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cmuseum.busan.go.kr/servlet/Download?fpath=/seminar/bcmuseum/&name=%BE%E7%BD%C3%C0%BA.pdf (문서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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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남한의 고구려 성
 
1. 유적 개관
 
남한에서 가장 먼저 발굴조사된 고구려 유적은 1977년에 조사된 서울 구의동보루이지만 한동안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되지 못하다가, 1988년에 백제의 옛 도성이었던 서울 몽촌토성 발굴조사에서 고구려의 대표적인 토기인 사이장경옹과 고구려 건물지가 확인되고 나서야 남한에도 고구려 유적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서 주로 서울과 경기 북부 지역에서 고구려 산성 유적들이 지표조사를 통해 보고되었고, 1997년부터는 한강유역의 아차산 4보루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남한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정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남한에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 성은 크게 임진강·한탄강 유역(연천), 양주 분지 
일대, 아차산 일대(서울), 금강 유역(충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임진강 유역의 호로고루는 임진강 본류와 개울에 의해 형성된 삼각형 형태의 해발 
28m의 현무암 절벽 위에 한쪽면을 막아서 만든 강안 평지성이다. 성벽 전체 둘레는 400m이며, 그 중 동쪽면만 성벽을 쌓아 성으로 활용하였다. 현재 축조되어 있는 석축 성벽 아래에서는 목책열이 확인되고 있어, 호로고루는 2중 구조의 목책성으로 먼저 활용되다가 6세기 중엽 경에 석축성으로 전환되었음이 밝혀졌다. 동벽의 구조를 살펴보면 성벽의 기단부와 중심부는 점토와 마사토를 이용하여 판축하였고, 이후 성벽의 내외면을 다듬은 성돌을 이용하여 쌓아올렸다. 성 내부에서는 석축 우물 및 기와가 올려진 지상 건물지, 그리고 지하식 석축 벽체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중요 유물로는 착고,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각종 기와, 고구려의 모자(절풍모)와 비슷하게 생긴 소형 토제품과 토제 벼루 및 저울추 등이 있으며, 2009년에는 ‘相鼓’ 명문이 새겨진 토제품이 출토되어 관심을 끌었다. 출토 유물을 통해 호로고루는 임진강 유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연천의 당포성과 은대리성 또한 호로고루와 입지가 유사한 삼각형 형태의 강안 평지성이다. 이 밖에도 연천 무등리2보루에서는 고구려 찰갑 1셋트가 출토되어 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삽도 7. 연천 호로고루와 출토 유물

한편, 양주 일대에도 고구려 산성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다음으로 한강유역의 아차산 보루군은 남한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아차산 보루군은 475년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지금의 서울)을 점령한 이후에 축조되었으며,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이 서울을 다시 차지하는 551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20여기에 가까운 보루들이 산줄기를 따라 분포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7기(구의동보루, 홍련봉1,2보루, 아차산 3보루, 아차산 4보루, 용마산 2보루, 시루봉보루)가 발굴조사 되었다. 이 외에도 한강 남쪽에 당시 백제의 성이었던 몽촌토성을 고구려가 재활용하여 사용함으로써 고구려 건물지 및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아차산 보루군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체로 2중의 목책을 먼저 설치한 다음,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 보루는 성벽 전체의 둘레가 약 200~300m 가량이다. 성벽은 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우선 경사면을 정리하여 석축을 쌓으면서 그 안쪽을 흙으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시루봉보루의 경우 외곽의 목책 바로 바깥쪽에 성돌을 쌓고 있어, 목책을 석축성벽을 축조할 때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은 1~1겹의 성돌로 정상부의 평탄면까지만 쌓아 올려 부족한 생활공간을 확충하였다. 병사들이 생활하는 대부분의 건물지는 성벽의 뒷채움 흙 위에 축조되었다. 각 보루에는 방어의 강화를 위해 여러 개의 치(雉)가 설치되고 있는데, 치는 보통의 성벽보다 견고하게 축조되는 것이 특징이다. 치가 설치된 부근의 성벽 또한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볼 때, 방어적인 목적 이외에도 체성벽을 지지하는 보축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용마산 2보루나 아차산 4보루, 시루봉보루에서는 2~3중 구조이거나 또는 체성벽과 떨어져 있는 등 특이한 구조의 치가 확인되고 있는데, 용마산 2보루에서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지로 출입하기 위한 나무사다리가 확인된 예가 있어, 방어가 강화된 이러한 치가 출입시설의 역할도 함께 담당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최근 시루봉보루에서는 성벽 외곽에 다시 2중으로 길게 석축을 한 구조물(석축 높이 1m 이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한편 보루 내에는 수원(水源)이 없으므로, 성 내에 암반을 파고 뻘을 이용하여 방수
처리를 하고 다시 바깥부분에는 통나무를 쌓은 저수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성 내에는 큰 비가 내렸을 때 원할한 배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벽을 포함한 산성의 여러 시설물들이 파괴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전 대비책의 일환으로 석축으로 된 배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러한 배수시설들은 성 전체에 설치되어 있는데, 특히 건물지의 기단 석축 아래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보루 내 구조물의 축조시 배수로가 가장 먼저 설치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성 내부에서는 일부 수혈건물지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방형이나 장방형 지상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수혈 건물지의 경우에는 벽면에 탄화된 판재가 가로로 길게 확인되는 것을 볼 때 판자벽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상 건물지는 우선 석축으로 건물의 기초를 삼고 그 위에 점토와 초본류를 섞어 만든 벽체를 올린 담장식 벽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에는 대체로 1개 이상의 쪽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철기,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우선 철기로는 투구를 비롯한 갑옷편, 칼, 창, 화살촉, 도끼 등과 같은 무기류와 재갈, 등자, 행엽 등과 같은 마구류, 호미, 삽, 낫, 쇠스랑, 가래, 끌, 착, 망치, 철기 제작용 단조 집게 등 다양한 농공구류, 철솥, 철호 등 생황 용구 등이 확인되었다. 토기로는 호, 옹, 동이, 시루, 접시, 완을 비롯한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었다. 일부 토기에는 ‘冉牟兄’, ‘支都兄’, ‘後部都○兄’, ‘下官’, ‘庚子’, ‘官瓮’, ‘大夫井大夫井’ 등 명문이나 부호가 새겨져있다. 홍련봉 1보루에서는 연화문 와당 6점과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어,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삽도 8. 아차산보루군과 시루봉보루 항공사진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사이전연호(몽촌토성)  토기 각종(용마산2보루) 명문접시(아차산4보루)




 쇠솥과 시루(구의동보루)  투구(아차산4보루)  와당(홍련봉1보루)
삽도 9. 아차산 보루군 출토 유물 각종
 
이 밖에도 금강유역에서는 청원 남성곡산성과 대전 월평동 목책 유적이 있다. 남성골산성은 2중 목책성으로, 동문지만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및 북한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고구려 목책성으로, 산성의 전체 둘레는 360m 가량이다. 산성에서는 목책으로 이루어진 치도 확인되어 목책 단계에서도 치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온돌이 딸린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출토 유물 및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5세기 중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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