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만주독립운동 기지화의 배경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1910년대 만주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 2) 만주독립운동 기지화의 배경
1910년을 전후로 하여 만주와 노령에는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망명·이주하였다. 이들의 망명은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이 일제의 무력으로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되었다는 데 있었다. 의병진압과정에서 보여 준 일제의 비인도적·군사적 만행과 민족운동자의 체포 등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갈수록 억압이 가중되었고 신작로·철로 등 교통망의 정비와 군사적 기동력에서 일군경을 대적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만주나 노령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면서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을 쟁취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만주나 노령은 국내와 강을 사이로 하여 접해 있으므로 교통이 쉽고 국내정세를 속히 관찰·대응할 수 있으며 이미 한교사회가 구축되어 있어 항일운동의 기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과는 전통적으로 우의적인 양국관계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시 반식민지적 입장이었기 때문에 공동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이미 만주에는 한인사회의 형성과 함께 1906년에는 서전서숙(端甸書塾)이 설립되었고, 각지에 작은 규모의 서당이 만들어져 항일의 온상이 준비되고 있었다. 1907년에 일제가 통감부(統監府) 간도파출소를 설치한 것은 한국인들의 만주 이주와 항일독립운동 기반 조성에 대비하여 이를 통제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한인사회의 성장을 초기에 막아 보려는 것이었다. 또한 만주에는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정순만(鄭淳萬), 여조현(呂祖鉉)·이동춘(李同春) 등 명망있는 인사들이 노령의 이범윤 등과 함께 한국인 사회의 지도적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한국인 사회를 기반으로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고, 1910년을 전후로 하여 독립 운동기지 설치문제가 본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만주독립운동기지 설치계획은 국내 독립운동의 연장으로 무력투쟁으로 일관하던 유인석(柳麟錫)으로 대표되던 의병계통과 애국문화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신민회(新民會)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의병과 애국문화계몽운동의 계통은 항일독립 운동의 양대 조류일 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맥락에서 척사위정사상과 개화사상에 연원을 둔 것이기도 하다.註 017
만주를 독립운동기지로 설정한 것은 항일독립운동상에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서술한 만주가 갖는 그 입지적 조건 뿐만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이 무력투쟁, 즉 독립전쟁으로 그 방향을 귀일시켰다는 데 있다. 그것은 애국문화계몽운동 등 장기적이고 점진적 항일운동조차도 불가능하며 궁극적으로 일제세력을 구축하는 것만이 완전한 독립이라는 독립전쟁론으로 그 방향을 잡았다. 그 결과 의병운동이나 애국문화계몽운동이 독립전쟁을 전개시키기 위하여 국내진공이 가능한 만주를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의병과 애국문화계몽운동계통의 만주독립운동기지건설은 그 사상적 배경과 투쟁노선의 일관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식으로 합일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민족운동사에 있어서 큰 진전이기도 하다.
* 귀일 : 여러 갈래로 나뉘거나 갈린 것이 하나로 합쳐짐
* 진공 : 적을 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감
그러나 목적이 같으면서도 독립운동기지의 근거지 건설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의병계통의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구상은 유인석에 의하여 시작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인석은 이항로/이항노(李恒老)의 문인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였다. 또한 개화파를 적당(賊黨)으로 규정하고 김홍집(金弘集)정부의 제 개혁을 국변으로 규탄하면서 전후의 흉적배가 군주를 꾀어 적을 끌어 들였다고 매도한 척사파의 거두였다.註 018 1895년 말에는 그의 문인인 경기도 지평(砥平)의 이춘영(李春永), 강원도의 안승우(安承禹), 경상도의 서상열(徐相烈), 이필희(李弼熙), 신지수(申芝秀), 이범직(李範稷)이 기의하였고, 이들에 의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어 ‘복수보형(復讎保形)’의 기를 들었다. 그는「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격고내의백관(檄告內外百官)」등의 격문을 전국에 발하고 의병의 전국적 분기를 호소하여 부대를 편성 하였다.註 019 유인석 부대는 제천(堤川), 단양(丹陽), 청풍(淸風), 평창(平昌)에서 일군을 격퇴시키고 충주성(忠州城)으로 진입하였으나 정부군과 일군의 반격으로 패배하여 해산되었다. 유인석은 서토(西土 ; 황해도·평안도)로 이동 ‘다강용(多强勇)·정기예(精氣銳)’의 의군을 모집하여 ‘부진지계(復振之計)’를 계획하였으나 정부군의 추격으로 1896년 8월에 약 22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봉천성 관뎬/관전(宽甸/寬甸)현 샤젠/사첨(沙尖)으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훈/혼강(파저강/婆瀦江)에서 회인현(懷仁縣) 현재(縣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 복수보형(復讎保形) :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전통/상투와 의복을 보존한다
* 부진(復振) : 다시 떨침. 다시 진작. 소생. 회복.
* 회인현(懷仁縣) : 환런/환인현(桓仁县/桓仁縣)
* 현재(縣宰) : 현의 장관
그는 1897년에 국왕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다음해 다시 출국하여 향약(鄕約)을 조직하고 동지를 결속하면서 ‘토복(討復)’을 계획하고 있었다.註 020 그러나 서토에서의 ‘부진지계’ 즉 황해·평안의 관서를 근거지로 구상하고 있던 그는 1900년에 다시 입국하여 황해도 평산(平山)의 산두재를 근거로 하고 관서지방 일대에서 강회를 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07년 군대해산으로 의병운동이 재기되자 이 지역에서 그의 문인 박정빈(朴正彬)·이진룡(李鎭龍)이 거의하여 용명을 날렸다. 그러나 야만적인 일제의 군사력에 희생이 큰 의병전을 보고 국내에서의 항일전은 절망적이고 실력을 양성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국외에 건설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 소명(召命) : 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
* 토복(討復) : 토벌하여 나라를 되찾음
* 평산(平山) : 황해도/황해북도 평산
* 용명 : 용감하고 사납다는 명성
그는 1907년 7월 13일「여동문사우서(與同門士友書)」에서 국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여기에 충의호걸지현(忠義豪傑之賢)을 모아 정예분자를 양성, 형세를 기다리다 기회를 얻어 부흥을 기하고 싶다고 토로하고 있다.註 021 그는 노령 연해주(沿海州)를 독립운동기지의 후보지로 생각하고 문인 박치익(朴治翼)을 선행시켜 망명자를 수용하기 위한 준비를 지시하기도 하였다. 유인석의 근거지론은 십삼도의군대진소(十三道義軍大陣所)의 허위 군사장(許蔿 軍師長)과 이강년(李康年)에게 보낸 「여제진별지(與諸陣別紙)」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註 022 십삼도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에 대하여 ‘사심위태(事甚危殆)’라 하여 크나큰 근심을 표시하면서 현재로서의 상책은 전국 의병이 상호호응하여 지구하고 기회가 성숙되기 전에 그들이 지배체체를 조직치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세 불리하여 여의치 않으면 ‘북계(北計)’가 만전지책(萬全之策)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인석이 말한 ‘북계’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근거지 건설을 제시한 것으로 그 후보지가 노령에서 만주로 바뀐 것이다. 그 이유는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근저로서 삼림과 절험의 요지인 무산(茂山), 삼수(三水), 갑산(甲山), 장진(長津), 자성, 후창, 강계가 있어 그 지세가 지구전에 알맞으며 사람들이 강경(强勁)할 뿐 아니라 산포수들은 사격이 능함을 예로 들었다. 그리고 북간도와 서간도에는 한국 이주민이 많아 의병모집, 군자금 조달이 가능함을 들어 근거지로 적합함을 말하였다. 이와 같이 유인석은 노령·만주 특히 백두산 중심의 근거지 설치를 계획하고 있었고 그 스스로가 의병 활동을 통하여 실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관일약(貫一約)註 023에서도 나타나듯이 유교 조직으로서 사(士)를 중심으로 한 민중조직이었고, 그의 근거지 사상의 배경에는 유교조직의 전국적 확대를 위한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농후하여 민중적 호응을 얻는데 실패하였다.註 024
* 관일약은 현실을 ‘나라’와 ‘도’와 ‘몸’과 ‘사람’이 망하는 상황으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리고 성리학적인 가치 기준에서 규정한 이 네 가지 요소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로 꿰어야[貫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음으로 신민회의 만주독립 운동기지 건설계획은 1909년 봄경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적 비밀조직으로 실력양성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신민회는 일제의 탄압과 세 불리로 항일운동의 성과보다는 희생만이 커가게 되자 독립운동기지를 만주에 설치키로 한 것이다. 1909년 초 신민회는 비밀간부회의를 열고 애국문화계몽운동이나 의병활동 등이 어면 형태든지 국내에서는 불가능하므로 국권회복의 최후쟁취 수단인 독립전쟁의 준비를 위한 기지건설과 독립군양성을 위한 만주 이주계획을 수립 하였다.註 025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주진수(朱鎭洙),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黨), 김구(金九), 김도희(金道熙)였고, 목적달성을 위한 75만원의 자금모집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실천에 앞서 현지 답사를 위하여 최명식(崔明植) 등을 선발대로 파견하였고, 7월에는 류허/유하(柳河)현 산위엔푸/삼원포(三源浦)로 이동녕, 이회영(李會榮), 주진수, 장유순(張裕淳), 이관식(李寬植) 등을 행상으로 가장시켜 보냈다. 또 한편 신민회의 중요간부인 안창호(安昌浩), 조성환(曺成焕), 이종호(李鍾浩), 김희선(金羲善), 유동열(柳東說), 이종만(李鍾萬), 이강(李剛), 김지간(金志侃), 이동휘 등이 각기 국내를 비밀리에 떠나 1910년 4월에 중국 청도(靑島)에서 모였다.註 026
* 삼원포(三源浦) = 삼원보(三源堡)
* 청도(靑島) : 산둥/산동성 칭따오/청도
청도회의는 안중근(安重根)에 의한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오 히로부미)의 총격사살로 일제가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 간부의 구속 내지는 모종의 중대음모註 027를 안 이들이 국외 탈출을 한 후 청도에서 앞으로의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한 회의였다. 회의는 급진·완진 등 많은 의견이 속출하고 대립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만주 지린/길림성 미샨/밀산(密山)현에 농토를 매수하여 토지개간사업을 행하고,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 애국운동의 중심지를 만들 것을 결정하고 일·이반으로 나누어 노령을 경유 목적지로 출발하였다.註 028
신민회의 서울 양기탁가회의와 청도회의는 독립운동노선의 방향설정을 위한 회의였던 동시에 만주독립운동기지건설을 결정한 중대한 비밀회의였다. 신민회의 이와 같은 계획은 황해도중심의 애국지사를 예비검속한 안명근(安明根)사건과 평안도중심의 지사들을 체포하기 위한 소위 사내(寺內 ; 테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양기탁, 윤치호(尹致昊) 등 600여 명을 구속, 105인을 재판에 회부한 신민회사건이 발생하여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회의에서 결정한 삼원포의 독립기지건설계획은 선발대로 이회영, 이시영(李始榮), 이석영(李石榮) 형제와 이동녕, 이상료(李相龍), 김창환(金昌煥), 주진수 등 7세대가 그해 연말과 1911년초에 이주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들은 근거지건설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경제적 기반을 조성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토지개간에 착수하여 수전경작에 관심을 두고 수리토양 등을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심지어는 중국인이 관심을 포기한 저수지, 황전 등을 싸게 사서 개간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유인석이 근거지에서 민중조직으로서 관일약이라는 정신주의적 방법을 택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註 029 이상룡 등에 의한 서간도 독립운동 근거지건설이 성공한 것은 바로 한인사회의 경제적 기초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데 있었다.
주
註 017 강재언(姜在彥), 「조선독립운동의 근거지문제(朝鮮獨立運動の根據地問題)」,『조선민족운동사연구(朝鮮民族運動史硏究)』1(도쿄/東京 : 청구문고/靑丘文庫, 1984).
註 018 『의암집(毅菴集)』권55(卷之五十五), 부록 연보(附錄 年譜), 임진 6월20일조(壬辰 6月 20日條).
註 019 『의암집(毅菴集)』권45(卷之四十五).
註 020 『의암집(毅菴集)』권55(卷之五十五), 부록 연보(附錄 年譜), 무술년 여름(戊戌夏).
註 021 『의암집(毅菴集)』권25(卷之二十五), 여동문사우서(與同門士友書).
註 022 『의암집(毅菴集)』권25(卷之二十五), 여제진별지(與諸陣別紙).
註 023 『의암집(毅蓮集)』권36(卷之三十六), 관일적약속(貫一約約束).
註 024 강제언(姜在彥), 앞 글.
註 025 채근식(蔡根植),『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 (대한민국공보처/大韓民國公報處, 1948), p. 47 ;『조선총독부법원판결기록(朝鮮總督府法院判決記錄)』메이지(明治)44년(年) 판결원본(判決原本) 18, 양기탁(梁起鐸), 임치정(林蚩正) 등(等) 16명(名)「보안법위반판결문(保安法違反判決文)」.
註 026 주요한(朱耀翰),『추정리갑(秋汀李甲)』(대성문화사/大成文化社, 1964), pp.43~44 ; 주요한(朱耀翰),『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삼중당/三中堂, 1963), pp. 114~115 ; 이광수(李光洙),『도산안창호(島山安昌浩)』(대성문화사/大成文化社, 1973), pp. 72~74.
註 027 확증(確證)은 박약하나「추정이갑(秋汀李甲)」pp. 35~41와「도산안창호(島山安昌浩)」초판(初版) p. 41에 의하면 신민회(新民會)의 이갑(李甲)이 정치적(政治的)으로 이용(利用)한 인물중(人物中) 메이지대 법과출신(明治大法科出身)의 재사(才士)이며 정치지망생(政治志望生)인 최석하(崔錫夏)란 사람이 있었고, 그는 이토(伊藤), 소네(曾彌) 통감(統監)과도 교분(交分)이 있어 이갑(李甲)과 안창호(安昌浩)가 이토(伊藤)과 회견(會見)한 일이 있다. 최(崔)는 청년내각(靑年內閣)을 조직하여 정치혁신(政治革新)을 하므로서(함으로써) 일본(日本)의 한국병탄예봉(韓國併呑銳鋒)을 막으려는 이상(理想)을 가졌던 인물(人物)이었다. 마침 안중근(安重根)의 이토총살사건(伊藤銃殺事件)으로 이갑(李甲), 안창호(安昌浩), 이종호(李鍾浩) 등이 체포됐을 때도 그가 중간(中間)에서 활약 석방되었다. 이때 석방과 동시(同時)에 최(崔)는 청년내각문제(靑年內閣問題)를 다시 제기했고 이 안(案)은 일본(日本)의 문치파(文治派)에서도 긍정적(肯定的)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 안(案)이 거졀(拒絶)되면 다시 구속(拘束)하겠다고 강압(强壓)이 있었으므로 신민회(新民會)의 이갑(李甲), 안창호(安昌浩), 이종호(李鍾浩) 등은 개화당(開化黨)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고 또 망국(亡國)의 책임(責任)을 뒤집어 쓸 어려운 처지(處地)였으므로 드디어 국외탈출(國外脫出)을 결정(決定)했다고한다.
註 028 주요한(朱耀翰),『추정이갑(秋汀李甲)』.
註 029 강재언(姜在彥), 앞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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