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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재만한인의 교육구국운동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1910년대 만주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 3) 재만한인의 교육구국운동
 
 
1910년을 전후로 하여 만주에서 한인사회의 지도적 활동을 하던 중심인물은 구춘선(具春先), 서일(徐一), 유인석, 백삼규(白三圭), 이동춘, 이명순(李明淳), 여준(呂準), 윤세복(尹世復), 이회영, 이석영, 이시영, 이상룡, 김동삼(金東三), 이동녕, 황병길(黃丙吉), 김약연(金躍淵), 김영학(金永學), 한명서(韓明瑞), 유동열, 맹동전(孟東田), 주진수, 유일우(劉一優), 이원식(李元植), 이탁(李鐸), 박은식(朴殷植), 박경종(朴慶鍾), 이광(李光), 윤기섭(尹琦燮), 김좌진(金佐鎭) 등 명망있는 각계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서간도와 북간도를 중심으로 하여 한인사회를 지도하고 국내는 물론 노령, 블라디보스톡의 배일거두 이동휘, 니콜리스크의 문창범(文昌範), 이범윤 등과 상통하면서 항일운동의 온상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인사회의 지도적 입장에서 개간을 통한 한인들의 경제적 기반조성을 돕고 학교설립 등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일에 전력을 집중하고 자치 및 항일단체의 조직을 서둘렀다.
 
압록강 대안 서간도의 경우는 전 관리, 유학자, 의병, 애국계몽운동가, 종교인, 교사 등 많은 인사가 국권회복을 꿈꾸고 있었는데 교육과 종교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 개간이 시작되어 한인부락이 형성되고 부락이 형성되어 4,5명 이상의 수학아동만 있으면 서당·학교를 만들었다. 이러한 결과는 주권의 상실이 교육부재에 있었으므로 민지(民智)를 개발시켜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퉁화/통화현 허니허/합니하(哈呢河)의 이시영은 개간으로 생활터전을 다지면서 본국에서 오는 청장년을 규합하여 교민사회를 조직 하였다. 그는 조만간에 일본과 미·러·중국이 개전할 것이고 그러한 기회에 한국이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력양성이 급선무임을 주지시켰다.
* 대안 : 강, 호수, 바다 따위의 건너편에 있는 언덕이나 기슭
* 민지(民智) : 국민의 슬기나 지혜
 
1911년 4월에 뤼허/유하현 산위엔푸/삼원포에는 민단의 성격을 가진 경학사(耕學社)와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가 설치되어 병농일치의 교육에 들어갔다. 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만주를 독립운동기지화하기 위한 건설운동의 첫번째 작업으로 많은 시련 속에 시작되었다. 현지 중국 당국의 법적 보호를 얻고 현지민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신민회의 목적을 그대로 계승하여 산업·교육·권리를 실현시켜야 했다. 특히 신흥강습소는 사실상 무관학교였으며 연무장으로 길남사(吉南社)를 설치하고 재산형성을 위해 ‘신성호(新成號)’를 설치하였으므로 현지의 반응은 호의적일 수 없었다. 오히려 일제세력의 선도자로 중국인들에게 오해되어 토지 및 물자의 불매동맹을 당하기도 하였다.註 030
* 삼원포(三源浦) = 삼원보(三源堡)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신민회사건으로 건설자금이 조달되지 못한데다 설상가상의 현지여건으로 경학사는 결국 해산되었고 신흥강습소는 유지회가 폐교의 위기를 넘긴 끝에 1912년 부민단(扶民團)의 탄생과 함께 회생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으로 수많은 독립군지도자를 배출하였다.
* 안악사건(安岳事件) = 105인사건 = 안명근사건 : 일제가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날조해 애국자들을 탄압한 사건
 
이 시기에 서당이나 사숙 규모를 가진 교육기관이 여기 저기에 세워졌는데 학교체제를 갖춘 것으로는 합니하중학교(哈呢河中學校), 석묘자소학교(石廟子小學校), 회인현 성내소학교(城內小學校), 대황구소학교(大荒溝小學校), 헝다오/횡도천(横道川) 항도의숙(恒道義塾) 등이 있었다. 합니하중학교는 스먀오즈/석묘자에 설립했다가 이전한 것인데 이시영이 감독이었고 김순경(金淳卿) 등이 교사로서 18세에서 24,5세의 학생이 60여 명 재학하고 있었다. 또 석묘자학교는 이동녕이 감독이었고, 김성삼(金省三) 이병식(李丙植), 이건수(李健守) 등이 교사였다. 그리고 회인현 성내소학교는 이원식이 교장이었고 양기하(梁基河), 이극로(李克魯), 신필수(申必秀) 등이 교사로 있었다.
 
이들 학교에서는 역사·지리, 산술, 이과, 수신, 독서, 한문, 체조, 창가등을 교과목으로 채택하였는데 현채(玄采)의 『유년필독(幼年必讀)』과 같은 국내에서 사용금지된 교과서를 사용하였다. 또 학생들은 독립가, 애국가, 보국가, 소년가 등을 애창하는 등 학교는 배일사상의 양성소인 동시에 배일자의 집회사무소였다.註 031 점차 생활도 초기보다는 안정되고 학교도 설립되는 등 항일운동의 기반은 조성되어 갔다.
 
이와 같은 한인사회의 형성과 항일온상의 조성은 두만강 대안 북간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12년 당시 한인의 교육열이 고조되어 약 80 여 개의 학교에 2천여 명의 생도가 재학중이었다.註 032
 
특히 쥐즈지에/국자가에는 1907년 8월 통감부간도파출소가 설립될 당시까지 용정촌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경영하던 이상설, 박무림(朴茂林) 등이 1909년 간민자치희(墾民自治會)를 조직하였다. 이 자치회는 그후 중국 당국의 권유로 ‘자치’를 개칭하여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로 하였는데 독립자치를 표방하였기 때문이었다. 간민교육회는 중국측의 감독하에 내용적으로는 항일교육을 시켰으며 학당내에 농림학교, 소학당, 임시교원양성소가 설치되었다. 회장은 이동춘으로 기독교 신자가 많이 관여하여 종교와 교육으로 배일사상을 고취하면서 후일 ‘신한국’의 건설이 자신들의 천업(天業)이라 주장하면서 블라디보스톡의 배일파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註 033
 
롱징/용정촌에 설립되었던 서전서숙은 만주 한인교육의 요람지로서 많은 지사들을 배출하였으나 간도파출소 설치 후 해산되고 그 출신자들은 각지에서 그 정신을 계승하였다. 1908년 4월 27일에 서전출신인 김약연이 허롱/화룡(和龙/和龍)현 태랍자 밍동/명동촌(明东村/明東村)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개설하고 서전서숙 설립자의 한 사람인 박무림을 명예숙장으로 모셨다. 교사는 김약연, 김학연(金學淵), 남위언(南葦彥) 등이 있고 뒤에는 정재면(鄭載冕)을 초빙하였다. 그리고 1910년 3월에는 명동중학교를 병설하고 황의돈(黃義敦)을 초빙 국사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명동중학에는. 국내 만주, 노령에서도 청년들이 모여들었으며 1911년에는 여학교도 병설하였다. 이와 같이 서전서숙이 모체가 되어 설립된 명동서숙이 명동중학으로 발전했으며 명동촌은 만주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명동중학에서는 병식체조를 하였으며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소년동지회(少年同志會)를 조직하였다.註 034
* 쥐즈지에/국자가(局子街) :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延吉, 옌지)의 옛 이름으로, 실제로 있는 도로명
* 태랍자(太拉子)
 
이외에도 회인현내에서는 윤세복, 이석대(李碩大)가 학교를 설립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윤세복은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란 인쇄물을 발행하였다. 그 내용은 “조선(祖先)의 기업(基業)을 잃은 것은 자손의 오욕이며 민심의 단결과 활동에 의하여 회복을 기할 수 있다. 국기를 고양하고 평등자유주의에 의하여 무한한 복락을 얻게 될 것”이란 것이었다.註 035
* 회인현(懷仁縣) : 환런/환인현(桓仁县/桓仁縣)
 
훈춘/혼춘에는 중국측 관립고등소학당과 여학당이 있었고 청와이/성외리(城外里), 마췐즈/마권자(马圈子/馬圈子), 화슈디샤/화수저하(桦树底下/樺樹底下)에 각각 소학당이 있어 여기에서 한인학생들이 일부교육을 받았고 한인교육기관이 각지에 있었다. 간민교육회 이외의 각지 학교를 보면〈표 3〉과 같다.
 
〈표 3〉 재만한국인교육기관

〈표 3〉에서 본 바와 같이 조사되지 않은 학교를 포함 약 80여개교에 2천 2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는데 간도총영사관의 조사에 의하면 배일열이 고조되어「애국가」「소년보국가(少年保國歌)」「상봉유지가(相逢有志歌)」「전진가(前進歌)」를 고창하면서『오수불망(吾讎不忘)』『유년필독』등을 통하여 실지회복을 고대하고 있었다.

 

 
 
 
 
 
註 030 채근식(蔡根植), 앞 책, p.48.
 
註 031 (비/秘)「압록강대안재주선인의 상황(鴨綠江對岸在住鮮人ノ狀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2개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32 (비/秘)「투먼/도문강대안이주선인의 상황(圖們江對岸移住鮮人ノ狀況)」, 메이지(明治) 45년(年) 3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33 주 32)와 같음.
 
註 034 (비/.秘)「투먼/도문강대안이주선인의 상황(圖們江對岸移住鮮人ノ狀况)」, 메이지(明治)45년(年) 3월(月),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35 (비/秘)「재외불경선인의 언동(在外不逕鮮人ノ言動)」,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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