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50809183344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0> 몽골, 또 다른 한국 - 프레시안"의 긴 내용 중 거란 관련 부분만 발췌해서 순서만 편집하고 소제목은 내용에 따라 자의적으로 붙였습니다.


거란 

거란과 몽골 한민족의 문화적 유사성

그리고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orum)의 경우 중국의 문헌에는 각라화림(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화림(和林) ·화령(和寧) 등으로 쓰입니다. 유목민들이 가진 천손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태양(太陽, 日)을 보면 몽골어에서는 '나ㄹ'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말[날]과 완전히 같지요. 유목민들이 동쪽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은 흉노·돌궐·거란 이래의 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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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송사(宋史)』에, "거란의 경우, 강토는 비록 넓었지만 인구와 말의 수가 적어서 남쪽으로 중국을 경략할 때는 반드시 고려·발해·여진·실위 등을 이끌고 회전(會戰)한다.(『宋史』326 郭諮列傳)"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서는 "거란의 풍속은 말갈과 같다(『北史』94 契丹)."고 하여 만주쥬신(숙신계)과 몽골 쥬신(동호계)이 다르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만주 쥬신과 몽골 쥬신을 다르게 보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은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는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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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자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에 가깝게 나타납니다. 즉 해(奚 [xī]), 습(飁 [xí]), 실위(室韋 [shìweí]) 등으로 예(濊), 또는 예맥(濊貊)과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똥고양이와 단군신화' 참고). 발음으로만 보면 이들은 예맥과는 구별이 잘 안 되지요. 결국은 철과 관련된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해는 거란이 되고 실위가 바로 몽골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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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몽골씨름의 원형은 일반적으로 요(遼 : 거란)의 씨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1931년 요나라 동경(東京遺址)에서 팔각형 백색 도관(陶罐)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의 8면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요. 그리고 이 씨름은 요나라를 이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금(金)나라 때는 주류민족이었던 만주쥬신(여진)은 물론 피지배층이었던 한족(漢族)들도 씨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씨름이 일종의 전투무술이었기 때문에 한족들이 씨름에 몰두하는 것을 금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우려합니다. 그리고 전투무술의 비결들이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겠죠. 그래서 금나라의 장종(章宗 : 1189~1208)은 '여진인들만 씨름을 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여 중국에서는 씨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금나라에서 씨름은 현재의 태권도와 같은 국기(國技)였던 것이죠[장장식,『몽골민속기행』(서울 : 자우출판, 2002) 311쪽]. 그 후 이 씨름의 전통은 몽골이 계승하게 되지요.
  
결국 거란 - 금 - 몽골 쥬신족에게 있어서 씨름은 오늘날의 씨름과 같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전투무술을 포함한 상무적인 무술로 생각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법도 포함되겠지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금나라의 장종이 한족들이 씨름을 하는 것을 금할 까닭이 없지요.


거란의 기원

몽골의 기원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몽골은 동호(東胡)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몽골은 한나라 초기 흉노의 모두루 단군임금이 동호를 제압하자 살아남은 부족들이 동쪽으로 와서 그 가운데 어떤 무리는 선비가 되고 어떤 무리는 오환(烏桓)이 되고, 후에 이들은 다시 실위(室韋 : 몽골)·거란(契丹)이 되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에 있는 동호는 거란이 되었고 북쪽에 있는 동호는 몽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 현재의 흑룡강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몽골 또는 모골 또는 머골(蒙兀)이라는 이름이 이 때 나타났다는 것이지요[屠寄,『蒙兀兒史記』1 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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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는 거란과 동류인 "해(奚)는 본래 흉노의 별종(『新五代史』74 契丹)"이라고 합니다. 『북사(北史)』에 따르면, "해는 거란과 이종동류로 본래 고막해(庫莫奚)라 하였는데 그 선조가 동호의 우문(宇文)의 별종(『北史』94 奚)"이라고 합니다. 요나라 태조가 해(奚)를 정벌하면서 "거란과 해(奚)는 언어가 서로 통하니 하나의 나라이다(『遼史』72 宗室列傳)."라고 합니다. 요나라는 자신의 발상지인 현재 내몽골 자치구 빠린줘치(巴林左旗)를 상경(上京)으로 하였습니다(『契丹國志』22 四京本末).

거란 발상지. ⓒ김운회

『북사(北史)』에 따르면 "실위는 대체로 거란의 부류로서 남쪽에 있는 것은 거란이 되고 북쪽에 있는 것은 실위라고 불렀다.(『北史』94 室韋)"고 합니다. 실위는 발음이 예맥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예맥이나 숙신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사(北史)』에서도 "실위는 풍속이 말갈(靺鞨)과 같다(『北史』94 室韋)."라고 합니다. 이 실위는 바로 이전의 오환·선비이며 그 후 거란·해·실위가 되고 후일 몽골이 되지요.

이 점은 새끼중국인들의 근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대부분의 한국 사가들도 그대로 가진 속성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을 대표한다면서 민족사학에 대해서 이렇게 비난하고 있지요.
  
"만주의 지배족이었던 여진·거란·몽고 등 이른 바 동이족 전체를 배달족(倍達族)이라는 이름 아래 동족(同族)으로 간주하고 배달족 전체의 시조를 단군(檀君)에서 찾고 단군 이래의 고유 신앙을 민족문화의 핵심으로 높이 선양하였다 … 이러한 민족주의 사학은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이 정신적 기초가 되어 일제에 많은 타격을 주고 만주식민사업을 방조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우리 민족의 범주를 동이족 전체로 확대 해석한 것은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한영우,「총론」『한국사 특강』(서울대학교 한국사 특강편찬위원회 : 2003) 9쪽]."
  
이것이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사연구의 종합적 발전적 성과"로 자화자찬하면서 대학 교양교재로 내놓은 책입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민족주의 사학이 오히려 일본의 극우 제국주의자들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를 않나(망국의 백성들이 만주에서 식민사업을 제대로 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역사를 동이족 중심으로 본다는 방식 자체가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쥬신의 연구, 참으로 갈 길이 멀군요. 저도 최소 50년은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만주와 몽골 쥬신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쥬신에 대한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선비·거란·오환·해·실위·말갈·숙신·동호 등등으로 다르게 생각한 것은 이들이 제대로 국가체제도 갖추지 못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지역적으로 기후라든가 환경에 따라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각기 독특한 풍습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특히 몽골의 경우에는 자연환경이 가장 혹독한 쥬신의 북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 문화의 일부는 쥬신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형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식주(衣食住)라든가 변발과 같은 머리 모양새·유물·분묘제도·결혼풍습·샤머니즘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일 집단으로 판단할 수 있는 주요한 문화적인 근거들을 상당한 부분 공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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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漢族)이나 '새끼 중국인'들이 반드시 명심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쥬신은 적어도 한족만큼 자부심이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 예가 있나요? 그런 예는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봅시다. 몽골이 같은 민족인 거란인들과 사이가 나빴던 것은 거란인들이 지나치게 한화(漢化)하여 동질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몽골도 중국을 경멸하여 '거란'이라고 부르죠.
  
여기서 거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 넘어갑시다. 거란은 한국과 중국의 사가들에 의해 외면을 받아왔지만 쥬신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나라입니다. 몽골은 바로 거란과 같은 동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란의 역사를 아는 것은 몽골의 역사를 아는 것도 됩니다.
  
거란은 "과거 흉노의 종족이다(『舊五代史』137 契丹)"라고 하기도 하고 "거란은 동호로 그 선조는 흉노에게 격파되어 선비산에서 살았다(『唐書』129 北狄傳)"고 하기도 하고 "거란은 본래 선비족(『五代會要』29 契丹)."이라고 합니다. 『구오대사』에 따르면, "거란의 땅은 본래 선비의 옛 땅이었다(『舊五代史』137 契丹)."고 합니다.
  
거란은 쥬신의 전통 그대로 태양을 숭배하여 매월 초하루 아침[朔(초하루)旦(아침)]이면 동쪽으로 향하고 태양에게 절을 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마음을 견고히 했다고 합니다(『新五代史』「四夷附錄」契丹條). 뿐만 아니라 거란은 쥬신들 가운데 샤먼 신앙이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쥬신에게 있어서 샤먼은 정치적인 군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단군왕검(檀君王儉)도 종교수장(단군 : 샤먼)과 정치적 군장(왕검)을 함께 나타내는 말이지요.『요사(遼史)』에 따르면, 요나라의 태조는 "천명을 받은 군주는 마땅히 하늘을 섬기고 신을 경배한다(受命之君 當事天敬神 :「耶律倍傳」)"라고 하여 샤마니즘을 아예 국교(國敎)로 숭상합니다[島田正郞, 『遼朝官制の硏究』(1979) 321쪽].
  
거란(契丹)은 무엇보다도 거란 자체가 바로 '쇠'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契丹'으로 쓰고 글단, 또는 글안·거란 등으로 읽으시니까 그것이 '쇠'라는 사실을 모르죠. 契는 중국 발음으로 바로 '쇠(xiè)'입니다. 놀랐죠?
  
알타이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1921~1990 : 서울대 교수)은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고(蒙古 : 몽골)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박시인『알타이 신화』232쪽)."
  
즉 몽골도 역시 쥬신의 기본적인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쇠, 또는 금을 숭상하는 알타이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단 말이죠.

  
거란의 발전과 한족화
 
거란은 부족들 가운데 큰 것을 대하씨(大賀氏)라고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8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의 우두머리를 대인(大人)이라고 불렀는데 항상 한 사람을 대인으로 추대하여 기고(旗鼓)를 세워 8부를 통솔하게 하는데 그 기간이 오래 되거나 나라에 재앙이나 역병이 돌아 목축이 쇠퇴해지면 이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원래 약속이 그러했기 때문에 아무 탈 없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新五代史』72 契丹)."고 합니다. 이것은 쥬신의 일반적인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부여·고구려·신라·몽골·금 등 대부분의 쥬신의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러나 야루아버지(耶律阿保機 : 야율아보기)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마침내 군주가 되었고, 더 이상 여러 부족이 교대하는 관행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국왕을 칭하게 되었고(『舊五代史』137 契丹), 이로써 강력한 고대 정복국가로 탈바꿈합니다.
  
이 점은 쥬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란이 부족을 통합하고 그것을 통해 1인 군주지배체제에 들어서면서 강력한 고대국가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정벌에 나서서 중국을 경영하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의 모범답안처럼 쥬신들이 답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다만 거란이 너무 중국화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소멸되는데 만주쥬신이나 몽골쥬신들은 한족(漢族)과 동화되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만주쥬신과 몽골쥬신은 민족적 정체성을 견고히 유지합니다만, 최근 만주쥬신은 모택동(1949) 이후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소멸되고 있습니다.
  
거란은 야루덕광(耶律德光) 시기에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합니다. 야루덕광은 후진(後晋)의 고조인 석경당(石敬瑭)을 책봉하여 후진의 황제로 삼았습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따르면, "야루덕광은 진성(晋城) 남쪽에 단을 쌓고 석경당을 세워 황제로 삼고 의관을 스스로 벗어 입혀주면서 책봉하여 말하기를 '아들 진왕아, 나는 이처럼 너를 아들로 여길 것이니 너 역시 나를 아비처럼 생각하라'고 하였다(『新五代史』72 契丹)." 라고 합니다. 즉 거란은 한족(漢族)의 후진(後晋)과 부자지국(父子之國)의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舊五代史』48 唐書 末帝紀). 다시 말해서 한족의 국가인 후진의 황제가 거란의 황제에 의해 책봉되었고 이들은 서로 부자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진은 석경당이 죽고 출제(出帝)가 즉위하자 더 이상 거란에 대하여 칭신(稱臣 : 신하를 칭함)을 거부합니다. 거란의 황제들이 어쩌면 너무 순진했던 것이죠. 거란 황제 야루덕광은 여러 번 이를 나무랐지만 한족의 황제는 도무지 반응도 없어 944년 후진을 공격하고 후진의 황제를 부의후(負義侯)에 봉하고 진국을 고쳐 대요국(大遼國)으로 합니다(『新五代史』72 契丹).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이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에 이와 같이 철저히 한족화한 나라들은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르네 그루쎄(René Grousset)가 말하듯이 "중국과 페르시아 문화는 비록 정복되었지만 도리어 거칠고 야만적인 승리자들을 압도하고 도취시키고 잠에 빠뜨려 소멸시켜 버렸다. 정복된 지 50년만 지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과 같은 생활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다[René Grousset,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 : 1998). 33쪽]."라는 것입니다. 거란이나 북위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거란이 원(元)나라 이후 돌연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한 민족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을까.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거란족 실종에 관한 의문" 등으로 호들갑스럽게 이야기되는 식은 아닙니다. 거란이 멸망했다고 그 동호계 주민들이 다 증발하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그 지배층이 지나치게 한화하여 그 계승자들이 없으므로 역사 속에 사라진 듯이 보이지요.
  
최근 중국학계는 DNA 분석기법을 동원해서 거란의 핏줄은 "중국 동북 지방의 소수 민족인 다얼(達爾)족에 의해 상당부분 계승되고 있다(『중앙일보』 2004.8.5)"고 밝혔습니다. 이들 다얼족이 거론된 이유는 거란이 웅거했던 네이멍구(內蒙古) 초원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한국 언론도 거란의 실체를 확인하는 "과학적 증명"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그들은 다얼족의 시조 설화는 "거란의 한 군대가 이 땅에 와서 지역 방어를 위한 성을 쌓은 뒤 선조가 됐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중국인들이 거란을 아예 다른 민족으로 보려고 하다 보니 나타난 결과지요. 아니면 상식(常識)이 없는 것이지요.
  
거란족이 멸망하면서 거란 민족 모두가 어디로 도망을 갔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늘로 날아갔든가 땅으로 꺼졌습니까? 중국이나 한국이나 역사학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으니 그 민족의 실체를 볼 수 없는 것이죠. 거란은 다만 지배층이 지나치게 한화정책을 고수하여 중국 문화에 흡수되어버린 것이고 그 일반 국민들은 그저 쥬신으로 그 지역에 그대로 살고 있다가 금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몽골의 백성이 되기도 한 것이죠. 쉽게 말해서 다시 부족(部族) 상태로 회귀한 것일 뿐이죠.
  
거란은 부족 상태로 금나라는 물론 원나라 때에도 일정한 지역을 독립적으로 지배한 흔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요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금나라는 요나라 거란의 백성들이 반심(叛心)을 가지지 않도록 여진족 2가구가 거란 1가구를 함께 살도록 했다거나(『元史』149 耶律留哥傳), 거란인 9만 명이 고려의 강동에 침입하여 웅거했다거나(『元史』208 高麗) 耶律留哥傳), 거란인들을 때로 단속하고(『元史』11 世祖紀) 요동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농기구를 지원하는(『元史』16 世祖本紀) 등의 기록들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1300년대 이후 역사책에서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들어오듯이 하늘로 날아갔거나 땅으로 꺼진 것이 아니라 몽골과 융합하여 하나가 되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없지요.
  
몽골이 거란을 경멸하고 중국조차도 거란으로 부르는 것은 같은 민족이면서 한족화(漢族化)하면서 같은 민족을 짐승취급을 하는 데에 대한 분노의 표현입니다. 원나라가 일본을 싫어한 것도 중국과 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가 일본과 가까워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침공의 원인이 됩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일본은 비밀리에 고려와 내통하고, 개국이래로 늘 중국과 교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류를 하기 위한 사신을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 장차 사해를 하나의 집으로 만들려하나 이렇게 서로 즐겁게 통교를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나의 집안이 되겠는가?(日本密邇高麗, 開國以來, 時通中國, 至於朕躬, 而無一乘之使以通和好. 尙恐王國知之未審, 故特遣使持書布告朕心, 冀自今以往, 通問結好, 以相親睦. 且聖人以四海爲家, 不相通好, 豈一家之理哉?以至用兵 :『元史』卷6 本紀第6 世祖)"라고 합니다.
  
『원사(元史)』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동부나 북부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모르는 여진인이나 거란인들은 모두 몽골인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한나라 땅에 태어나 자란 여진인들은 중국인(한족 : 漢族)과 같이 대우한다(『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중국에서 자라서 중국어를 말하고 중국인과 동화된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하지만 여진이나 거란인들은 몽골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동안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대로라면 이상한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몽골 - 여진 - 거란 등이 각기 다른 종족처럼 분명히 배웠거든요.
  
그런데 위의 기록이나 그 동안의 논의를 보면 몽골·여진·거란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만 기준이 되는 것은 한족화(漢族化)하여 쥬신의 특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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