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독립군의 관내이동과 군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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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연합군이 동경성 다뎬즈/대전자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한중 양군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여 간교한 이간질이 행하여지기 시작함으로써 양군 사이에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동닝/동녕현 전투 때 후속부대를 보내 주기로 약속하였던 중국군이 고의적으로 부대파견을 하지 않음으로써 독립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전하게 되었다. 적색분자들의 이간질과 장병들 간에 사소한 감정대립으로 중국군 지휘관 우이청/오의성 차이스롱/채세영(蔡世荣/蔡世榮)이 철석같은 약속을 버리고 우군을 사지에 빠뜨렸던 것이다. 더우기 사령관 이청천을 비롯하여 공진원(公震遠)·조경한(趙擎韓)·최명록(崔明錄)·이당주 등 수십 명의 간부를 친일파라는 언어도단의 누명을 씌워 구속하고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기까지 하였다. 남의 땅에서, 남의 세력 밑에 구국항쟁한다는 것은 고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 간부들은 어디에서나 불굴의 의지로 불의에 강력히 항쟁하였다. “우리들을 친일파라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나라를 잃은 국민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항일전을 계속하여 왔으며 또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원수인 왜놈에게 죽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항일전을 펴온 중국인에게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외쳤다. 이러한 독립군 간부들의 당당한 기개와 불굴의 항쟁에 중국군도 차츰 오해가 풀려 간부들은 석방되고 독립군의 무기도 내주었다. 그리고 독립군을 모략 중상하였던 적색분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등 중국군은 사태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그동안 중국군으로부터 받은 정신적·물질적 피해가 너무나 극심하였으며 중국군에 대한 불신감을 씻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재만 독립군이 극한적 상황에 빠져 들었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는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독립군 간부들을 중국의 정규 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이청천을 군사양성의 책임자로 할 것을 결정하고 독립군의 관내 이동을 지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재만독립군 간부들은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진로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 회의 결과 중국군과의 합동작전은 믿을 수가 없고 정부의 지시가 있으니 부득이 부대를 관내 즉 중국본토로 옮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독립군을 일시에 이동시키기는 어려우며 또 10여 년간 항일전투장인 만주지역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우선 간부 중 일부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군관양성사업에 주력하고 독립군 중에 군관학교입학지원자를 선출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만주에 그대로 잔류하여 최후까지 대일 유격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의하여 1933년 10월 20일 경 이청천·오광선·공진원·최관용·조경한 등 32명이 정부의 소환으로 중국본토로 들어가고 잔여부대는 최악(崔岳)·안태진(安泰振)이 지휘하여 무링/목릉·닝안/영안·미샨/밀산(密山) 등 산림지대로 옮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혁명군은 이미 1932년부터 간부진이 난징/남경방면을 왕래하면서 중국정부에 지원교섭을 벌였으며 주로 남경 광저우/광주(广州/廣州)방면에 체류하면서 우리 정부와 연락하다가 그대로 관내에 머물러 새로운 항일전쟁 준비에 헌신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 등 독립군 간부들이 중국본토로 들어오자 우선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중국군관학교 뤄양/낙양분교(洛阳/洛陽分校)에 입교시켰다. 이때가 1934년 봄으로 한국인 훈련생 90명만으로 1개반이 특설되어 광복전쟁을 담당할 지휘관으로서의 훈련을 중국장교들과 같이 받게 되었다.
한국 훈련생들은 모두 중국군관학교의 교과과정에 의하여 훈련을 받았는데 교과는 정치훈련과 전술에 치중되었다. 그리고 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범석(李範奭)이 특별훈련반의 학생대장으로, 오광선이 학생반장이 되었다.
이 한국인 특설반은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1년 후 제1기 졸업생을 내고는 끝나고 말았다. 원래 중국의 군관학교에서 한국청년을 교육한다는 것이 국제문제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하고 훈련생들도 본명을 감추고 가명으로 학적부를 작성하여 훈련을 시켰던 것인데 끝내 이것이 일본측에 탐지되어 버렸고 일본정부가 중국정부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게 되니 중국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특설반 훈련은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제1기 졸업생들은 임시정부의 사정으로 아직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편성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던 만큼 우선 중국군 장교로 임명되어 중국군 각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1937년 중일전쟁의 개전과 함께 대일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후일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었을 때는 한국광복군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7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군은 중국과 전면전을 전개하여 중국영토를 잠식할 계획을 갖고 이날 베이핑/북평(北平) 부근 라오고차오/노구교(老沟桥/老溝橋)에서 야간훈련을 전개하던 중 사방 1명이 실종되었다는 구실로 느닷없이 부근에 있던 중국군에 대하여 총격을 가하였다. 남의 나라 그것도 그 나라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부근에서 야간 전투훈련을 한다는 것부터가 벌써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더우기 1명의 사병이 실종되었다 하여 사실을 확인하여 보지도 않고 중국군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일이었다. 이것은 일본군이 오랜기간 마음속으로 계획하여 온 행동으로서 중국군과 전면전쟁을 전개할 구실을 만들기 위한 흉계였다. 일본군의 뜻하지 않은 총격을 받은 중국군은 이제까지 은인자중하였던 태도를 버리고 강력하게 반격을 감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중국군의 반격이 중국정부의 계획된 무력행사라 트집잡고 전면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은 선수를 써서 관동군(關東軍) 소속부대와 우리나라에 있던 20사단을 파견하여 7, 8월 중에 베이핑/북평·텐진/천진(天津)지방은 물론 장자커우/장가구(张家口/張家口)·스자좡/석가장(石家庄/石家莊)을 점령하였고 해군함대를 출동시켜 상하이/상해(上海)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되어 중일전쟁은 개전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패전을 거듭하여 1937년 7월에서 1938년 12월까지 중국군 사상자가 110여만 명에 이르렀고 이에 반하여 일본군 사상자는 70여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중일전쟁이 개전되자 우리의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대일항전책을 강구하였다. 정부는 일본과 맞서 싸우는 중국정부와 협력하여 전쟁에 참가한다면 전쟁에 승리하였을 때 우리나라의 독립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하여 적극적으로 참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우선 군무부 내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계획과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고 유동열(柳東說)·이청천·이복원(李復源)·현익철·안공근(安恭根)·김학규 등 6명을 군사위원으로 선임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많은 독립군을 전쟁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군인 및 군사간부 양성이 시급하여 특별예산을 마련하고 1개 연대의 군대 편성과 군사간부 200명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동지회(同志會)·국민회(國民會)·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단합회(團合會)·애국당(愛國黨) 등 6개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여 정부의 대일항전에 적극 참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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