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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 (杜師忠)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참가한 명나라의 장수.
전쟁이 끝나자 명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귀화했다. 왠지 민간에서는 군공보다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더 유명한 사람이다.(…)
명군에서는 지형을 살펴 진을 칠 곳을 정하는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로 일했다고 한다.
두보의 후손으로 두보의 21세손이다.[1] 진린 도독과 인척지간으로 두사충은 진린의 처남이었다. 이순신과 매우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두사충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시를 써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去同甘苦 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
東來共死生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城南他夜月 성 남쪽 타향의 밝은 달아래
今日一盃情 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이순신이 죽은 뒤에 묘자리를 처음 봐주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 두 아들을 데리고 조선에 왔다. 아내가 조선에 가는 것을 싫어해서 아내는 고향에 남겨두었는데 두사충이 조선에 남게 되면서 그대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진린에게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고 한 다음 압록강까지 배웅을 하고 조선에 돌아와 그대로 귀화하여 정착했다.
대구에 정착했으며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였는데 이것은 현재 대구 남구 대명동과 도시철도 대명역의 유래가 되었다. 경주에도 대명동이 있는데 이 역시 왜란 때 명나라에서 귀화한 시문용이 살았던 곳이다. 두사충은 사후 현재 수성구 만촌동에 묻혔으며 지금도 무덤이 남아 있다. 생전에 늘 단을 쌓고 매일 초하루마다 고국의 천자에게 배례를 올렸다고 하며 지금도 무덤 앞에는 명나라를 기린다는 뜻에서 모명재(慕明齋)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현재 두사충의 자손은 100여가구에 달한다고 하며 모명재 앞에는 이순신의 7대손 삼남 수군통제사 이인수가 두사충의 묘비문을 다시 베껴다가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타국에 와서도 사당까지 지을 정도면 고국를 많이 사랑했던 듯한 사람인데 귀화를 택한 이유는 아리송하다. 만력제 시대에 명나라에 망조가 드는 걸 보고 나라가 오래 못갈 것을 예상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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