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Ⅳ. 韓國獨立軍과 吉林自衛軍·中國國民救國軍의 연합 항일" 중 "3. 한국독립군과 중국국민구국군과의 연합작전"만 가져왔습니다
3. 한국독립군과 중국국민구국군과의 연합작전
한국사총설DB > 국사관논총 > 國史館論叢 第44輯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국문]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Ⅳ. 韓國獨立軍과 吉林自衛軍·中國國民救國軍의 연합 항일
1932년 11월 21일 우창/오상현 총허/충하진에서 카오펑린/고봉림부 관병과 이별하고 동쪽으로 떠나 어무/액목(额穆/額穆) 방향으로 이전하였다. 22일 읍동쪽 샤오청즈/소성자(小城子)에 이르러 인수(人數)를 검사하였다. 이때 강극오(姜克誤)가 부대를 거느리고 여기에서 회합하고 기타 한군의 소부대들은 총사령부에 집중했는데 부대의 총 인수는 3,000여 명에 달하였다. 23일 군사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심만호(瀋晚湖),註 070 공진원(孔鎭遠), 강진해(姜鎭海), 마창인(馬蒼仁) 등을 파견하여 둥닝/동녕(东宁/東寧)으로 떠나 중국국민구국군 왕더린/왕덕림(王德林)부와 연합 항일하도록 상담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월 30일 부대를 오상현 샤허즈/사하자(沙河子)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제1단장 오원(吳願)의 부대와 카오펑린/고봉림의 잔여부대(약 1개단의 병력)를 남겨 당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적들이 주력부대를 추격하지 않도록 방지하게 하였다. 12월 17일 참모 이우정이 영솔하는 편의대(便衣隊)에게 명령을 내려 지린/길림과 하얼빈/할빈구간을 에돌면서 선전과 정찰을 하고 적의 군사설치를 파괴하게 하였다. 또 심준괴(瀋俊魁)를 대장으로 하는 별동대(別動隊)를 조직하고 톈린/전림(田霖)의 의용군과 연합하여 전적으로 적의 교통운수를 파괴하고 철도와 교량을 폭발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남은 주력부대 2,000여 명을 3개 종대(縱隊)로 나누어 동월 28일 어무/액목(额穆/額穆)로 떠났다.
* 영솔 : 부하, 식구, 제자 등을 거느림.
* 편의대(便衣隊) : 중국(中國)에서, 무장(武裝) 없이 적지(積地)에 잠입(潛入)하여, 후방(後方)을 교란(攪亂)하고 적정(敵情)을 탐지(探知)하던 부대(部隊).
1933년 1월 4일 이청천은 2,000여 명의 독립군 주력을 영솔하여 어무현성(지금 툰화/돈화현으로 됨) 동쪽 5리쯤 떨어진 까오샨툰/고산둔(高山屯)에 숙영하는 한편 사람을 파견하여 중국국민구국군 선봉사령(先鋒司令) 야오전샨/요진산(姚振山)을 만나보게 하였다. 생각밖에 요진산은 둥닝/동녕 총부에서 보낸 위급한 편지를 받고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동녕으로 떠났다. 한군은 부대를 약간 정돈하고 계속 동쪽으로 떠났다. 동월 17일 한군은 닝안/영안(宁安/寧安) 난후터우/남호두(南湖头/南湖頭)에서 요씨와 만나 요즘 영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게 되였는데 정말 사람들을 실망케 하였다.
원래 한국독립군이 동정(東征)을 시작한 20여 일내에 지둥/길동지구(吉东/吉東地區)의 정세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32년 12월 24일 일본군은 탕쥐우/당취오, 마잔샨/마점산, 수빙원/소병문 등 항일군에 대하여 토벌의 소위 대첩을 거두자 약 2개 사단 이상 되는 일본군과 수만명의 괴뢰군을 끌어모아 길동지구의 국민구국군 왕더린/왕덕림부를 향해 대거 공격하였다. 동월 27일 일본군 제10사단 히로세 주스케 중장(廣瀨壽助中將)은 먼저 모다오스/마도석(磨刀石) 일대의 구국군(救國軍)을 습격하라고 소속 소노베 지대(園部支隊)에게 명령을 내렸다. 1933년 1월 1일 오후 마도석역전을 빼앗기고 당일 밤에 무링/목릉(穆陵)역전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였다. 동월 5일 수이펀허/수분하(绥芬河/綏芬河)도 함락당하였다. 9일 구국군총사령 소재지인 둥닝/동녕현도 겹겹이 포위당하였다. 13일 왕더린/왕덕림, 콩셴닝/공헌녕(孔宪宁/孔憲寧)(자는 야오천/요신/耀臣) 등이 600여 명의 전사와 가족, 부상자 등을 데리고 동녕성을 떠나 소련 경내로 철퇴하였고 동녕은 14일에 함락되었다. 동녕이 함락되자 구국군(救國軍)의 여부(餘部)는 사처에 흩어져 소식이 없었다. 이런 정황은 한국독립군으로 하여금 동진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연합항일의 방책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 지둥/길동지구(吉东/吉東地區) : 지린/길림성 북동부와 헤이룽장/흑룡강성 남동부를 포함하는 중국 동북부의 동부 지역
* 지대(支隊) : 본대에서 나뉘어져 별도로 행동하느 부대
동월 27일 한국독립군은 구국군 부총사령 겸 제2여 여장인 콩셴닝/공헌녕부대의 소재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합작항일할 것을 토의하게 하였다. 이때 콩/공(孔)부사령은 이미 소련 경내로 철퇴하여 콩/공부인(孔夫人) 가오쥔펑/고준봉(高俊凤/高俊鳳)여사가 대리부사령직을 맡고 있었다. 콩(孔)부인은 아주 열정적으로 한군대표를 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부 무기를 내놓아 한군은 무기없는 곤란을 좀 풀었다. 얼마 후 중국국민구국군 제 14혼성여 여장 차이스롱/채세영(柴世荣/柴世榮)註 071이 잔부 두개 연을 거느리고 난후터우/남호두에 왔다. 차이/채(柴)씨는 비록 실패했지만 구국의 의지는 잃지 않았다. 그는 의기가 당당하고 비범한 사람이다. 이청천이 그들과 합작항일하는 일을 상론하였는데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중한토일연합군(中韓討日聯合軍)’(이하 ‘연합군’으로 간칭)으로 조직할 것을 결정하고 그리고 재빨리 관내에 군사대표를 파견하여 원조를 구할 것을 결정하였다. 안투/안도(安图/安圖), 무송(抚松/撫松), 라오허/요하(饶河/饒河), 후린/호림(虎林), 바오칭/보청(宝淸/寶淸), 미샨/밀살(密山) 등 현을 근거지로 삼아 농사를 짓고 병사를 모으고, 군사교육을 실시하며 항일선전을 전개하여, 토일연합회(討日聯合會)를 조직하며, 유격전술로 적을 혼란시키고 군사물품을 빼앗으며, 역량을 키워 때를 보아 중동로 하얼빈/할빈과 수이펀허/수분하연선을 점령하고 서쪽을 쓸어버릴 것이다. 상론의 내용에 근거하여 한군(韓軍)과 차이/채여(柴旅)는 각각 관내로 사람을 파견하여 원조를 구하려 하였다. 한군에서는 참모장 신숙, 참모 김상덕(金尙德)을 관내로 파견하였다. 연합군이 건립된 후의 주요한 전적은 다음과 같다.
* 잔부 : 남은 부분? 남은 부대?
* 상론 : 서로 의논함
* 여/려(旅) : 군대, 부대
* 중동로 = 중동선 = 중동철도(中東鐵道)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1) 징포/경박호(镜泊湖/鏡泊湖)의 첫 싸움
1933년 2월 15일, 연합군은 안투/안도방향으로 전진하여 그 지구에 근거지를 세우려 했다. 부대는 산골짝길을 택하여 행진하고 있는 중에 일본군 시라카와(白川)부와 괴뢰군 장원훼이/장문괴(张文魁/張文魁)단이 어무/액목(额穆/額穆)방향으로부터 네 갈래로 나누어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연합군은 인차 행진을 멈추고 전투 준비를 하였다.
* 인차 : 곧
전군을 4개 대로 나누었는데, 1대는 북쪽 호수가에 주둔하고 경박호 얼음위로 몰려오는 적의 장갑차를 막아내게 하고, 2대는 상루와이/상로외(商芦崴)의 고강(高崗)(높은 언덕)을 점령하여 2참(站) 방향에서 습격해오는 적의 기병을 막게 하고, 3대는 샤오위슈고우/소유수구(小楡树沟/小楡樹溝)라는 요새에 매복하여 남쪽으로 기여드는 적을 막아내고, 4대는 한군 1부가 차이/채여(柴旅)를 배합하여 주둔지를 보호하면서 적시적으로 각 대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동시에 구국군 야오전샨/요진산부와 연락하여 야오/요여(姚旅)가 동쪽(닝안/영안과 둥징/동경성 방향)에 있는 적을 감시하여 연합군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게 하였다. 16일 해뜰무렵 베이후터우/북호두와 샤오위슈고우(小楡树沟/小楡樹溝) 두곳에서 먼저 싸움이 벌어졌는데 4시간을 거쳐 괴뢰군 1개 단을 몽땅 소멸하였다. 후루와이/호로외(葫芦崴) 1로(路), 적의 기병 1연(連)은 우리에게 차단되자 또 한개 단의 병력에 가까운 보병과 기병을 혼합하여 이악스레 달려들었다. 연합군도 포병 2연(連), 기관총대 2연(連)을 증원하여 베이다오고/북도구(北道沟/北道溝)로 에돌아 측면에서 적을 쳤는데 적들의 시체가 너저분 했고 겨우 목숨을 붙은 놈들은 밤도와 도망쳤다. 첫번째 전투가 승리하자 연합군의 군위가 크게 떨쳐 구국군의 여부는 분분이 모여들어 차이/채(柴)씨부는 다시 원기를 돋구게 되었다. 계속하여 연합군은 또 2월 28일, 3월 7일 닝안/영안 2참(站)과 산다오고우/삼도구(三道沟/三道溝) 등에서 연속 일본군과 괴뢰군을 족치여 승리를 거두었다.
* 참(站) : 정거장, 기관 사무소
* 배합 : 협동
* 이악스럽다 : 이익을 위하여 지나치게 아득바득하는 태도가 있는 듯하다.
* 밤도와 : 밤을 세워서
* 군위 : 군대의 위신
2) 바다오허즈/팔도하자(八道河子) 보위전(保衛戰)
동년 4월 14일 연합군이 받은 정보에 의하면 닝안/영안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약 2개 대대쯤 되는 모리모토(森本)부대와 동경성에 있는 괴뢰군 약 한개 단(團)쯤 되는 마차오즈/마초자(马超子/馬超子)부(部)가 합력하여 팔도하자의 한교 집거구(集居區)를 습격하려 시도했다. 이곳은 닝안/영안성과 170리(화리)나 떨어져 있는데 지세가 험준하다. 여기에 살고 있는 거민속에 한국 교민이 수백명 되고 토비들을 막기 위해 네 변두리에 포대를 세워 놓았다. 구국군이 연초에 실패한 후 많은 관병들을 이곳에 엄폐하고 시기를 노려 재기하려 하였다. 적들은 바로 이런 후환거리를 없애려 병력을 집중하여 ‘토벌’하려 했다.
* 화리(华里/華里) : 500미터
차이스롱/채세영(柴世荣/柴世榮)과 이청천은 이 항일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부대를 4로(路)로 나누어 응전하였다. 1로는 차이스롱(柴世榮)이 맡았는데 마창/마장(马厂/馬廠)의 서쪽문밖과 라오구/노고산(老姑山) 기슭에서 적의 측면과 뒷면을 치게 하였다. 2로는 이청천이 맡았는데 얼다오허즈/이도하자 남쪽부터 길을 에돌아 바다오허즈/팔도하자 남쪽출구에서 적을 역격하고, 3로는 한군 제2단 단장이 맡았는데 암암리에 마창하 상류로 건너가 적의 군수품을 빼앗게 하였다. 4로는 한군 부사령 김창환(金昌渙)의 영솔하에 바이라/백랍산(白拉山) 북쪽 언덕을 에돌아 마창하 하류에 도착하여 쌰머골/샤머고우/하마구(虾蟆沟/虾蟆溝)과 워롱동강/와룡동강(卧龙东岗/臥龍東崗)의 협곡에서 군수품을 나르는 적의 중원부를 차단시키게 하였다. 차이(柴)와 이(李)의 두개 로(路)는 지정된 곳에 도착한 후 돌연 습격을 하였다. 적의 앞과 뒤는 서로 돌볼 수 없게 되어 약 6시간 싸우다가 서쪽 협곡 오솔길로 도망치면서 서로 밟고 밀고하여 살상이 심하였다. 그날 밤, 김창환부는 엄폐하여 군수영을 습격하였다. 적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하기에 깡그리 빼앗지 못했지만 지휘관 키타무라(北村), 이토(伊藤)을 쏴죽이고 총알을 실은 차 2대와 급양차 8대를 빼앗았다. 전투과정에서 적군 1부(部)가 최악(崔岳)부(部)의 뒷면을 습격하려는 것을 본 김창환은 그놈들을 막았다. 4시간의 격전한 후에 적들은 워롱강/와룡강(卧龙岗/臥龍崗) 남쪽으로 에돌아 군수차를 보호하면서 꽁무니 뺐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사상(死傷)이 30여 명이었고, 적군의 사상은 400여 명이 되었다.註 072
전투가 끝난 후 연합군은 또 부대를 확대하기 위해 유격영(游擊營)을 모집하고 주둔지 부근에 있는 반동적 한간무장(漢奸武裝)을 쓸어버리려 하였다. 한군 제7영(營) 영장 강석규(姜錫奎)가 유격영 영장을 맡았는데 이 영이 조직된 후에 반동적인 무장을 진압하는 일련의 전과를 거두었다.
* 유격영(游擊營) : 유격부대?
3) 둥징청/동경성(东京城/東京城) 쟁탈전
6월 3일, 차이스롱/채세영과 이청천은 동경성에서 80리 떨어진 가스골/가스고우/알사구(嘠斯沟/嘠斯溝)에서 군사회의를 열고 닝안/영안과 동징/동경성을 공격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닝안/영안(宁安/寧安)에는 일본군과 괴뢰군 1개 여(旅)가 주둔하고 있고, 동경성에는 일본군 약 2개 연(連)과 괴뢰군 2개 영(營)이 있었기에 먼저 동경성을 탈취하기로 했다. 4일, 연합군은 8로(路)로 나누어 성을 쳤다. 점심때부터 해질무렵까지 싸워서야 적들이 도망쳐 연합군이 일거(一擧)에 성을 탈취하였다. 괴뢰군 가운데서 끌어모은 토비민단(土匪民團)들이 대부분 투항하여 귀속시켰다. 동경성을 빼앗은 후 한군은 징컹툰난/금갱둔남(金坑屯南) 마터샨커우/마두산구(马头山口/馬頭山口)에 주둔하고 왕청방향의 적을 경계했고 차이/채(柴)씨 여부(餘部)는 베이허터우/북호두에 주둔하여 툰화/돈화, 어목/액목방향의 적을 경계하게 했고 항일총대(抗日總隊)(닝안/영안, 왕칭/왕청의 16개 항일산림대/抗日山林除로 조성됨)는 닝안/영안과 둥징/동경사이에 있는 쟈피구/협피곡(夹皮谷/夾皮谷)에 주둔하여 영안방향에 있는 적을 방어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걱정없이 농사짓게 하였다.
* 토비(土匪) : 지방 무장 도적떼 / 민단(民團) : 민간 무장 자위단, 민간 자치단체
4) 양무린/양목림(杨木林/楊木林)전투
연합군이 동경성을 점령하자 일본 당국은 옌닝/연(길)·영(안) 철도선 수축공정이 잘못될 위험을 느끼고 급속히 수비대 제72연대 카이바라(貝原)부대와 닝안/영안의 괴뢰군을 모아 둥징/동경성을 향해 공격하였다. 연합군은 그놈들과 수일간에 고전하다가 양식과 탄약이 떨어져 적들의 포위를 뚫고나와 마링허제/마령하가(马岭河街/馬嶺河街) 서쪽인 베이청즈/북성자(北城子) 일대에 이르렀다. 동년 6월 17일 일본군 약 1개 營이 양무린/양목림에 집중해 있다는 것을 알고 연합군은 그놈들을 호되게 족쳐 본때를 보여주자고 했다. 연합군은 정예부대를 모집했다. 제1대(隊)는 마링/마령하의 협곡에 매복하고, 제2대(隊)는 양목림 서북쪽 높은 언덕을 점령하고, 제3대(隊)는 촌 남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부락에 있는 적들은 연합군이 주동적으로 출격할 줄 모르고 엄한 경계를 하지 않아 연합군이 부락을 공격했어야 창졸히 맞총질하였지만 언덕 위에서의 협격을 받게 되었다. 놈들은 급기야 촌 동쪽 높은 곳을 차지하고 마렴하 협곡까지 도망쳤을 때 연합군 제1대의 돌연 습격을 받아 절반나마 살상 당하였다. 놈들은 동경성방면의 구원을 받았기에 전군의 복멸(覆滅)을 면하였다. 연합군은 통쾌하게 적을 족친 후 와룡강기슭에 되돌아 왔다. 이 전투에서 탄알 50상자나 노획하였다.
* 창졸히 : 미처 어찌할 사이 없이 매우 급작스럽게
* 복멸(覆滅) : 어떤 단체나 세력이 뒤집히어 망함
5) 일군 이즈카 대대(日軍飯冢大隊) 섬멸
6월 하순, 중한토일연합군 총지휘부에서는 무링/목롱, 왕칭/왕청, 수이펀허/수분하 등 동쪽으로 진군하여 임시 항일근거지를 세우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 지역은 밀림이 많고 사람이 적고 지세가 험준하여 공격과 방어하는데 편리하였다. 그 중 수이펀허다뎬즈/수분하대전자(绥芬河大甸子/綏芬河大甸子)(속칭 라즈고우/립자구/砬子沟/砬子溝)는 4면으로 도시와 200여 리(화리/華里)나 떨어져 외계와의 내왕이 극히 적었다.
그러나 사변이 발생한 후 일본군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원래 조선 라남(羅南)에 있는 일본군 1부(部)를 남만철도수비대 제77대대에 재편성하여 여기로 이동해 왔다. 연합군은 7월 1일 마령하에서 출발하여 동월 4일에 수분하 라오우주허/로모저하(老毋猪河) 기슭에 집중하고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산림대 와 구세군(救世軍) 수령을 인차 요청하여 연합항일의 사항을 상의한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동월 8일 수분하에 주둔한 일군 이즈카(日軍飯冢)부대를 공격하였다.
* 라남(羅南) 청진시 한 구역
먼저 연합군은 정예한 대원을 뽑아 편의대(便衣隊)를 조직하고 한가한 농민, 상인들로 분장하고 몸에 권총, 수류탄 등 무기를 감추어 시내에 휩쓸려 들어가 내응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부대를 5개 대(隊)로 나누고, 제1대(한군 1부/部로 조성됨)와 제2대(채씨여부/旅部의 1부 조성)는 황혼 무렵 몰래 에돌아 수분하 거리와 약 20리 떨어진 곳에 간 다음 제1대는 ▼캉잉링/창승령(螥蝇岭/螥蠅嶺)을 넘어 타이핑/태평령(太平岭/太平嶺) 서쪽 협곡에 매복하여 도망치는 적을 절격시킬 준비를 하고, 제2대는 직접 타이핑고우/태평구(太平沟/太平溝) 남쪽어구에 가 낭떨어진 절벽을 이용하여 적을 막아내어 적들로 하여금 태평령으로 도망치게 하며, 제3대(녹림/綠林 각대로 조성됨)는 수이펀허/수분하 거리와 15리 좌우 떨어진 수분하 상류의 양안에 매복하여 적들이 지나간 다음 뒤로부터 추격하며, 제4대(한군 1부로 조성됨)는 라오우주허(老毋猪河) 남쪽으로부터 거리 서북쪽을 공격하며, 제5대(채씨려부의 1부로 조성됨)는 노헤골/라오헤이고우/로흑구(老黑沟/老黑溝) 부근에서 거리 동북쪽을 진공하기로 하고 한군 1부를 남겨 주둔지를 보위하게 하였다.
* 녹림(綠林) : 관청에 반항하는 무리 또는 도적떼
8일 아침 안개가 많이 끼었다. 연합군 제4, 제5대는 순조롭게 거리밖 적들이 폐기한 참호에 이르러 진공명령이 내리자 신속히 수분하 거리를 포위하고 남쪽 한 구석을 남겨 놓았다. 싸움이 벌어져 3시간이 되자 연합군 편의대(便衣隊)는 거리안 동쪽과 서쪽어구에서 폭탄과 수류탄으로 적을 맹렬히 습격하고 거리밖 연합군은 함성 높이 족치자 적들은 내외로 협격받아 어리둥절하여 죽어라 하고 마을 남쪽어구로 도망쳤다. 제4대, 제5대는 10여 리 추격한 다음 그치고, 제3대는 계획에 따라 놈들을 놓아주고, 제2대는 적들을 협곡으로 이끈 다음 두대가 합력하여 적을 추격하였다. 놈들이 태평령까지 도망쳤을 때 제1대에서 진공을 들이대자 각 대에서 일제히 위에서 밑으로 맹렬히 사격하였다. 적들은 주머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적들은 이즈카(飯冢) 등 몇명이 도망친 외에 거의 섬멸당했다. 이 전역에서 연합군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였고 연합군쪽은 사상자는 27명이었다. 그리고 박격포와 공성포(攻城炮) 8문, 기관총 110자루 그 외 권총, 수류탄, 탄알, 칼과 검, 군용지도, 비밀문서, 가죽옷, 약품, 망원경, 탐조경, 장갑차 등 대량의 무기와 군용물자를 노획하였는 바 이것이야말로 노획물이 일찍이 없었던 초유(初有)의 일이었다.註 073
이상의 중한토일군 5차대첩은 다만 이 시기 수십차례 되는 중한연합작전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에 불과하다. 사실상 한국독립군 주력부대가 동정한 이래 중동로 부근에 남긴 여러 소부대도 그 지구 중국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적지 않은 승리를 거두었다. 예하면 이우정부가 쐉청/쌍성과 우창/오상일대에서 펑잔하이/풍점해 여부와 함께 친일회(親日會)를 파괴하고 일본 앞잡이를 징벌하는 등 유격전으로 적을 요란시키는 활동, 심준괴(瀋俊魁)부 한군 소부대와 田霖부 의용군과 합작하여 두차례나 적의 지둔/길돈(吉敦)철도의 어느 다리를 불사르고 네차례나 라오헤이고우/노흑구/노헤골병참을 습격한 일, 한군 오원소부와 우창/오상지구 항일산림대, 그리고 민단가운데서의 애국분자가 연합하여 라오다오뎬즈/로도전자(老道甸子)에서 괴뢰군 1부를 격퇴하고 스허툰/사하둔(四河屯)에서 일본군 1부(部)를 족친 사실 등등은 이 지구 일본군과 괴뢰당국으로 하여금 크게 당황하게 하였다.
* 지둔/길돈(吉敦)철도 : 지린/길림 - 둔화/돈화 간 철도
1933년 9월부터 일본군과 괴뢰군은 동만지구 항일역량에 대한 대토벌을 가속화하여 중국 항일부대와 한국독립군의 처지는 더욱 간고하였다. 이때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동북인민 혁명군과 조선공산주의자가 지도하는 항일부대는 이미 더욱 밀접한 연합항일의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청천 등이 지도하는 한국독립군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동북인민혁명군과 기타 조선항일무장역량과 새로운 연합을 가지지 못하였다. 동년 10월말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과 조경한(趙擎韓), 오광선(吳光善), 공진원(公震遠) 등 중요한 간부들은 상해에 설치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관내에 들어가 계속 연합항일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길림성 동부와 흑룡강성 경내에 있는 한국독립군 여부는 적들의 막강 압력으로 말미암아 점차 흩어졌다. 비록 이렇게 되었지만 이청천 총사령이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군대는 마땅히 일본에 투쟁하여 조국을 광복케 하는 것이 목적이나, 일본의 만주·몽고 침략과 대륙정책을 배격하는 것, 그리고 중국의 주권과 이익을 옹호하는 것도 역시 매몰될 수 없는 공적이 된다”.註 074
* 간고 : 가난하고 고생스러움. 처지나 상태가 어렵고 힘듦.
주
註) 070 : 심만호는 홍만호(洪晚湖)로 의심된다(홍진). 어떤 자료에서는 심만호(瀋萬浩)라 번역했고 공진원(孔鎭遠)을 공진원(公震遠)으로 번역했다. 공·강·마는 총부에서 파견한 사람인데 홍진이 영안지구에 있을 때 이미 같이 연락공작을 한 적이 있다.
註) 071 : 차이스롱/채세영(柴世荣/柴世榮)(1894∼1943), 원명은 차이자오성/채조승(柴兆升), 자는 스롱/세영(世荣/世榮), 산동 자오/교현(胶县/膠縣)사람.
註) 072 : 〈한국독립군여중국의용군연합항일기실(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紀實)〉.
註) 073 : 〈한국독립군여중국의용군연합항일기실(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紀實)〉.
註) 074 : 《화미(華美)》 제34기(1938년 12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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