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09490

남편이 그런 일까지...단종 누나도 비참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 세 번째 이야기
11.08.11 17:26 l 최종 업데이트 11.08.11 17:27 l 김종성(qqqkim2000)

▲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경혜공주(홍수현 분). ⓒ KBS

단종은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엾은 이로 기억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올라 삼촌에게 왕위도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긴 그의 짧은 삶은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대중의 동정심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단종 못지않게, 어쩌면 단종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겪은 사람이 있다. KBS <공주의 남자>에 나오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홍수현 분)가 그 주인공이다. 동생처럼 왕이 아니었기에 역사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생도 한없이 불쌍하고 가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주는 단종처럼 살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힘든 경우도 있다.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공주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승소의 시문집 <삼탄선생집>에 수록된 경혜공주 묘지(墓誌)에 따르면, 공주는 제4대 세종이 재위할 때인 1435년에 세자 이향(훗날의 문종)과 권씨(훗날의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왕이 아닌 세자인 데다가 어머니가 세자의 첩이었기 때문에, 출생 당시의 경혜공주는 공주가 아니었다. 

세자의 정실부인 즉 세자빈이 낳은 딸에게는 정2품 군주(郡主). 세자의 첩이 낳은 딸에게는 정3품 현주(縣主)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그것도 출생 직후 곧바로 주는 게 아니라, 보통은 7세 이후에 이런 작위를 수여했다. 

세종 건강 악화로 꼬이기 시작한 인생

시작은 첩의 딸로 했지만, 초년의 공주는 운이 괜찮은 편이었다. 3세 때, 어머니가 세자빈으로 승격됨에 따라 그는 동궁전 즉 세자의 처소인 경복궁 자선당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왕이 되면 공주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어린 소녀는 궁에서 생활했다. 

7세 때 어머니가 동생(훗날의 단종)을 낳고 곧바로 죽는 바람에 궁을 떠나게 됐지만, 이때도 그의 삶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는 정2품 평창군주라는 작위를 받고 거기에 따른 특권과 대우를 향유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5세부터 그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도 세종의 건강이 호전되지 않자, 왕실에서는 16세 된 공주(당시는 평창군주)의 혼사를 서둘렀다. 세종이 사망할 경우 삼년상 기간은 혼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공주는 18세 이후에나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에서는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했기 때문에, 18세는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참고로 3년상은 윤달을 제외하고 25개월 뒤에 종결되었다.

왕실에서 급히 얻은 배우자는 전 한성부윤(현 서울시장)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鄭悰)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공주와 정종은 세종 32년 1월 24일(1450.2.6)에 결혼했다. 이때 공주는 16세였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공식적인 부마 간택절차를 거쳐 이 결혼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당시 경혜공주는 왕이 아닌 세자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런 절차를 거칠 수 없었다. 

그런데 신혼부부가 살림집을 차리기도 전인 세종 32년 2월 17일(1450.3.30)에 세종이 그만 눈을 감았다. 결혼한 지 52일 만에 할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살림집 준비는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음력 1월 24일과 2월 17일 사이가 어떻게 52일간이나 되나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세종 32년에는 1월 뒤에 윤1월이 있었기에 그렇다. 이들이 살림집을 마련한 것은 세종의 소상(小祥, 사망 1주기 의식)이 끝난 뒤였다. 이때 경혜공주의 신분은 공주였다. 

아버지 문종도 세상 뜨고, 숙부는 쿠데타 일으키고

공주의 불운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삼년상을 끝내고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세상을 뜬 것이다. 문종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삼년상은 끝내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지만, 공주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삼년상에 이어 아버지의 삼년상까지 치러야 했으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었을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불운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숙부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이 쿠데타 계유정난(1453)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동생인 단종은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다. 이때 공주는 19세였다. 

운명은 공주의 편이 아니었다. 2년 뒤인 21세 때에, 공주는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고 동생이 상왕으로 '승격'되는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남편인 정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정종이 귀양을 간 것은, 그가 단종을 감싸고 도는 금성대군(수양대군의 동생)과 친했기 때문이다. 정종의 유배지는 영월에서 경기도 양근, 한성, 수원 및 김포로 변경됐다. 유배지가 수원으로 바뀐 뒤부터는 공주도 그를 동행했다. 

동생 단종 죽은 뒤 4년 후 남편은 능지처참 


▲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이민우 분). ⓒ KBS

세조 집권 뒤에 발생한 사육신 사건(1456)은 운명이 공주의 편이 아님을 한층 더 증명해주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한 이 사건으로 인해 단종은 상왕에서 왕자 급인 노산군으로 강등된 상태에서 영월로 유배를 가고, 정종은 전라도 광주로 귀양지를 바꾸게 되었다. 동생 단종은 이듬해에 죽고 남편 정종은 단종이 죽은 때로부터 4년 뒤에 죽었다. 정종은 시신을 토막 내는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때 공주는 27세였다. 
부모도 잃고 동생도 잃고 남편도 잃은 경혜공주. 더 이상 무엇을 잃을 게 있을까 싶었겠지만, 그에게는 내놓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공주 신분과 자유인 신분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남편이 죽은 뒤에 전라도 순천부의 노비로 떨어졌다. 일국의 공주가 하루아침에 그렇게 전락한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여섯 살짜리 아들 정미수와 뱃속에 있는 딸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그는 노비가 되러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부사(순천시장) 여자신이 진짜로 일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동헌(수령 집무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서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전해지고 있다.

두 아이 왕궁에 맡기고 비구니로 살다 세상 떠나

그를 점입가경의 파멸로 몰아세우던 운명의 신은, 벼랑 끝에서 갑작스레 상황을 종결지었다. 임신하고 애 딸린 공주한테까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을 우려한 수양대군(당시는 세조)이 공주를 사면하고 한성으로 불러 올린 것이다. 

한성으로 돌아온 공주는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자신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남편 잃은 후궁을 포함한 왕실 여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비구니 사찰이 한성에 몇 군데 있었다. 그는 그곳 어딘가에서 13년간 여생을 보내다가, 수양대군의 손자인 성종이 재위할 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40세였다.  

동생 단종도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경혜공주도 그에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살았다. 왕실에 삼년상이 겹치는 상황 속에서 그의 결혼생활은 꼬였고 동생 단종도 비운에 빠졌다. 그는 숙부가 동생과 남편을 죽이는 것을 목도했고, 한때 노비로 전락했다가 사면된 뒤에는 비구니로 일생을 마쳤다. 

공주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리처럼 여겨진다. 실제로도 경혜공주는 한때 모든 것을 다 가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왕실의 비극 속에서 그는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인간으로서의 삶, 여성으로서의 삶을 다 포기한 채 한과 설움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비극은 단종의 비극 뒤에 가려져 있지만, 어찌 보면 그의 비극이 훨씬 더 서글프고 참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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