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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 gosilec@lec.co.kr 승인 2014.07.16 11:22:59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학원 한국사 강사
이번 회에는 삼한 즉, 마한,진한,변한의 성립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중시된 삼한은 삼한 정통론으로 이어졌다.
1948년 성립된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삼한 정통론에 영향으로 ‘한(韓)’을 강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참고로 이북에서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조선인’‘조선말’‘조선반도’라고 사용한다. 그럼 우리 현재 국호에 영향을 준 ‘삼한’ 각각의 성립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자.
마한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삼국지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된 노역을 피하여 한국(삼한)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진시황제의 진나라 시대에 이미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마한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 이 지역에서 세형동검 등이 발굴되면서 고고학적 성과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그럼 이미 진나라 진시황제 시대부터 존재했던 마한은 언제 어떻게 형성이 되었을까.
1980년대까지는 마한의 성립을 기원전 3~2세기 서남부 지역의 세형동검 문화를 배경으로 한 토착 정치 집단의 점진적인 발전 결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 조선시대 역사학자들이 주장했던 삼한정통론과 1950년대까지 『후한서』를 중시했던 입장에서는 이른바 ‘기자조선’의 혈통인 준왕 집단이 마한으로 망명하는 연결선상에서 삼한의 성립 과정을 추론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토착 집단이 발전한 것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고조선 유민의 남하로 성립되었다는 설이 등장하였다. 즉,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 멸망 및 한사군의 설치로 인한 조선 유민의 남하를 마한 성립의 계기로 주목하는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초 준왕이 위만의 왕위 찬탈로 쫓겨나 마한 지역으로 망명한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보다는 위만조선 유이민의 남하 및 낙랑군과의 교류를 통해 철기문화가 본격화된 기원전 2세기 말 이후를 더욱 주목한다.
진한은 또 어떻게?
삼국사기에 의하면 위만조선의 유민은 삼한 가운데에서도 특히, 진한을 성립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첫머리에는, “혁거세가 서나벌을 세우기 전에 ‘조선유민’이 산과 계곡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위만조선의 유민이 진한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삼국지에는 옛날 망명자들이 삼한으로 들어와 그 동쪽 지역에 정착하여 진한을 세웠고, 진(秦)나라 사람들과 유사하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진한의 사람들은 중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진한의 연원을 중국 동북 지역에서 찾는 경향은 신라 말기 학자 최치원에게서도 확인된다. 『삼국유사』 진한조
그리하여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진한을 진나라의 유민들이 세운 망명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놈의 이른바 ‘동북공정’은 ‘망명 정권’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삼한의 역사도 날조하고 있는 것은 현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대로 기원전 3세기 말에 진나라 사람들에 의해 진한이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진한과 진국(辰國)이 시기적으로 중첩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전편에서 살펴 보았듯이 『삼국지』의 기록에는 “한에는 3종 즉 마한, 변한, 진한이 있고 그 가운데 진한이 옛날의 진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국은 기원전 2세기 말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3세기에 진한이 먼저 성립되었다고보면 『삼국지』에 기록된 선후관계(진국→진한)가 뒤집히는 모순관계가 발생한다. 또한 진한 지역에서는 중국계 철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중국 망명인이 진한을 세웠다는 기록은 시공간적으로 그 중간에 위치한 ‘위만조선’의 존재를 염두에 둘 때 문제가 풀린다. 기원전 3세기 말 이래 중국 동북 지역에서 들어온 유민들이 조선으로 많이 망명했다는 사실은 위만의 망명 사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위만과 함께 망명한 주민들 중에는 중국계도 다수 포함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 멸망 이후 남하하여 진한을 세운 유민들 속에는 이들 중국계도 있었을 것이다. 즉, 이들 중국계 유민들이 진한 성립에 기여하면서 중국에서 온 망명인들이 진한을 세웠다는 식의 주장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진한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 이후부터 혁거세가 사로 6촌을 세운 기원전 57년 사이에 성립되었다고 보면 타당할 듯 하다.
그렇다면 변한은?
변한은 진한과 의복, 주거, 언어, 법속 등이 동일하여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이는 지석묘와 기타 유물이 진한과 거의 비슷하게 출토되는 것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변한의 성립 시기를 나타내주는 문헌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가락국의 수로왕이 ‘기원후 42년’에 즉위했다고 했다. 또 다른 사료 『위략』의 염사치 기록에 의하면 기원후 20~23년 사이에 ‘변한포(弁韓鋪)’라 하여 변한의 특산물이 보이고 있으며, 『삼국사기』 혁거세 19년(기원전 39년)에는 “변한국이 항복해왔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38년(기원전 20년)에도 ‘변한’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참조하면 변한은 기원전 1세기 후반 이전에 성립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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