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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적대 등 고구려 뛰어난 축성기술 고스란히 남아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25>
중부일보 2010.07.12 남도일보 2012.06.07 00:00
산성의 서북벽
산성의 방어건축
성벽에 적대(마면)가 많고 다양한 것이 금산성의 특징이다. 이 산성 성벽에 쌓아놓은 적대는 모두 10개나 된다. 그중 서북벽에 6개, 남벽에 3개, 동벽에 1개 있다. 적대는 건물 기초 형체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계단식 적대로 상대적으로 크고, 다른 하나는 무계단식 적대인데 상대적으로 작다.
계단식 적대는 모두 6개다. 이런 적대는 또 기단의 바깥 모서리가 원각이냐 아니면 직각이냐에 따라서 네모난 원각형과 네모난 직각형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기단이 네모난 원각형 적대는 5개고 기단이 네모난 직각형 적대는 1개다. 무계단식 적대는 4개 있는데 정면과 양측 면이 모두 4각형이고 모서리도 다 각을 이룬다.
이곳의 적대는 규모가 큰 셈이다. 산성 북문과 서쪽으로 2m 사이 둔 적대를 놓고 볼 때, 이 적대의 기단 정면은 바깥에서 성벽 쪽으로 기울어지게, 성벽의 기초와 그 위의 성벽과 단단히 맞물리도록 쌓아올렸다. 기단의 너비는 8.6m, 두 측면의 길이는 9m, 높이는 1.6m다. 이 기단 위에 축조한 적대의 석벽은 정면의 너비는 6.4m, 두 측면의 길이는 7.4m, 남아있는 높이는 0.8~1.54m다. 삼면의 석벽은 1m 높이에 0.08m씩 들여쌓았다. 이 산성 동쪽 성벽에 있는 적대의 규모가 작은 외 기타 9개 적대는 대부분 너비와 길이가 7~9m이고, 부지면적은 80~100㎡다.
고구려 사람들은 같은 축성법으로 이 산성의 적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도 성벽과 잘 맞물리게 함께 쌓아 성벽의 견고성과 안전성을 높이는 동시에 취약한 지세의 성벽을 보강, 방어기능을 강화하는 것을 감안하여 적대의 위치를 선정하고 그곳에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적의 동정을 살피고 산성을 수비하며 적들을 방어하는 데 이롭게 했다. 성벽에 서로 이웃하고 있는 두 적대 사이는 제일 먼 거리가 73.8m고 가장 가까운 곳은 48m다. 이러한 거리는 모두 활로 쏘는 유효 사거리 안에 있다. 이로써 이웃하고 있는 두 적대가 산성을 방어하고 수비할 때 서로 호응하고 지원할 수 있었다.
이 산성의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하나씩 모두 4개 있다. 서쪽 성문을 제외한 3개 성문은 모두 지세가 상대적으로 낮은 골짜기 어귀의 적대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분문을 예로 들면, 산성 제일 북쪽 골짜기 어귀에 자리했는데 산성 최북단 적대가 바로 옆(서쪽)에서 초소처럼 지켜주고 있다. 문터는 주로 문 출입로(門道)와 부속 배수시스템으로 구성되었다. 성문 앞쪽에서 뒤까지 길이는 6m고 너비는 4m다. 이 자리에는 동서 양켠에 제각기 네모난 문기둥 받침돌과 문지도리 초석이 함께 붙은 침석(枕石)이 있었다. 문기둥 받침돌 윗면에는 네모나고 움푹 들어간 기둥 홈이 있고, 문지도리 초석 위에는 한복판이 오목한 주철로 만든 동그란 그릇이 받혀 있었다.
배수시설은 문 출입로 동켠에 대문 안팎으로 관통되었는데 물막이 벽, 모래와 흙을 거르는 우물, 지하수로와 물도랑으로 이뤄졌다. 물 막는 벽은 문 터 안쪽에 자리하고 길이는 3.5m, 너비는 0.15~0.25m, 동쪽 끄트머리가 그 옆 비탈 보호 둑과 이어졌다. 물막이 담벼락 아래에는 서에서 동으로 향하는 배수 골이 모래와 흙을 가라앉히는 여과정(過濾井)을 거쳐 서북쪽의 지하배수로로 이어졌다. 문 출입로 밑에 묻힌 지하배수로는, 밑바닥은 평평한 돌로 깔고, 양측 면은 쐐기돌로 쌓았으며, 위에는 석판으로 덮었다. 이 배수로는 높이 0.56m, 너비 0.52m로 북쪽으로 18.5m 휘어지면서 성 밖으로 통하는 물도랑과 연결되었다.
저수지의 축수정
금산성의 서문터는 지세가 높아 물이 흘러들지 않기 때문에 배수시설이 없다. 그러나 동·남·북 삼면은 모두 지세가 비교적 낮은 곳에 문터를 잡고 성문의 출입과 그 곳의 배수 문제를 고려하여 과학적인 배수시스템을 설치해 놓았다. 이로 인해 출입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산사태의 피해도 방지할 수 있었다.
산성 내부의 건축물
금산성 안을 둘러보면 지면의 흙 덮개가 비교적 얕다. 거기에는 현지인이 심은 배나무, 자연생 잡나무와 잡초들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속에는 고구려 때 쌓아놓은 저수지, 전망대, 병영, 주거지 등 건축물의 유물과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산성 동문터 안쪽 움푹 파인 곳에 자리한 저수지는 물 막는 돌 제방, 물을 저장하는 축수정(蓄水井)과 절반 밀폐된 고리형 석축 우물 보호테두리로 구성되었다. 축수정 서쪽에 있는 돌제방과 동쪽에 있는 절반 밀폐된 고리형 석축 테두리는 ‘D’자형 평면을 이루며 한복판의 저수정을 둘러싼 채 산성의 커다랗고 옹근 저수지를 이루었다. 산비탈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막는 돌 제방은 평면이 사다리꼴로 남북방향으로 쌓았는데 동쪽의 길이는 21m, 서쪽의 길이는 4m고 양쪽에 제일 넓은 데가 7.2m며 높이는 약 9m다. 저수지 중간에 다듬은 돌로 가지런하게 쌓은 저수정은 초롱 형태로 둘레의 벽 두께가 1.2m고 깊이는 5m며 입구 직경은 9m다. 이 우물벽 바깥둘레는 1m 너비의 순황토로 다져놓았고, 그 밖에는 또 모래와 돌이 섞인 흙으로 메웠으며, 그 동·남·북 삼면에다 쐐기형 돌로 1.2m의 두께로 절반 밀폐된 고리형 보호테두리를 쌓아놓았다(이 저수정을 발굴할 때 도자기, 철기, 석기 등 매우 중요한 고구려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한다).
이런 시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산성의 물 문제를 해결하였고, 아울러 성 안 골짜기의 물을 빼는 문제도 해결하였다. 커다란 제방 둑은 성 안 빗물이 쏟아져 내리는 산비탈 밑 낮은 지대에 있어 산사태의 충격을 방지하고 물맞이비탈의 수토 유실을 줄여주며 흙물을 가라앉히고 걸러주는 역할을 하여 고인물의 수위를 높이고 축수정의 물 저장을 확보하였다. 절반 밀폐된 고리형 석축테두리는 축수정을 보호하고 주변에 흙과 모래가 우물로 흘러들어 우물물이 오염되는 것을 방지했다. 고구려인은 이렇듯 물 공급을 원활하게 하여 산성을 수비할 수 있었다. 고구려인의 슬기와 뛰어난 축성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어느 전문가는 이 저수지를 고구려산성 발굴 가운데 중대한 발견이라고 했다.
이 산성 동·남·북문터 밑으로 배수로가 설치되었고 남쪽 성벽 최동단 적대 동쪽 2.5m 지점의 벽 밑으로도 배수로가 하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한 성벽을 거친 유일한 지하배수로다. 이 배수로 출구의 높이는 0.98m, 너비는 0.86m로 밑바닥은 인공으로 바위를 깎아놓은 것이고 양 측면은 좀 큰 쐐기돌로 쌓아놓았으며 윗면에는 평평한 큰 석판으로 덮어놓았다. 이것은 산성 서남쪽의 고인 빗물이 성벽에 대한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하여 설치해 놓은 물을 빼주는 시설로 추정된다.
금산성 서남쪽 고지(高地) 가장 높은 곳은 밭고랑같이 땅을 파서 흙으로 쌓은 두둑과 그 안쪽 옆에 깊이가 1.5m인 긴 고랑으로 둘러싸여 밖에는 네모나고 안에는 둥그런 내성(內城)을 형성하였다. 길이가 80m, 너비가 70m인 이 내성 안에 돌로 쌓은 전망대가 하나 있다. 전망대는 사람들이 쐐기돌로 한자 ‘회(回)’자 모양으로 돌벽을 쌓고 가운데 흙을 넣어 다진 돈대로서 동서 길이는 8.7m, 남북 너비는 8.5m, 남아있는 높이는 1.5m며 바깥쪽 담벽의 너비는 약 2m 된다. 쐐기돌로 축조한 방법은 성벽 쌓는 것과 같고 한복판에 넣어 다진 것은 순 황토다. 현지 노인은 이 전망대는 허물어진 지 오래되고 남아있던 석대와 성벽의 돌들은 원래 주변지역 농민들이 뜯어가서 마차로 심양시내에 내다팔거나 제 집 돼지우리 담벼락에 깔았다고 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기반산저수지를 건설하기 전, 이 산성 주변에 나무가 많지 않아 내성 전망대에 올라서면 시야가 아주 넓어 성 밖 서남쪽 하곡지대를 굽어볼 수 있었다 한다.
금산성 안의 양지바른 산비탈에 고구려 사람들의 주거지도 있었다. 이 산성을 발굴할 때 고구려시기의 집터를 많이 발견했다. 대부분 완전하지 않지만 그 형상과 구조는 대체적으로 유사하다. 2002년에 발굴한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한 집터는 돌로 네모나게 쌓았던 자리인데 면적은 3×3m이고 문터, 구들과 깊숙한 연기 골, 굴뚝 등 유적이 발견됐다. 발견한 집터는 모두 40여 곳으로, 이미 다 정리되었다. 대부분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반 지하 동굴, 아니면 돌로 쌓은 간이 집터인데 거기에는 일반 직사각형이나 곡척(曲尺) 모양의 불 때는 구들이 있다. 그리고 집터 주변에는 물건을 저장하던 움과 재구덩이가 많이 널려 있었다. 이런 재구덩이는 대부분 원형(圓形)이나 타원형 아니면 네 개 모서리가 동그란 사각형으로 재나 생활쓰레기를 묻는 곳이었다. 주거지를 발굴할 때 돌절구, 옹기 등 적지 않은 생활용품들도 출토됐다.
이밖에 금산성 주변 지역에서 고구려의 묘지를 몇 기나 발굴하였다. 발굴에 의하면 묘지에는 거의 다 흙으로 덮고 다진 석실 무덤이다. 묘혈(墓穴)의 형태는 삽모양, 칼자루형, 사다리형과 직사각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안을 보면 어떤 것은 한 묘혈에 여러 주검의 유골이 있고, 어떤 것은 두개골과 말 타는 발 디딤만 있으며, 어떤 것은 난잡하게 사람 뼈와 말뼈가 섞여 있었다. 이것은 이 산성에 전쟁이 있었을 가능성과 전쟁 때문에 비정상적인 사망을 빚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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