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05_0010

고조선의 대외 교역

桓公問管子曰. 吾聞海內玉幣有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 陰山之礝䃉, 一筴也, 燕之紫山白金, 一筴也, 發朝鮮之文皮, 一筴也, 汝·漢水之右衢黃金, 一筴也, 江陽之珠, 一筴也, 秦明山之曾靑, 一筴也, 禺氏邊山之玉, 一筴也.

『管子』卷23, 揆度篇 78

환공(桓公, 재위 기원전 685~643)이 관자(管子, ?~기원전 645)에게 물었다. “내가 듣기로 해내(海內)에 7가지 옥폐(玉幣)가 있다고 하는데, 들어 볼 수 있겠는가?” 관자가 대답하였다. “음산(陰山)의 연민(礝䃉)이 하나요, 연(燕)나라 자산(紫山)의 백금(白金)이 하나요, 발조선(發朝鮮)의 문피(文皮)가 하나요, 여수(汝水)와 한수(漢水) 우구(右衢)에서 나는 황금(黃金)이 하나요, 강양(江陽)의 진주가 하나요, 진(秦)나라 명산(明山)의 증청(曾靑)이 하나요, 우씨(禺氏) 변산(邊山)의 옥(玉)이 하나입니다.”
『관자』권23, 규도편 78

해설

이 사료는 『관자(管子)』의 일부로, 중국 춘추(春秋) 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 재위 기원전 685~643)과 관중(管仲, ?~기원전 645)의 대화를 전하고 있다.『관자』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이었던 관중이 지었다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늦은 시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01)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관자』의 내용은 후대인이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기존에 전해내려 오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관자』에 보이는 고조선 관련 기록도 당시의 사실을 충분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료에서 관중은 해내(海內), 즉 나라 안의 옥폐(玉幣) 7가지로, 음산(陰山)의 옥(玉)돌인 연민(礝䃉), 연(燕)나라 자산(紫山)에서 나는 백금(白金), 발조선(發朝鮮)의 무늬 있는 가죽인 문피(文皮), 여수(汝水)와 한수(漢水) 우구(右衢)에서 나는 황금(黃金), 강양(江陽)의 진주, 진(秦)나라 명산(明山)에서 나는 불로장생의 선약(仙藥)인 증청(曾靑), 우씨(禺氏) 변산(邊山)의 옥(玉)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점은 7가지 옥폐 중에 발조선의 문피가 있다는 것이다. 옥폐는 ‘옥과 비단’으로, 고대 중국에서 중요한 의례에 사용된 예물을 의미한다. 또한 발조선은 대체로 고조선(古朝鮮)을 가리킨다고 해석되는데, 이때 고조선이 국가로서의 고조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고조선이 있던 지역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리고 ‘발’과 ‘조선’을 각각 별개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위의 내용이 고조선 내지 고조선 지역의 특산물로 문피, 즉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이 있었고, 그것이 중원 지역의 제나라에까지 알려질 만큼 중요한 교역품의 하나였음을 말해 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조선은 질 좋은 문피를 중원 지역의 물품과 교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조선과 중원 지역과의 교역은 위만(衛滿) 정권이 세워진 후 더욱 활발하였다. 한(漢)나라는 고조선을 외신(外臣)으로 삼고 고조선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와 교역하는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이로써 고조선은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와 한나라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하여 큰 이득을 얻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교역에서 중요한 교환 수단이 되었던 게 바로 손칼 모양의 청동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었다. 고조선이 위치한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서는 많은 양의 명도전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고조선과 중원 지역과의 교류에 명도전이 사용되었음을 말해 준다.


참고문헌
  
송호정, 「고조선·부여·삼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동향』, 서경문화사, 2007.
박대재,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2006.
송호정, 「고조선의 문화와 사회 경제」, 『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ko_001_0090_0010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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