무나 두터웠다. 임금은 노수신을 이렇게 칭하였다. “경은 한유와 유종원의 문장이요, 학문은 정자와 주자의 맥을 전하고 도는 유림의 종주가 되었도다” 하였다. 

1590년에 노수신은 죽는다. 그는 '암실선생자명'이라는 묘비명을 스스로 짓는다. 그는 진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절조를 지키며 돌아와 보니 귀양살이도 비로소 편하구나’라고 비명에 적고 있다. 

진도의 벽파진 나룻터를 간다. 거기에는 명량대첩비만 있을 뿐 벽파정은 없다. 포구도 썰렁하다. 다행히 운림산방에 있는 진도역사박물관의 ‘유배문화와 진도’라는 안내판에서 노수신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신위를 모신 봉암서원도 남아 있지 않고, 그가 유배 살았다던 지산면 안치리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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