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sshJg3

구루시마 미치후사 (来島通総)
(1561 ~ 1597)

전국시대의 무장. 구루시마 미치야스의 삼남.

아버지 구루시마 미치야스가 죽자 형인 도쿠이 미치유키는 도쿠이 씨를 사용해 1567년에 미치후사가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코노 가문을 섬기고 후계자가 없어서 코노 미치나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코노 가문의 내분, 자금 횡령 등의 문제로 1570년에 반기를 들었으며, 모리 가문에게 접근해 모리 가문이 오토모 소린을 공격하자 모리 가문에게 원군을 파견했다.

1576년에는 가신 무라카미 요시츠구를 파견해 제1차 키즈카와 전투에서 오다 가문의 수군을 무찔렀으며, 158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유로 오다 가문에 항복했지만 모리 가문에서는 우라 무네카츠 등을 시켜 구루시마를 공격하자 대항하지 못하고 히데요시의 장수가 되어 활약했다.

1584년에 구루시마 수군으로 복귀했다가 1585년에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에서 선진에 서서 종군했으며, 이요 국의 노마, 카자하야군 내에서 1만 수천 석의 지행을 수여받았다. 1587년에는 큐슈 정벌 때 모리 가문 휘하에 속해 부젠 국의 우루츠 성을 공격하고 1590년에는 오다와라 정벌 대 구키, 카토 가문 등과 함께 수군을 편성해 오다와라 성을 해상에서 공격했으며, 1592년의 임진왜란, 1595년의 정유재란에 참전했지만 1597년에 명량 해전에서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명량의 물살 변화와 이순신의 지휘로 미치후사가 탄 대장선은 난전에서 격파당해서 전사했다. 더욱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골포에서 투항했던 항왜 준사가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마다시(馬多時)[1]의 시체를 알아보았다. 이순신은 부하 김돌손을 시켜서 마다시의 시체를 건져냈고, 준사가 마다시의 얼굴을 보고 그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순신은 그 시체를 토막내어 걸어서 일본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후 형인 미치유키[2]는 자식을 남기지 못해서 그 후손은 아예 단절되어 버렸고, 미치후사의 집안은 차남이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일시 가담하는 바람에 도쿠가와에 의해 산간 지방으로 영지를 이전당했다. 에도 막부 말기 죠슈번 번사로 금문의 변 때 모리군을 지휘했다 전사한 키지마 마타베는 그의 후손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유병준이 맡았다. 형인 구루시마 미치유키와 더불어 1인 2역. 명량 해전에서 일본군 선봉장을 맡아 돌격했지만, 이순신과 1:1 일기토를 했다가 패하고 목이 돛대에 걸리는 신세가 되었다.


영화 명량에서는 류승룡이 맡았다. 이순신의 주된 적수로 그려진다. 역시 여기서도 불멸 때와 동일하게 일본군 선봉장을 맡아 돌격했지만, 휘하 병력은 전멸하고, 자신은 이순신의 대장선에 올라타 그와 겨루려 했지만, 그전에 화살에 무수하게 맞아 고슴도치가 되고 준사에게 치명타를 입었다가 결국 이순신에게 참수당하고 목은 돛대에 걸린다.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나온다. 능력치는 기대하지 말자. 오죽했으면 이 게임에서 D급 능력치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놈보다 싸움을 더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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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다시의 정체에 대해서는 마타시로(又四郞)라 불리던 간 마사카게라는 설과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마다시로 보는 설이 있다.
 
[2] 웃긴 것은 구루시마 미치유키(도쿠이 미치유키)는 동생인 미치후사보다 먼저 죽었는데 당포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먼저 거북선으로 근접해서 미치유키가 탄 왜장선을 격파하는 도중에 미치유키는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적선에 올라타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왜장 도쿠이 미치유키가 죽자,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형제가 나란히 이순신에게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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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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