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2797

건주여진(建州女眞)
 
명나라 때 남만주 일대에 살던 여진족.

이 지역의 여진인들은 쑹화 강[松花江]과 무단 강[牧丹江]의 합류점인 삼성(三姓) 일대에서 워터리(斡朶里)·나하추(納哈出)·하루아(火兒阿)의 세 부족을 이루고 살았다. 고려말 워터리는 회령(會寧), 하루아는 지린[吉林] 부근으로 이동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퍼져서 고려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명나라는 1387년(고려 우왕 13) 나하추를 정복하고 회유책을 써서, 1403년(조선 태종 3)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고 하루아의 추장 아하치(阿哈赤)를 그 지휘자로 삼았다. 그리고 1405년에는 건주좌위(建州左衛)를 설치하고 워터리의 추장 통몽거티무르(童猛哥帖木兒)를 지휘자로 삼았다. 건주위는 1438년 쑤쯔 강[蘇子河] 유역, 건주좌위는 1440년 동가하(佟佳河) 유역으로 이동했는데, 건주좌위는 내분으로 우위가 새로 생겨 건주여진은 본위(本衛)와 좌위·우위 등을 이루었다. 이들은 모두 추장이 통치했으며, 추장은 세습되었다.

건주여진은 명나라와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화친을 제의하면서도 차츰 조선의 변방을 침입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침입에 대비해서 세종 때 압록강 상류에 최윤덕(崔潤德)·이천(李蕆) 등을 보내어 토벌하고 그곳에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등 4군(郡)을 설치, 두만강 유역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을 보내 정벌하게 한 후 경원(慶源)·종성(鍾城)·회령(會寧)·경흥(慶興)·온성(穩城)·부녕(富寧) 등 6진을 설치했다. 여진인들의 경제생활은 반농반수렵의 상태였으므로 식량·의류 등 생필품이나 농구 등을 조선에서 구해서 생활했는데, 이러한 관계가 원활하지 못할 경우에는 변경을 침략했다. 따라서 조선의 여진에 대한 정책은 무력적인 토벌과 회유책을 병행하여 종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포목(布木)·미두(米豆)·농구(農具) 등을 마필(馬匹)·모피(毛皮) 등과 바꾸어 가도록 했다. 또한 유력자에게는 귀화를 장려하고 관직을 주며 자제를 서울에 머무르게 하여 전지(田地)·가택(家宅)·의량(衣糧) 등을 후하게 주기도 했다.

그러나 1458년(세조 4) 4군을 철폐하자 이들이 다시 침범하기 시작해 1460년 신숙주(申叔舟)를 보내 토벌하였다. 1467년에는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이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 군대와 함께 건주본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죽였다. 여진 정벌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1479년(성종 10) 윤필상(尹弼商), 1491년 허종(許琮) 등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들의 반란도 근절되지 않았다. 1583년(선조 16) 니탕개(尼蕩介)의 난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경원을 비롯한 여러 진이 함락되는 등 자못 기세가 컸으나 신립(申砬)이 분투하여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건주여진은 16세기초 쑹화 강 유역의 해서여진(海西女眞)의 지배로 들어가면서 세력이 매우 약해졌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의 힘이 만주까지 미치지 못하자 세력을 회복하여 좌위 출신의 누르하치(奴爾哈齊)가 3위를 통합, 전만주를 통일한 뒤 1616년(광해군 8)에 후금(後金)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처음에는 조선에 화친의 뜻을 나타냈으나, 그뒤 2차례에 걸쳐 침입하여 그들의 야욕을 드러냈다.

金惠苑 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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