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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오키나와,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
김종성의 동아시아 권력교체의 역사 6.
[129호] 2011년 12월 01일 (목) 11:01:28  김종성 동아시아 역사 연구가 jkim0815@naver  jkim0815@naver.com

한중관계를 두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 관계라고 부르지만, 한중관계 못지 않은 순망치한 관계가 있다. 한반도-오키나와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오키나와가 어떤 곳이고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면,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못지 않게 오키나와도 한반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 오키나와 삼국시대의 지도. 근세 일본의 사상가인 하야시 시헤이가 도쿠카와 막부에 바친 지도다.

이전에 유구(琉球) 혹은 류큐라 불린 일본 오키나와현은 일본과 대만의 중간 해역에 위치하고 있다. 중·일 영토분쟁의 대상인 조어도(센카쿠열도)도 오키나와현에 속해 있다. 오키나와의 위치는 북위 26도 21분 및 동경 127도 68분이다. 상하이보다 약간 아래쪽에 있다. 오키나와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60여 개의 섬을 포괄하고 있으며, 총면적은 제주특별자치도의 1.2배에 달한다.

일본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지만, 그래서 꽤 먼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오키나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민족과 각별한 관련을 맺었다. 《고려사》「창왕 열전」에 따르면, 창왕 2년 8월(1388.9.11∼10.9) 오키나와의 삼국 중 하나인 츄우잔(中山)왕국의 삿토(察度)왕은 사신을 파견해서 속국을 자처하고 향신료 등을 조공으로 바쳤다. 속국이 조공을 바치면 상국은 회사(回賜, 답례)를 내렸다. 고려와 츄우잔 왕국은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조선시대에도 한반도와 오키나와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오키나와섬의 우라소에(浦添) 성터에서 발견된 고려기와는 한반도와 오키나와의 교류를 입증하는 자료다.

두 지역의 운명이 상호 연동했다는 사실은 19세기 후반의 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오키나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이 1879년 종결되면서, 오키나와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한반도에서의 ‘폭풍우’로 이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바로 이 해에 오키나와는 일본에 합병됐다. 이것을 주도한 장본인이 이토 히로부미 내무상이었다.

고려의 속국 자처한 오키나와

오키나와 합병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직전까지 청나라가 처했던 안보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종래 청나라는 티베트-미얀마-베트남-타이완-오키나와-조선(이하 ‘티베트∼조선 라인’)에 의해 빙 둘러싸여 있었다. 청나라 복건성 관할인 타이완을 제외한 나머지는 청나라를 상국으로 받드는 신하국들이었다. 오키나와의 경우는, 청나라와 일본을 동시에 상국으로 받드는 양속(兩屬)의 상태였다. 하나의 국가나 정치집단이 2개 이상의 국가에 대해 속국의 예를 갖추는 것을 양속이라 했다. 조선·명나라를 동시에 상국으로 받든 여진족 집단들, 조선·일본을 동시에 상국으로 받든 대마도도 같은 범주에 속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티베트∼조선 라인은 일종의 울타리였다. 서세동점 시대에 이 라인은 해양에서 몰려드는 서양열강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이 라인은 서양열강의 집중 공략을 받았다.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및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에도 불구하고 중국시장을 장악하지 못한 서양열강은 1860년대부터는 이 라인에 대한 공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국 주변 시장을 장악한 뒤에 중국을 다시 공략하자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이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정문을 돌파하기보다는 담장을 무너뜨리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서구화 노선을 표방한 일본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일본의 오키나와 합병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티베트∼조선 라인 중 하나인 오키나와가 무너지자, 청나라의 실권자인 북양대신 이홍장은 1879년부터 이른바 ‘신(新)조선정책’을 개시했다. 이는 조선의 자율성을 존중하던 종래의 정책을 폐기하고 조선문제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서양열강과 일본이 조선을 경유해서 자국을 침략할 가능성을 차단하자는 것이었다. 이 정책에 따라 청나라는 1882년 임오군란에 대한 무력 개입을 통해 조선의 내정·외교를 장악한 데 이어, 1884년 갑신정변 개입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반격을 초래했다. 1886년부터 해군력 증강에 돌입한 일본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1894년 동학전쟁 무력개입 및 청일전쟁 개전을 통해 조선을 장악하고 청나라를 조선에서 내쫓는 데 성공했다. 그 이전인 1885년에 미얀마는 영국에, 베트남은 프랑스에 넘어갔다. 이런 상태에서 청일전쟁의 결과로 조선이 일본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고 타이완이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으니, 티베트∼조선 라인은 청일전쟁으로 사실상 와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을 보면, 오키나와 합병이 청나라의 대(對)조선 정책에 영향을 주고 동아시아 역학구도의 변화를 초래한 시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키나와가 흔들리자 동아시아도 흔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오키나와 대외무역의 거점이자 오키나와의 왕성인 슈리성의 유적지.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동아시아 균열 초래한 오키나와 합병

오키나와의 전략적 위상은 당시 영국인들에 의해서도 간파되었다. 19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연구한 재미 역사학자 김기혁의《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최후 국면》(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에 따르면, 1876년 런던에서 발행된 한 잡지에 ‘영국이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를 선점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이 잡지는 1877년에 런던을 방문한 일본 외교관 모리아리노리의 손에 들어갔고, 이어서 법무상인 이와쿠라 도모미의 책상에 올라갔다. 일본이 1879년에 오키나와 합병을 서둘러 단행한 것은 영국인들까지 오키나와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야마시타도우인(人)의 유골을 근거로 할 때, 오키나와에서는 3만 2천 년 전부터 인간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역사서인《수서》, 일본 역사서인《일본서기》·《속일본기》를 보면, 오키나와가 외부세계에 알려진 것은 서기 7세기 이후다.

고구려·백제·신라의 대결이 한창이던 시절에 오키나와가 역사무대에 데뷔한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의 오키나와에서 강력한 정치권력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에서는 10세기부터 아지(按司)라고 불린 족장들이 등장했으며, 12세기 후반부터 왕조라고 불릴 만한 규모의 정치권력이 출현했다.

오키나와 최초의 정사(正史)인《중산세감(中山世鑑)》에 따르면, 오키나와에 등장한 최초의 왕은 텐(舜天)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1187년에 이른바 텐왕조를 개창했다. 이 왕조는 1259년에 에이소(英祖)왕조로 교체되었다. 몽골제국의 위상이 흔들리던 14세기 중반부터 오키나와는 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호쿠잔(北山) 왕국, 난잔(南山) 왕국, 츄우잔 왕국이 열도를 분할한 것이다. 1388년에 고려 창왕에게 신하의 예를 올린 삿토는 츄우잔 왕국의 시조였다.

몽골제국과 명나라의 교체로 동아시아가 어수선해지면서, 장차 오키나와를 통일할 열도의 영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잔 왕국의 귀족 출신인 쇼우하시(尙巴志)가 그 주인공이었다. 명나라의 패권이 정착된 뒤인 1406년에 제1쇼우(尙)씨 왕조를 건설한 그는 아버지인 쇼우시쇼우(尙思紹)를 초대 군주로 추대한 뒤에 그 자신은 제2대 군주가 되었다. 그는 1429년에 마침내 오키나와 열도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오키나와 최초의 통일왕국이었다. 이 왕국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듦으로써, 명나라가 주도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왕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1469년에 출현한 제2쇼우씨 왕조가 지배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 왕조는 1879년까지 열도를 지배했다. 두 왕조를 통틀어 오키나와 왕국(유구왕국·류큐왕국)이라 부른다.


▲ 오키나와의 마지막 왕인 쇼오타이오우.

이 왕국은 조선·중국·일본·태국·베트남·인도네시아 등과 무역관계를 체결했다. 동북아와 동남아의 중간지대라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오키나와는 중계무역을 통해 번영을 구가했다.

15세기를 배경으로 하는《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오키나와로 추정되는 율도국을 동경하고 끝내 율도국을 평정한 뒤 그곳 왕이 된 것도 오키나와의 번영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오키나와는 오늘날 싱가포르나 홍콩같은 무역 허브였던 셈이다. 이런 번영을 발판으로 오키나와는 명나라가 주도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물론이고 청나라가 주도한 동아시아 국제질서 하에서도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오키나와가 쇠망한 데는 바닷길의 통합이라는 세계사적 변화가 큰 몫을 했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등의 활동으로 16세기 이후 전 세계는 하나의 바닷길로 통합됐다. 이 길은 서유럽인들에 의해 개척됐고 그들에 의해 가장 잘 활용됐다. 서유럽의 선두주자인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남부의 모잠비크에서 동남아시아의 말루쿠제도(향료제도)에 이르는 향료무역 루트를 개척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16세기 초반부터 중국에 진출했고 1543년에는 태풍에 휩쓸려 규수 남쪽 다네가시마에 표류해서 일본인들에게 조총을 건네주고 돌아갔다. 스페인인들도 포르투갈인들의 뒤를 따랐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손실을 본 나라 중 하나는 오키나와였다. 기존의 무역 중계권을 서유럽인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군사기지, 한반도와 오키나와

경제적 위상의 약화는 정치적·국제적 위상의 약화로 연결됐다. 오키나와는 1609년부터 일본 사츠마번의 내정간섭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도 종주권을 주장했기에 일본은 오키나와에 대해 전면적 침탈을 감행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가 중·일 양국의 속국이 되는 양속 상태가 출현했다. 이런 양속 상태는 바닷길 통합으로 오키나와의 위상이 약해진 16세기 이후로 오키나와의 국권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오키나와의 양속 상태는 1860년대 이후부터 동요했다. 서양열강이 티베트∼조선 라인을 압박하는데다가 일본까지 이런 흐름에 가세하면서부터 오키나와의 독립은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871년 11월에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오키나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이 날 69명을 태운 오키나와 선박이 태풍에 휩쓸려 대만 동해안에 표류했다. 3명은 익사했고, 66명은 해안에 상륙했다.

이 중에서 54명은 원주민에게 살해됐고, 나머지 12명만 관청에 인계됐다. ‘차제에 오키나와·대만에 대해 영향력을 확장해야겠다’고 판단한 일본은 손해배상청구를 명분으로 청나라와의 협상 테이블을 만들었다. 오키나와는 엄연한 독립국이었지만, 오키나와가 자국에 대해 속국의 예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일본이 문제 해결에 나선 것이다.

협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일본은 1874년에 대만 침공을 단행했다. 결국 일본과 청나라는 중일북경전약(中日北京專約)이란 조약을 통해 문제를 봉합했다. 조약의 핵심 내용은, 일본은 대만에서 철수하고 청나라는 배상금 50만 냥을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자국민’의 피해를 근거로 배상금을 받아냈다는 점이다. ‘오키나와인은 일본인’이라는 점에 대해 중·일 양국이 합의를 본 것이다. 이로써 오키나와와 중국의 관계는 종결됐고, 오키나와는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영국인들마저 오키나와를 탐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본이 1879년에 오키나와 합병을 서둘러 단행한 것이다.

몽골제국의 쇠망이라는 시대 흐름에 편승해 조선과 함께 역사무대에 등장한 오키나와 왕국은 동북아와 동남아를 잇는 무역 허브로서 한때 번영을 구가했지만, 바닷길 통합에 따른 세계사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서히 침체되다가 1879년에 일본에 합병됐다. 이것이 조선 정세의 불안정을 초래하고 결국 조선의 멸망을 가져온 원인(遠因)이었다는 점에서, 조선과 오키나와는 한중관계 못지 않은 순망치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관계는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멸망 후에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간 한반도와 오키나와는 20세기 중반부터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군사기지가 되었다. 이처럼 한반도와 오키나와가 긴밀한 상호 연관성을 갖고 있으니, 저 멀리 남쪽 바다에 있는 오키나와의 동향에 대해 항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김종성(42)은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역사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에서 한국사를 강의하고《오마이뉴스》에서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동아시아 패권전쟁》《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조선사 클리닉》등이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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