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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구,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 한국고대사연구 46, 2007>
그 많던 고구려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4>
-고구려의 종족 구성
고구려의 기본 종족에 대해선 고구려족, 혹은 부여족, 혹은 맥족, 혹은 예맥족 등이 여러 용어가 혼용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사한 특정한 종족집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기원 전부터 이미 구려(句驪)라는 종족명이 등장하는 이상 고구려족이란 표현으로 족하다는 견해가 있는가하면 고구려 왕실의 기원이나 삼국사기의 졸본부여 같은 표현에 유의해서 고구려 종족을 부여족의 일파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 사료에서는 고구려에 대해 맥인(貊人)이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며, 예맥(濊貊)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 고구려의 기본 종족은 예맥족(濊貊族)
이 같은 여러 종족 명칭 중에서 현대 이후 사학계에서 고구려의 주 종족집단을 지칭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종족명은 바로 예맥족이다. 문헌사학계에서는 선진시대에 요하 동쪽은 기본적으로 예맥족이라는 동일종족의 거주지이며 고조선뿐만 아니라 부여, 고구려도 모두 이 예맥족의 국가였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요하 동쪽 지역은 모두 예맥족의 거주지역이며 고구려도 그 같은 예맥족의 일파가 세운 국가라는 것이다.
선진시대에 요하 이동에는 모두 예맥족이라는 동일 계통의 주민집단이 전체적으로는 요령식 동검문화권 내에서 지역적인 특색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건국 이전에 이 지방에 이미 강력한 토착세력이 집결되어 있었던 것은 이곳에 군재하는 탁자식(북방식) 지석묘의 존재로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혼하 유역에서 길림성 일대에 이르러 지석묘, 석관묘와 미송리형 토기, 서단산 문화를 영휘한 세력은 문헌에 보이는 예맥족으로 비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중략)
현재까지의 연구성과에 의할 때 요동 일대에 펼쳐진 지석묘, 석관묘, 미송리형 토기문화, 요령식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대체로 예맥족일 것이란 점에서는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송호정, 고구려의 족원과 예맥, 고구려연구 27, 2007>
같은 입장을 연세대 박준형씨의 논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임운 등을 필두로 한 중국 고고학계에서도 요하 이동의 청동기 문화는 기본적으로 예맥족의 것이란 주장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예맥은 한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주민집단을 이루었으며 이후 고조선의 성장 발전과정과 동반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예맥은 부여, 고구려 등이 성장할 수 있는 종족적 기반을 이루었다. 이처럼 예맥은 한국고대사의 전개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박준형, 예맥의 형성과정과 고조선, 학림22, 2001>
다만 예맥족의 의미와 기원 문제와 관련해 1) 예족과 맥족이 구별되는 별도의 종족이라는 견해,2)원래는 구별되지만 광범위한 혼혈과 융합 과정으로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단일한 종족집단을 구성했다는 견해, 3) 예맥족 두 글자로 붙여서 불러야 완전한 명칭이며 예족 혹은 맥족은 줄임말에 불과하다는 견해 등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예맥족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학설적 대립에 관계 없이 넓은 의미의 예맥족이라는 범주에는 고구려, 부여, 동예, 옥저가 모두 포괄된다는 점에 대해선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중국측 사료들은 이들 4개 집단의 언어와 풍속이 대체로 동일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고구려가 부여, 동예, 옥저를 정복한 이후 시점에서는 굳이 각 종족의 기원적 특성을 따질 필요없이 예맥족이라는 단일개념만으로도 이들 지역의 종족을 포괄할 수 있다.
이외에 고구려가 중국 동이계 고이족과 관련됐다거나 고구려가 상나라를 세운 은족(殷族)의 후예라는 설, 하가점 하층문화를 세웠던 종족이 동진한 것이라는 중국 학계 일부의 주장 등에 대해선 논평을 생략하겠다. 이같은 주장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고구려의 주된 구성 종족이 예맥족이라는 대전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 예맥족과 한(韓)족의 상호관계
예맥족이 어떤 종족인지 그 정체성을 분명하기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 집단, 특히 한반도 중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했던 한(韓)족과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동북아 제 종족집단 중에서 예맥족의 위치는 여전히 불확실한 점이 많다. 특히 보다 더 민감한 주제는 예맥족과 한족(韓族)의 상호관계 문제다. 다만 예맥족과 한(韓)족의 상호관계는 고구려 유민사보다 더 거대한 주제이므로 이 글에서 결론을 내릴 생각은 없으며 주요 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려 한다.
중국, 일본 학자 들 중 일부는 오래 전부터 예맥족과 한(韓)족이 관련이 없다는 점을 주장해 왔다. 선교사인 헐버트는 삼한을 구성한 핵심적인 종족이 인도 드라비다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으며 이같은 남방기원설은 적지 않은 일본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 기본적인 관점은 고구려, 부여 등은 알타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한강을 경계로 그 남쪽의 한족은 남방계 종족이므로 한강 일대는 서로 상이한 종족집단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대 이후 언어계통론적 입장에서 한국어가 계통적으로 드라비다어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명확히 부정되고, 남북한 지역 사이에 형질인류학적 차이가 식별되지 않게되자 이같은 2원적 종족관은 힘을 잃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맥족과 한(韓)족의 상호 관련성을 부정하는 견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테면 중국의 손진기는 고조선,고구려,부여,옥저,발해 등은 기본적으로 예맥족의 국가이며 이들 예맥족은 동호-선비-거란,여진-숙신,실위-몽골 등과 구별되는 동북아의 독자적인 주요 종족집단임을 인정하면서도 예맥족과 조선족(한민족을 지칭)은 관련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孫進己, 東北民族源流, 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예맥족과 고대 삼한족, 현대 한민족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이같은 견해는 중국 학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예맥족과 한(韓)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견해는 주로 중국 사료에서 이들 두 종족 사이의 유사성을 긍정하는 어떤 직접적인 기록도 없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같은 학설들은 두 종족이 다르다는 직접적 증거를 제시하기 보다는 예맥족과 한(韓)족이 유사하다고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긍정하는 어떠한 문헌적 기록도 없다는 점을 주된 근거로 하고 있다.
이 같은 중국 학계의 입장과 달리 한국 학계에서는 한민족의 근간은 예맥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예맥족이 현대 한민족을 형성하는데 근간이 되는 핵심종족이라는 견해는 이병도 박사 이래 한국 학계의 통설적 입장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의 근간적 요소는 예맥족에서 비롯한다. 예맥족은 만몽계통, 토이기계통에서 공통한 먼 공통조상에서 분파된 일족이므로 해서 그 언어와 풍속 중에서 약간 서로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본다. 하여간 예맥족은 몽고족, 만주족, 토이기족, 즉 우랄알타이어 계통과 한 가지 오랜 기원을 가진 혈연적으로도 비교적 서로 가까운 일족으로 피차에 출입이 있던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병도, 한국사 고대편, 1961>
이런 통설적 주장들은 예맥족과 한(韓)족이 기본적으로 유사한 종족이라는 견해를 전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정배 교수는 예,맥,한(濊,貊,韓) 족은 거주지에 따라 약간 문화적 차이를 띄게 되었을 뿐 기본적으로 동일 종족내지 매우 유사한 종족으로 보고 있다.
다만 김교수는 신석기시대에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은 고 아시아족(Paleo-Asiatic) 계열이며 청동기시대 개시와 함께 알타이계의 예,맥,한족이 만주와 한반도에 진입, 종족 교체현상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은 고 아시아족의 후보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길랴크족을 지목한 러시아 E.A Kreynovich의 견해에 주목하고 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신석기시대에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은 길랴크족 내지 그와 유사한 고 아시아족이며, 청동기 시대 이후 기본적으로 유사한 3개 종족인 예,맥,한(濊,貊,韓)이 이주해 오면서 현재의 한민족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김정배, 한국민족문화의 기원, 고려대출판부, 1973 참조>
송호정 교수처럼 비교적 신진에 속하는 문헌사 전공자들도 한민족의 기원은 기본적으로 예,맥,한(濊,貊,韓) 3개 종족으로부터 비롯된다라고 주장해 김교수와 유사한 입장을 보여준다.
문헌상으로는 한민족과 관련된 최초의 종족으로는 예,맥,한(濊,貊,韓)족 외에 언급할 종족이 없다. (중략) 만주 남부 요령성 일대에서 살던 주민들은 일찍부터 농업경제와 청동기 문화를 영위하면서 문화적 우위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청동기 문화를 영위한 족속이 예,맥족이었다. 그리고 이들 만주 남부지역 주민집단의 일부가 이동하여 한(韓)족을 형성했다. (중략)
예,맥,한족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만주 중남부 지역과 한반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후예들이다. 그들간에는 거주지역의 환경과 청동기 문화의 수용의 시간적 차이 등에 따라 상당한 정도의 문화적 이질성도 지녔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같은 문화권에 속한 족속들로서 여타 주변지역의 주민집단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였다. 예,맥,한(濊,貊,韓)족은 동북아시아의 중국 동북부 만주 한국땅에서 오래 살았으며 체질상 하나의 유전집단을 이루고 다른 민족과 섞임이 적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결국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형성한 주민집단이 되었다. 이들 세 종족은 만주에서 한반도에 걸쳐 친연관계를 지닌 집단으로서 같이 어우러져 결국 한민족의 조상이 된 것이다. 다만 이들 세 종족의 친연성에 대해서는 그 당시의 활동성을 연구하여 분석한 결과가 없다. 따라서 이들 세 종족이 동일 조상에서 출발했다고 보아 한민족의 기원을 계속 추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예,맥,한(濊,貊,韓)족 이전에는 한민족의 조상으로 여러 인간이 있었을 뿐이며 그 이전의 고생인류가 있을 뿐이다.
<송호정, 한국인의 조상은 누구인가, 역사비평 46, 1999>
송교수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김교수의 주장과 유사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선 청동기시대 이후의 종족 교체를 부정하면서 예,맥,한족(濊,貊,韓)이 신석기시대 이래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 거주 종족이라고 보고 있다. 또 예맥한(濊,貊,韓)족이 체질상 하나의 유전집단을 이루고 기본적으로 친연관계를 집단이기는 하나 더 이상의 공통조상을 추적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중국 학계의 입장은 예맥족과 한(韓)족이 유사한 종족이라는 직접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 학계에서는 형질인류학적으로 남북한 간에 차이가 식별되지 않고, 고고학적으로 공유 요소가 많으므로 예맥한(濊,貊,韓)족은 기본적으로 유사한 집단으로 볼 수 있고 이들 세 집단이 섞여 한민족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맥과 한(韓)족의 상호관계에 대해선 현재 학계의 견해를 소개하는 수준에서 멈출 생각이며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원래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했던 고구려의 종족문제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고구려의 주류 종족은 예맥족이지만 한(韓)족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단계에서 한(韓)족도 고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광개토왕 비문에 백제를 공격하면서 예(濊)와 함께 한(韓)인 출신 포로를 언급하는 것은 그 직접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로선 멸망 시점의 고구려 영토 내에 한(韓)족 집단의 비율을 구체적으로 추정할 방법은 없다.
◆ 낙랑군 주민의 종족적 정체성
과연 고구려에 통합된 낙랑군과 요동군 주민의 종족적 특성은 어떤 상태였을까. 이미 오래 전부터 낙랑군 내 중국 한(漢)계 유이민과 토착 종족의 비율에 대해선 학계의 논쟁이 치열했다. 우리 학계의 일반적 입장은 문헌사료나 고고학적 증거자료로 볼 때 낙랑군 설치 이후에도 그 내부에는 여전히 토착 종족이 주류를 점했다는 것이다. 중국 한나라가 이종족 거주지역에 변군을 설치한다고 해서 이종족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았다는 수많은 사례와 함께 낙랑 고분에서 한나라와 관련이 없는 북방적 요소가 농후한 유물틀이 출토되는 점이 우리 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우리 학계의 입장은 최근 낙랑목간 덕분에 더욱 보강받게 됐다.
3년 전 윤용구 학예실장은 북한 학계에서 소개한 낙랑목간을 기초로 낙랑군 내에 한(漢)계와 토착 종족의 비율의 구체적 수치를 공개에 학계에 큰 충격을 줬다. 윤실장의의 소개에 따르면 2006년 이전 특정 시점에 북한 평양 락랑구역의 한 목곽묘에서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라는 이름이 붙여진 목간이 출토됐다.
지역별 | 호수 | 구수 | 호당 구수 |
낙랑군 직할 | 3만1808호 | 17만9393명 | 5.64명 |
낙랑군 남부도위 | 7353호 | 5만1167명 | 6.95명 |
낙랑군 동부도위 | 6795호 | 4만9440명 | 7.27명 |
소계 | 4만5956호 | 28만 | 6.09명 |
<윤용구,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 한국고대사연구 46, 2007>
윤실장의 소개에 따르면 전체 28만명 중에서 4만이 중국 한(漢)계이며 나머지 24만이 토착 종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목간 자체에 토착 종족이란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단어로 적혀 있었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후보는 토인(土人), 이인(夷人), 예인(濊人) 등인데 토착 종족이란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목간 자체에는 토인(土人)이란 표현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여하간 당시 낙랑군 전체 인구 중에 86%가 토착 종족이며, 한(漢)계 종족은 14%라고 할 수 있다.
이 호구 통계가 작성된 시점은 초원4년 다시 말해 기원전 45년이다. 이후 고구려가 4세기에 낙랑군을 정복할 때까지 한(漢)계 종족과 토착인의 비율이 어떻게 변화가 되었는지 살펴 볼 직접적 자료는 현재로서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전한 말기 낙랑군 지역도 한때 군현 지배 체제가 거의 붕괴될만큼 대혼란을 겪었고, 광무제 재위시 해상으로 낙랑군 지역으로 병력을 투입해 군현 지배 체제를 복구한 이후에도 환령말 군현 지배가 다시 약해졌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낙랑군 지역의 군현 지배체제는 그리 강고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였다면 중국 한(漢)계 이주민이 낙랑군 지역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고 가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기존 토착인 중에 종족적 정체성을 점차 상실하고 한(漢)계에 문화적으로 동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고구려가 정복한 낙랑군 주민의 종족적 기원이 기본적으로 한(漢)계보다는 토착계가 다수였다는 점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낙랑군의 토착계 주민, 다시 말해 고조선의 핵심 종족에 대해서는 예사두국 등 일부 군현에 예라는 종족명이 관칭된 사례 등을 기초로 예족이 주류였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다. 물론 몇가지 이견이 있긴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지역 주민이 넓은 의미에서 예맥족의 범주에 속하는 종족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일치한다.
결국 고구려가 정복한 낙랑군 주민 중 86% 가량은 예맥족, 다시 말해 고구려와 동일한 종족집단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구 낙랑군이 어느 정도의 문화적 한화(漢化) 현상을 겪은 지역임에도 고구려가 훗날 결국 이 지역으로 수도를 이전할 수 있었던 것도 기본적으로 이 지역 주민이 고구려와 동일한 종족적 기반을 가진 집단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요동군 주민의 종족적 정체성
낙랑군의 경우와 달리 요동군은 순수 한족의 거주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이미 설명했듯이 선진시대 이래 요하 이동지역은 원래 예맥족의 거주지역이었다. 연-진-한에 걸친 파상공세로 요하 이동지역에까지 중국 세력이 진입했으나 이로 인해 꼭 요하 이동지역에서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족교체현상이 발생했다는 증거는 없다. 낙랑군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의 영토화 이후에도 토착 종족 중 일부가 계속 거주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요동군에 중국 한(漢)족 뿐만 아니라 이질적 종족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권오중 교수다. 권교수는 요동군의 군현 체제에 대한 분석과정에서 부도위(部都尉)의 존재에 주목한다. 동양사학계에서 전한대의 부도위의 정확한 실체에 대해선 아직 다소 이견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민족 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군 예하 조직이란 점에 대해선 의견이 수렴되고 있다. 전한대의 요동군에는 중부, 동부, 서부 도위 등 3개 부도위가 존재하는데 이는 결국 전한대까지 요동군 내에 이민족 거주 지역이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권오중, 한대 변군의 부도위, 동양사학연구88, 2004, 참조>
권교수는 2005년에 더욱 정교하게 요동군 내의 이민족 문제에 대해 접근한다.
중국이 요동군에 부도위를 설치한 것은 군에 거주하는 이민족 주민을 특별히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부도위의 개설이 중부, 동부, 서부의 세 지역으로 나타남을 보면 요동군의 종족 구성이 복잡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요동군 부도위의 역사는 한 문제가 조선지역에 군현을 설치하기 이전으로 소급하지만 낙랑, 현도군처럼 동이제족을 관리하기 위한 군현이 개설된 이후까지 부도위를 존치시킨 것은 요동군의 이민족 문제가 특수한 상황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권오중, 요동군 중부도위와 고구려의 신성, 2005>
권교수는 특히 한대 요동군 중부도위-현도군 지역의 비한족 거주의 고고학적 증거로 석대자 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계 토기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고구려 건국 초기와 비슷한 문화유형에 속하는 유물이 이 지역에서 출토된 것은 영토적 귀속과 관계없이 고구려와 유사한 종족집단이 요동군 중부도위-현도군 지역에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이해한다.
물론 이같은 주장들이 요동지역에 한(漢)계 종족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전면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연나라 이후 중국은 요동지역에 지속적으로 거점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연-전한-후한계 고분의 존재로도 증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지역의 주민이 100% 한(漢)계는 아니었으며, 원래의 거주민이었던 예맥족이 상당기간 그 종족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권교수 주장의 핵심이다.
중국 사료에서 요동군 주민의 종족적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부 사료들은 전한대 뿐만 아니라 후한대를 거쳐 중국 삼국시대 등 훨씬 후대에도 요동에 이질적 종족이 존재했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위나라와 오나라가 요동의 공손씨와 다툴 때의 기록들이다. 사마의는 요동의 공손씨를 공격할 때 요동에 대해 이역(異域), 절역(絶域)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같은 표현들이 단순히 요동군이 중원지역과 매우 멀리 떨어진 변방지대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모종의 문화적 격차, 특히 종족적 격차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추정하게 하는 기록이 자치통감에서 확인된다.
서기 233년 요동의 공손연은 오나라 손권이 보낸 사신을 처형해 그 머리를 위나라로 보냈다. 손권은 공손연의 배신에 격분해 "설령 실패한다고해도 한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며 요동 공격을 결심한다. 이에 대해 손권의 신하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군사적으로 성공할 가능성도 없을 뿐더러 설령 요동을 점령한다해도 유지가 힘들어 오히려 애물단지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요동공격을 반대했던 오나라 상서복야 설종의 상소문에는 묘한 구절이 있다.
"지금 요동은 융맥족이 사는 작은 나라입니다. 성벽의 굳기나 방어하는 기술도 잘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기계도 가볍고 둔탁하고 개나 양처럼 아무런 정치다운 것이 없어서 가면 반드시 잡아 이길 수 있는 것은 진실로 밝으신 조서와 같습니다"
<자치통감 위기4 명제 청룡 원년조, 권중달 번역본 참조>
오나라 설종은 요동은 한족이 아니라 융맥족의 국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료를 단순히 요동의 공손씨를 비하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해석할 여지도 있지만 요동군에 이종족 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권오중 교수의 주장이나 위나라에서도 요동을 놓고 다른 세계라고 표현한 사례 등을 아울러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요동군 주민의 종족적 정체성이 복잡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근거를 놓고 본다면 요동군의 상층부 주민은 대부분 한(漢)계일 가능성이 높다 할지라도 주민 중에는 적지 않은 예맥계 주민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같은 이질적 종족집단은 중국 삼국시대에까지 어느 정도 종족적 특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 고구려의 종족별 구성 비율
고구려의 인구를 논한 글에서 고구려의 정복과정에서 고구려 3만호 외에도 부여 8만호, 동예 2만호, 옥저 5000호가 통합되어 고구려 인적 자원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들 집단을 합치면 13만5000호가 되며 호당 5명이라는 가정적 수치를 동일하게 적용할 경우 67만5000명이 된다. 이들 4개 집단은 기본적으로 예맥족의 범주에 속하므로 고구려 인구중 최소 67만5000명은 예맥족 계통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고구려가 낙랑군과 요동군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약 58여만명의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되었음도 이미 언급했다. 낙랑군의 경우 전한대를 기준으로 예맥족일 가능성이 높은 토착계 종족의 비율이 86%라는 낙랑목간이 확인됐다. 같은 비율이 후한대에도 유지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구 낙랑군에서 예맥족의 숫자는 21만5000명이 된다. 현도군의 경우에는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만이의 거주지역이라는 기록이 존재하므로 후한대 현도군 인구에 낙랑군과 동일한 토착인 비율을 적용할 경우 3만4400명이라는 수치를 얻을 수 있다.
현재의 사료로는 요동군에 거주했던 예맥족의 비율을 특정한 숫자로 제시할 방법은 없다. 예맥족이 더 적었을 경우(25%), 예맥족과 한(漢)계 주민 비율이 비슷했을 경우(50%), 예맥족이 더 많았을 경우(75%) 등 세 가지 가정에 기초해 계산할 경우 요동군 내 예맥족의 숫자는 각각 7만, 14만, 21만이 된다. 이 경우 낙랑-현도-요동군의 예맥계 종족의 숫자는 31만9400명, 38만9400명, 45만9400명이 된다.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 멸망 당시 순수 고구려인의 비율이 75만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상의 결과로 볼 때 요동군과 낙랑군의 주민 중 다수를 한(漢)계 종족집단으로 보고 그런 전제하에 고구려 멸망 때 그 영토 내에 순수 예맥족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보는 중국 학계의 주장은 그리 신빙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요동군, 낙랑군까지 점령한 시점의 추정 인구 125만명 중에서 예맥계 종족의 비율은 적게 잡아도 99만4400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시점의 한(漢)계 종족집단의 비율은 최대치(요동군 한계 75%로 가정)로 잡아도 25만5000명 내외 정도였을 것이다. 비율상으로만 보자면 고구려 총인구 중에서 한(漢)계 종족의 비율은 최대로 잡아도 1/5 정도가 된다. 예맥계가 요동군 지역에서 오히려 다수(요동군 예맥족 75%로 가정)였다면 추정 인구 125만명 중에 예맥족은 113만4400명이 된다. 이 경우 한(漢)계 종족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10 정도가 된다.
-이처럼 고구려에 정복된 구 요동군에서 한(漢)계 종족의 비율을 75%로 가정하고, -계산의 편의를 위해 125만명 외에 추가로 고구려 영토 내에 편입(이주,정복)된 인구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한(漢)계가 예맥족에 동화되는 현상을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면 고구려 인구가 약 0.2% 수준의 인구성장율로 증가해 315만에 도달했을 때 252만명이 예맥계, 63만명이 한(漢)계라는 예시적 수치가 나온다. 한(漢)계 종족을 최소치로 볼 경우 283만5000명이 예맥계, 31만5000명이 한(漢)계라는 예시적 수치가 나온다. 물론 이같은 이같은 수치는 여러 차례 가정적 전제를 제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인구와 종족 문제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시적인 시도이며 어떤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 세줄요약
-고구려의 기본종족은 예맥족이다.
-구 낙랑군 주민 중 86%가 예맥족이며, 구 요동군 주민 중에도 예맥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구려가 요동군, 낙랑군을 점령한 시점의 추정 인구 125만명 중에서 예맥계 종족은 최소 99만4400명이며, 멸망 당시 315만 명 중에 예맥족의 추정 인구는 최소 252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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