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624
삼한의 기원과 국가 형성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 gosilec@lec.co.kr 승인 2014.07.09 11:11:27
오태진 | gosilec@lec.co.kr 승인 2014.07.09 11:11:27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학원 한국사 강사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고증 노력과 연구는 밝혀진 것보다 타임머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더 많다.
그리하여 상고사 및 고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은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그 상상력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연구가 어렵다. 우리 조상들이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 분명한 우리 상고사에 대한 내용은 남겨진 것이 없기에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상고사, 고대사 연구자들은 단 한 글자, 한 편의 유물을 통해서 사실(事實)에 접근하고자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가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왜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사실도 분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먼저 번의 칼럼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삼한(三韓)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혹시 예리한 수험생들 중, 눈치 챘을 지도 모르지만 삼한에 대한 교과서 서술은 동시대의 부여, 옥저, 동예보다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알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남겨진 기록이 많다기보다는 정통성을 둘러싼 남한과 북한의 체제 경쟁의 일환이기도 하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수험생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북쪽인지 남쪽인지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 회부터는 삼한에 대해 집중 탐구를 한번 해보기로 하겠다.
명칭 문제 - 진국(辰國)(?), 중국(衆國)(?)
이 시기, 우리 민족 스스로 남긴 역사서가 없기에 우리 학자들은 중국인들이 남긴 역사서를 통해 우리 역사를 연구한다.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삼한 중 진한(辰韓)의 전신으로 진국(辰國)이 먼저 있었다고 한다.
진국은 기원전 1세기 초에 편찬된 『사기(史記)』조선열전부터 등장할 정도로 역사적 유래가 오래되었다. 『사기』에 의하면 위만조선 말기(기원전 2세기 말)에 ‘진번 옆의 진국(眞番旁辰國)’이 위만조선을 통해 한(漢)에 입조하려 했으나, 조선의 우거왕이 길을 막아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기』의 현재 통행본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보는 책에는 진국이 중국(衆國) 중국(中國)이 아님. 당황하거나 넘겨집지 말 것.이라 되어 있어, 그 동안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김정배, 2000
특히, 일본학자들은 『사기』를 근거로 진국을 실제가 아닌 관념의 소산이라고 주장하였다. 현재 『사기』통행본의 판본들은 모두 남송(南宋) 경원 2년(1196)에 황선부(黃善夫)에 의해 만들어진 이른바 남송 황선부본(本)을 모본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알고 읽고 있는 『사기』에는 한결같이 그것을 그대로 따라 중국(衆國)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진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판본은 일본 경도대학 소장 백납본, 일본 동북대학 소장 경장본 인용 정의본, 『교간사기찰기(校刊史記札記)』인용 송본 등 현재까지 3종이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남송 이전의 북송본(北宋本)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서지학적 상황 때문에 북송 때까지는 원래 ‘진국’이었다가 남송 때 ‘중국(衆國)’으로 잘못 변개된 이후 그 오류가 통행본까지 답습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북송 초인 983년에 편찬된 『태평어람』에는 역시 “사기에 이르기를, … 진번 옆의 중국(史記曰 … 眞番旁衆國)”이라고 되어 있어, 북송 때까지는 진국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던 통설과 배치된다.
『사기』의 원문이 ‘衆國’이 맞는다고 가정할 때, 기원전 2세기 말 당시 진번의 근처에는 여러 개의 국(國), 즉 나라가 분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세기 후반에 편찬된 『한서』조선열전에는 『사기』와 다르게 ‘방(旁)’자가 빠진 채 ‘진번진국(眞番辰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러므로 ‘진국(辰國)’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즉, 『사기』와 『한서』의 기록을 종합하여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진번과 함께 여러 개의 ‘국’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저명하게 알려진 대표적인 국이 바로 진국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진국의 위치
(1) 문헌상에서 파악되는 위치
『사기』나 『한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진국의 위치를 비정해 보면 진번의 옛땅이었던 황해도 근처의 한강 하류 지역에 비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노중국, 1987천관우, 1989
그러나 5세기에 편찬된 『후한서』에는 진국이 삼한 전부의 전신이라고 하여, 마치 진국이 삼한 고지 전역에 걸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지금의 우리 교과서와 북한의 사회과학원 력사 연구소는 삼한 성립 이전, 한강 남쪽 지역에는 진국이라는 통일된 국가가 있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2) 유물 조사로 파악되는 위치
한편 고고학적으로는 남한 지역에서 세형동검 문화가 가장 번성했던 금강 유역이 진국의 고지로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해 공주 봉안리,부여 합송리,장수 남양리 등 기원전 2세기의 초기 철기 유적이 발견된 금강 유역은 남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철기 문화를 받아들인 선진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정치 세력의 존재를 시사하는 위세품(presige goods)인 중국제 전한경(前漢鏡)이 익산 평장리, 공주 공산성 등에서 출토되는 점을 보아도, 기원전 2세기 금강 유역은 정치, 문화적으로 가장 앞섰던 지역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 남한 지역의 대표적 정치체였던 진국은 금강 유역 일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하겠다. 이처럼 최근에는 고고학 자료에 의해 진국을 마한의 고지에 비정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하여 마한의 역량을 흡수한 백제가 공주, 부여, 익산 등으로 수도를 옮겼던 사실을 토대로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렸던 백제의 저력이 이곳으로부터 나왔다고 가정해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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