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5313
전장의 이순신, 그가 가장 무서워한 것은?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명량>에 안 나온 이야기
14.08.23 20:42 l 최종 업데이트 14.08.23 20:42 l 김종성(qqqkim2000)
▲ <명량> 전투 중의 이순신(최민식). ⓒ CJ 엔터테인먼트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이순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일본 해군은 이순신만 만나면 번번이 작아졌다. 일본 해군의 최정예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이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하자, 관백(총리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직할 해군을 이순신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1592년 하반기의 한산도대첩 및 안골포 해전 이후로 도요토미는 '이순신을 아예 상대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원균도 이순신의 경쟁자가 되지 못했다.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이순신과 신경전을 벌였지만, 1597년 하반기 명량해전 직전의 칠천량 해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로 그는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이처럼, 이순신의 경쟁자는 일본 해군은 물론 조선 해군에도 없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적'이 이순신을 괴롭혔다. 그것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균이었다. 이순신은 일본군이나 원균보다도 병균 때문에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었다. 병균이 이순신의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년 4개월 뒤인 선조 26년 8월 10일(양력 1593년 9월 4일) 작성한 보고서에서, 이순신은 그때까지의 전사자 규모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신이 거느리는 수군만 하더라도, …… 본래 정원은 6천 2백여 명인데, 작년과 금년에 전사한 사람과 금년 2월·3월부터 지금까지 병으로 죽은 사람이 6백여 명이나 됩니다."
1년 4개월간 이순신 부대인 전라좌수군의 사망자 숫자는 6백여 명이었다. 6백여 명 중에서 전사자는 많아봤자 150여 명이었다. 나머지 450명 정도는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이다. 병사자가 전사자보다 3배 정도 많았던 것이다.
전라좌수군 6천 2백여 명 중에서 450명 정도가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하면 "전염병 사망자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정을 들여다 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다. 보고서에서 이순신은 이렇게 한탄했다.
"전염병까지 크게 번져 군영의 군졸들이 태반이나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보고서를 쓸 당시에 전라좌수군 병사의 태반은 전염병에 감염된 상태였다. 아직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병에 걸린 병사가 절반 혹은 그 이상이었다. 병사의 절반 이상이 전염병 때문에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 <명랑> 전투신. ⓒ CJ엔터테인먼트
전투 아닌 전염병으로 병력의 80% 감소
보고서에서 이순신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의 상황을 보면 '사망자가 속출한다'는 표현을 더욱 더 실감할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망자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쓴 다음 해인 1594년 봄을 기준으로 할 때, 이순신 휘하에 있는 충청·전라·경상 삼도 해군의 병력은 2만 15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때의 이순신은 전라좌수군뿐만 아니라 삼도 전체의 해군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였다. 1594년 봄까지만 해도 2만 1500명 정도였던 삼도 해군 병력이 1595년 봄에는 4100명 정도로 감소했다. 1년 만에 80%나 감소한 것이다.
그런데 1593년 연말부터 1596년 연말까지는 남해상의 해상 전투가 소강 국면에 있었다. 그래서 1594년 봄부터 1595년 봄 사이에 전사자가 발생할 일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병력이 80%나 감소한 원인은 전투가 아닌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이 기간에 전염병 치료를 목적으로 군에서 방출된 병사들이 있었다. 그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따라서 80% 감소분의 대부분은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였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보다 훨씬 많은 수의 병사가 병균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던 것이다.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는 명나라군도 겪었다. 파견군 사령관 이여송이 이끌고 온 명나라 병력은 약 4만 명 정도였다. 이 중에서 절반 정도가 기병대였다. 그런데 기병대가 보유한 군마 1만 2여 필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명나라 기병대가 전염병 때문에 쑥대밭이 된 셈이다. 군마 없는 기병대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병균은 일본군도 가만 두지 않았다. 선조 26년 2월 9일자(1593년 3월 11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남부 지방에 주둔한 일본군은 전염병 피해를 크게 입었다. 일례로, 경상도 김해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전염병 확산에 놀라 김해성을 사실상 비워주었다. 창원을 점령한 일본군은 활동성을 상실하고 성내에서 조용히 지냈다. 조선군을 쉽게 꺾던 일본군도 '병균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전염병 피해로 조선군 병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이순신도 남을 걱정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순신 본인도 전염병에 걸렸던 것이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1594년 상반기에 전염병을 앓았다. 삼도 해군의 80% 가까이가 사망할 당시에 이순신도 전염병에 걸렸던 것이다. 이 시기의 <난중일기>에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했다"거나 "종일 신음했다"는 등의 문장이 많이 나온다. 일본군 앞에서는 호랑이 같았던 이순신도 병균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염병은 명장 이순신을 심하게 괴롭혔다. 이순신은 '보이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는 부하들을 별로 잃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병균'과의 전투에서는 매우 많은 부하를 잃었다. 병균과의 전투에 관한 한, 이순신은 별다른 전략을 세울 수 없었다. 여기에는 거북선도 소용없었다.
이순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병사들에게 가급적 많은 휴식을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군량미도 충분치 않고 잠자리도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에서, 병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휴식밖에 없었다.
병균은 임진왜란뿐 아니라 많은 전쟁에 개입했다
▲ 이순신 장군의 흉상.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병균은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쟁에 개입했다. 어쩌면, 모든 전쟁의 당사자는 최소한 셋이었는지도 모른다. 침략을 가한 군대, 침략을 당한 군대 그리고 병균의 군대. 대부분의 전쟁은 이 3자의 참여 속에 치러졌는지도 모른다.
소설 <삼국지연의> 말고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적벽대전 당시 조조의 군대가 패배한 결정적 원인은 전염병의 확산에 있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국가인 아스텍 제국이 스페인 사람 코르테스가 이끄는 소규모 군대에 패배한 진짜 원인은 천연두의 유행에 있었다.
잉카제국 역시 천연두·마진·디프테리아 등의 전염병에 의해 멸망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는 전사자보다도 병사자가 훨씬 더 많았다. 이처럼 전쟁은 인간의 군대보다 병균의 군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예가 많다.
전쟁이 병균의 영향을 받는 것은,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부터 인간의 건강 상태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전쟁에 동원되는 병사들은 의식주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태에 놓인다. 이로 인해 건강이 약해진 수천·수만의 병사들이 공동 활동을 하다 보니, 병균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편안한 의식주를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병균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A국가의 군대가 들을 밟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B국가를 침공할 경우, 들과 산과 강을 포함한 자연환경은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인간이 전쟁으로 파괴한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자연은 보복을 가한다. 이런 보복을 집행하는 것이 바로 병균이다.
인간은 평소에는 편안한 의식주의 도움에 힘입어 병균보다 우위에 있지만, 편안한 의식주를 벗어나서 동료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순간부터 인간은 병균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쟁에 나서는 순간부터 인간은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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