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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치열한 전투..철갑 등 전쟁유물 대량 출토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24>
중부일보 2010.07.05  남도일보 012.05.24 00:00

복원해 놓은 금산성


기반산저수지 호수가의 순환도로를 따라 호수 동북쪽에 이르면 길 한쪽 가장자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돌이 이룬 절벽과 뾰족뾰족한 암석이 많이 있는 가파른 산비탈이 이어진 곳에 ‘석대자산성’이라는 문화재 비석이 보인다. 금산성은 바로 이 산 위에 있다.

세상일은 참 무상하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 금산성은 점차 역사의 두터운 먼지 속에 파묻혀 있다가 20세기 1990년대에 와서야 현지 고고 발굴사업의 진전과 더불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0년 가을과 1991년 여름에 심양시 문화재관리사무실에서 각 지역 문화재사업발굴단의 야외 고고작업기능을 훈련시키기 위해 해당자들을 모집하여 석대자산성에 대하여 두 달 동안 시험적으로 발굴하였는데 집 터 하나, 돌 부엌 한 개와 재 구덩이 20개를 발견했고, 고구려 시기의 도자기, 철기, 골기, 석기, 동기 등 유물들이 출토됐다. 이것을 토대로 요령성 문화재 고고연구소와 심양시 문화재 고고대는 1997년 5월부터 함께 6개월 동안 석대자산성에 대한 첫 번째 공식 발굴을 진행했다. 그 결과, 흙에 묻혀있던 고구려산성 바깥 성벽과 커다란 치(적대, 마면이라고도 한다)들을 들어낸 뒤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를 확인했으며, 성벽 중간에 치 10개, 문터 4곳과 문터 밑의 배수로 1개를 발견, 정리해 놓았다.

이 고고팀은 그 후 1998년 6월부터 11월까지 이 성에 대한 제2차 공식 발굴에서 동·서·남·북 4개 성문터와 성문의 모양과 구조를 확인한 뒤 3개 문터에 완벽하고 과학적인 배수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밖에 고구려 시기의 철제 건축구재(鐵制建築構件) 문지도리와 문못, 문틀 등 매우 중요한 유물들이 출토됐다. 그 후 고고일꾼들은 또 산성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하나하나 전면적으로 발굴하였고, 또 주거지, 병영터, 전망대, 저수지를 중점으로 여러 차례 전문발굴을 하였다. 그리고 산성 주변 2km 범위 안에 있는 지역에 대한 전문 조사를 거쳐 산성 서쪽 구도구(九道溝), 산성 북쪽 육도구(六道溝), 산성 북측의 대양산 서쪽 비탈에서 고구려 무덤 68기를 발굴했다. 여러 차례의 발굴에서 돌덩이 하나에 홈이 2개 파인 쌍조석(雙槽石) 등 고구려 시기의 많은 유물 석기, 도자기와 철기들이 출토됐다. 현지 고고사업단들은 이 산성이 가장 전면적인 정리와 발굴이 된 요동 고구려산성 중 하나라고 한다.

요령성 건설그룹 회사에서는 심양시문화국 문화재관리사무실의 뜻대로 1998년 6월에서 8월까지 두 달 동안 수백만원을 투자하여 이 산성의 복원공사를 시행하였다. 복원은 남쪽의 성벽과 적대, 성문과 문터의 배수로 등에 중점을 두었다. 원래 성벽의 남아있는 기초 위에 새로 쌓아올린 성벽의 높이는 4m다. 이 복원한 부분의 산성은 한동안 공식 개방하였다가 산사태로 인해 성벽이 부분적으로 허물어지는 바람에 폐쇄됐다. 이 산성은 복원사업에 힘입어 2005년 3월과 2006월 5월에 선후로 요령성과 전국의 문화재로 지정됐다.

군사성이 두드러진 성곽

금산성 밖의 서쪽과 북쪽은 모두 골짜기다. 서쪽 골짜기는 비교적 넓고 긴 구도구(九道溝)라 하고, 북쪽 골짜기는 상대적으로 좁고 짧은 십도구(十道溝)라 한다. 바로 이 구도구와 십도구가 포하강 강줄기와 교차하여 형성된 산 위에 이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은 서북으로 대양산 봉우리들과 가까이 있고, 성 아래 동남으로는 저수지 호수가의 순환도로를 끼고 있다. 또 서쪽으로 옥룡산 산장과 500m 거리를 두었고 북쪽으로 600m 밖에 양산 민속촌과 이웃하고 있다.

금산성은 석회암 산체의 산세에 따라 축조됐다. 산성의 지세는 대체적으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구체적으로 서북쪽이 높고 험한데 대부분 낭떠러지와 절벽이고, 동남쪽은 비교적 낮으며 별로 험하지 않은 편인데 그 아래는 포하강 하곡이다. 성 안에 서남쪽 산과 서북쪽 산 두 봉우리가 서로 우뚝 솟아있고, 그 사이에 서켠으로 부드러운 산등성이가 이어져 남북으로 하나의 직선을 형성하고 있다. 이 두 산봉우리의 높이는 각각 해발 163m와 166m다. 조금 높은 서북쪽 산은 남으로 낮고도 오목한 골짜기를 이루며 또 서에서 동으로 기울어지면서 동쪽의 포하강 하곡까지 뻗어 나왔다. 산성 동남쪽은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들로 자연벼랑을 형성하고 있는데 높이는 27m다. 성벽은 그 위에 쌓았다. 그중 동쪽에 가담가담 벼랑이 끊어진 자리에 벼랑을 이루면서 쌓은 성벽의 흔적이 완연히 보인다. 산성은 북쪽이 좁고 남쪽이 비교적 넓으며 서북벽이 길다. 서·남·북 삼면이 산이라서 지세가 높고 동쪽에는 지세가 좀 낮은 편인데 짧은 골짜기가 하나 있다. 불규칙 삼각형 모양으로 둘러 쌓아올린 이 금산성 성벽의 남북길이는 430m, 동서 너비는 286m, 둘레의 길이는 1천384m, 총 부지면적은 6만1천500㎡다. 성벽을 발굴하면서 파헤친 참호(塹壕)처럼 생긴 길을 따라 산성을 한 바퀴 돌자면 빨라야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고구려인은 뛰어난 자연여건을 효력 있게 이용하여 금산성으로 하여금 군사기능을 지니도록 하였다. 그들이 축조한 산성은 두 산등성이와 서남쪽, 서북쪽 산허리에 성벽을 쌓았고, 산세가 험하지 않고 위치가 중요한 성벽에다 적대를 쌓아 놓았으며, 골짜기 어귀나 지세가 상대적으로 낮고 파인 곳에 성문과 지하 배수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성 안에 길게 파인 골짜기에다 물막이 돌둑과 저수지를 쌓아놓았고, 남쪽과 북쪽에 있는 평탄한 두 구역에 병영, 주거지(관공서 같은 것도 있음)를 설치해 놓았으며, 서남쪽 고지에다 양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축조하였다. 이렇게 현지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전체 산성의 배치를 적절하게 하여 이 산성의 방어와 수비 기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산성의 지형과 지세를 보면 동쪽에 지세가 낮은 골짜기가 있어 이공난수(易功難守) 하기 때문에 산성방어의 중점이 된다. 우리가 바로 여기서부터 금산성을 답사하였다. 철조망을 넘어 이곳에 들어서니 점차 가파르게 산성문터까지 이어진 앞이 좀 트인 산비탈이 나타났다. 지금 이곳에는 우거진 잡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이렇지 않았다. 현지인에 의하면 이 산비탈 아래서 위로 문터까지 적의 기병을 가로막는 구불구불한 세 겹의 난마벽이 있었는데 남아있던 담벼락의 높이가 1.3~1.5m라 한다. 그 중 제일 안쪽의 장벽 안에는 길이가 6m, 너비가 4.7m 되는 적대가 있었다. 고구려인이 산성동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다 설치해 놓은 건축물이다. 남아있던 그 유물마저 1996년 기반산저수지 순환도로 공사 때 작업하던 포클레인에 모두 훼손되었다고 한다. 고구려인은 이렇게 지세에 알맞게 기병을 막는 장벽을 쌓아 이공난수의 골짜기 입구를 난공이수 하게 만들어 문터의 방어와 수비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1천여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금산성의 흔적은 아직도 역력하다. 이 산성에 올라가면 푸른 이끼가 낀 허물어진 성벽이 많이 보인다. 담벼락은 동벽, 남벽, 서북벽으로 나누어진다. 그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북벽은 높이가 대략 3m 남았는데 쌓여있는 암석 돌이 8~10층이다. 성벽의 횡단면은 사다리꼴로 밑바닥 너비는 약 6.1m고 윗부분 너비는 5.5m다. 성벽 돌은 대부분 쐐기돌인데 일반적으로 길이는 약 0.4m, 너비와 두께는 0.3m, 크기와 두께가 모두 고르게 다듬어진 청회색 수성암(水成岩)이나 적갈색 화성암(火成岩)이다. 성벽은 세심하게 다듬은 가지런한 쐐기돌과 긴 돌, 모서리가 난 석재들로 서로 뒤섞여 엇갈리게 하고 또 그 틈 사이에 돌조각과 막돌로 메우고 수평을 잡아서 한층 한층 쌓아 올렸다. 그리고 성벽 양쪽 벽면은 돌로 쌓아올릴 때 층마다 조금씩 들여 놓았는데 성벽 안쪽은 높이 1m에 0.01~0.05m씩 안으로 들어왔고 바깥쪽은 높이 1m에 안으로 0.06~0.08m씩 들어왔다. 절반만큼만 복원해 놓은 남쪽성벽(물론 남문과 그 문루를 포함) 은 쏟아지는 빗물에 한 토막 허물어져 내려 돌들이 널려져 있다.

산성에서 고구려시기 전쟁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와중에 대량의 철갑과 여러 가지 화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성의 전략적 지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수나라 대업(大業) 8년(기원 612년)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수나라군이 심양에 있는 후성도(侯城道)를 거쳐서 금산성에도 이르렀다고 한다. 당 고종 건봉원년(乾封元年, 기원 666년), 연개소문이 죽은 후 막리지(莫離之)가 된 그의 아들 연남생이 고구려 궁궐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말미암아 당나라에 귀순하게 되었다. 하여 당 고종이 장군 방동개(龐同蓋)와 설인귀를 보내어 연남생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요동 신성(현재 무순고이산성)에 먼저 도착한 방동개가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자 설인귀군이 지원하여 고구려군 수백 명을 죽였다. 이어서 금산성에 먼저 이른 방동개가 고구려군과의 접전에서 불리하게 되자 설인귀가 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지원하여 고구려군 5만명을 패배시키고 요북(遼北)으로 진격하여 남소성(철령 최진보산성)과 부여성(扶余城)을 함락하고 연남생을 맞이하여 회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몇 년 전에 현지 고고일꾼들이 금산성의 성벽과 문터를 발굴할 때 불에 탔던 돌덩이가 성벽을 쌓는 돌 속에 석여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한다. 이것은 산성이 전쟁에서 불에 탔다가 후에 재건축됐다는 것과 또 이 산성에서 잔혹한 쟁탈싸움이 벌어졌다는 역사를 실증(實證)해 준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예전에 금산성의 전략위치가 중요한 까닭에 그 바깥지역에도 위성 성을 쌓아놓았다고 한다. 이것을 실증해 줄 수 있는 것은 금산성 북쪽에다 설치해 놓은 현재 심양시 심북신구(沈北新區)의 동루자(董樓子)산성과 철영자(鐵營子)산성이 전초성이다. 이 두 산성은 금산성과 정북 쪽으로 하나의 직선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도 고구려시기 유물들이 출토하였다. 현지를 답사하고 조사해 본 고고사업단은 이 두 산성이 모두 금산성의 외부방어 위성 성으로 금산성 전방 초소라고 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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