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2809
※ 주(註)
임진왜란 때 귀화한 두사충과 대명동(大明洞)
계산동(桂山洞) 일대 뽕나무 골목은 두씨들의 세거지....
01.05.24 10:58 l 최종 업데이트 01.05.24 11:54 l 배철현(rpm8118)
대구시내에서 경산으로 통하는 대로변(수성구 만촌동 716번지) 남부정류장에서 도보로 15분 거리 오른쪽 형제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 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 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고 한다. 임난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 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 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한문으로 쓴 그 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성남쪽 타향의 밝은 달아래
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시의 내용을 보면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내용이 잘 드러난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이때부터 계산동(桂山洞)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天子)쪽을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현재의 모명재(慕明齋)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萬東門) 역시 백천유수필지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 주(註)
1. 군진(軍陳) : 군대가 전투에 대비하여 펴는 진영(陳營)
2. 계좌정향(癸座丁向) : [집터나 묏자리 따위가]계방(癸方)을 등지고 정방(丁方)을 향해 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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