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모잠이 안승을 임금으로 받들고 귀순하다 ( 670년 06월(음) )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검모잠이 안승을 임금으로 받들고 귀순하다
六月, 髙句麗水臨城人年校勘 001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校勘 002而校勘 003海史冶㠀 校勘 004, 見髙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 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校勘 005告曰, “興滅國, 繼絶世, 天下之公義也, 推校勘 006大國是望. 我國先王, 以失道見滅, 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㑅藩屛, 永世盡忠.” 王處之國西金馬渚.
校勘 001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年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는 牟로 되어 있다.
校勘 002 정덕본에는 ■로 되어 있고, 을해목활자본·《삼국사절요》·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는 至로 되어 있다.
校勘 003 정덕본에는 而로 되어 있고, 을해목활자본·《삼국사절요》·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는 西로 되어 있다.
校勘 004 정덕본에는 㠀로 되어 있고, 을해목활자본·《삼국사절요》·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는 島로 되어 있다.
校勘 005 정덕본·을해목활자본·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는 哀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來로 되어 있다.
校勘 006 정덕본에는 推로 되어 있고, 을해목활자본·《삼국사절요》·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는 惟로 되어 있다.
〔10년(670)〕 6월에 고구려 수림성(水臨城)註 001 사람인 모잠(牟蠶)註 002 대형(大兄)이 남은 백성들을 거두어 모아서, 궁모성(窮牟城)註 003으로부터 패강(浿江)註 004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인 및 승려 법안(法安)註 005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西海)의 사야도(史冶㠀)註 006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註 007을 보고 한성(漢城) 안으로 맞이해 들이고는,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슬피 고하기를,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는 것은 천하의 공의(公義)이니, 대국에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리를 잃어서 멸망을 당하였지만, 지금 신 등이 나라의 귀족(貴族) 안승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대 번병(藩屛)이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註 008라고 하였다. 왕이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註 009에 정착하게 하였다.
주
註 001 수림성(水臨城): 신라 한주(漢州) 개성군(開城郡)에 소속된 임진현(臨津縣)으로서,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나(정구복 외, 222쪽), 확실하지 않다. 검모잠의 활동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에 따라 평양 이북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종복, 23쪽).
〈참고문헌〉
김종복, 2003, 「고구려(高句麗) 멸망 이후 당(唐)의 지배 정책 –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중심으로」, 『사림(史林)』 19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註 002 모잠(牟蠶): 본서 권제22 고구려본기제10 함형(咸亨) 원년(670)조에 나오는 검모잠(劍牟岑)을 가리킨다. (『신당서(新唐書)』 권3 고종본기3 함형 원년조) 및 권220 고려전에는 고구려 추장 겸모잠(鉗牟岑)으로 전한다. 『신당서』와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唐紀)17 함형 원년조)에 따르면, 그에 대한 토벌군 편성이 4월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므로, 검모장의 거병 자체는 그보다 앞선 것으로 짐작되며(盧泰敦, 5쪽), 6월은 남하하여 한성을 거점으로 부흥 세력을 결집시킨 시점으로 여겨진다(임기환, 320쪽). 안승을 맞이하여 고구려를 부흥하고자 하였으며,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신라에 협조하여 싸웠으나, 안승과의 불화로 인해 살해되었다. 검모잠이 안승에게 죽임을 당한 시점은 일반적으로 문무왕 10년(670) 7월 말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노태돈(盧泰敦), 1997, 「대당전투기(對唐戰爭期)(669~676) 신라(新羅)의 대외관계(對外關係)와 군사활동(軍事活動)」, 『군사(軍史)』 34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註 003 궁모성(窮牟城): 대동강 북안의 평양 인근 지역으로 추정하거나(池內宏, 428쪽), 지금의 경기도 연천시 연천읍에 해당하는 공목달현(功木達縣)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정구복 외, 259쪽),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검모잠에 대한 당 토벌군의 행군명에 기반하여 그 거병지를 요동 지역으로 간주하고, 개모성(蓋牟城)에 비정하는 견해도 나왔다(이상훈, 72~74쪽).
〈참고문헌〉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60, 『만선사연구(滿鮮史硏究)(상세/上世 제2책/第2冊)』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이상훈, 2014, 「검모잠의 최초 거병지 검토」, 『한국고대사 연구의 자료와 해석』, 사계절
註 004 패강(浿江): 패강은 압록강, 대동강, 임진강 등 다양한 하천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데, 여기에 보이는 패강은 대동강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22쪽).
註 005 법안(法安): 당나라의 승려로서 문무왕 9년(669) 정월에 당나라 황제의 명을 전하고 자석을 구하기 위해 신라에 왔다. 문무왕 10년(670) 6월에 검모잠(劍牟岑)에 의해 살해되었다.
註 006 사야도(史冶㠀): 현재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 인근 소야도(蘇爺島)로 비정된다(이병도/李丙燾, 1986, 『국역 삼국사기(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03쪽).
註 007 안승(安勝):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唐紀)17 고종(高宗) 함형(咸亨) 원년(670) 4월조와 (『신당서(新唐書)』 권220 고려전)에는 안순(安舜)으로 전한다. 본서 권22 고구려본기제10 함형 원년 4월조에도 역시 안순으로 전하는데, 이것은 『자치통감』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서 연유한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10년(670) 6월조에 안승이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었다고 전하고, 위의 『자치통감』 기록에는 고장(高藏), 즉 보장왕의 외손(外孫)으로 전하는데, 일반적으로 이들 자료에 근거하여 안승은 연정토와 보장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에서 패강(대동강) 남쪽으로 나아가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다가, 670년 6월에 고구려 멸망 이후 서해의 사야도에 피신해 있던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옹립하고 한성(漢城: 옛 황해도 재령)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승이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서 구원을 요청하니, 문무왕은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해 주었다. 안승이 문무왕 10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는 안승 일행을 금마저(金馬渚: 전북 익산시 금마읍)에 안치하였다가 문무왕 14년(674) 9월에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책봉하였다.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20년(680) 3월조에 문무왕이 보덕왕 안승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彩色) 비단 100단(段)을 내려주고, 왕의 여동생 또는 잡찬 김의관(金義官)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고 전하지만, 이때에 문무왕이 내린 교서에는 누이동생의 딸〔妹女〕을, 이 해 5월에 안승이 문무왕에게 올린 표문(表文)에는 외생녀(外生女)를 안승의 배필로 삼게 하였다고 전하여서 차이를 보인다. 문무왕이 내린 교서와 안승이 올린 답서에 전하는 것과 같이 문무왕이 누이동생의 딸을 안승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한편 김의관을 태종무열왕의 딸이자 문무왕의 누이와 혼인하였고, 안승의 아내는 이들 두 사람의 소생으로 이해하기도 한다(김창겸/金昌謙, 32쪽; 최홍조, 55쪽). 의관은 원성왕의 증조부 의관(義寬)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신문왕(神文王)은 재위 3년(683) 10월에 보덕국을 해체하고, 안승을 신라 왕경(경주)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이때 신문왕이 안승에게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 성을 하사하였다.
〈참고문헌〉
최홍조, 1999, 「신문왕대(神文王代) 김흠돌 난(金欽突 亂)의 재검토」, 『대구사학(大丘史學)』 58
김창겸(金昌謙), 2003, 『신라 하대(新羅 下代) 왕위계승 연구(王位繼承 硏究)』,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
註 008 원컨대 번병(藩屛)이 … 다하고자 합니다 : (『일본서기(日本書紀)』에 671년 정월)에 안승(安勝)의 고려(고구려)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전하므로, 안승이 신라에 투항한 시기는 670년 8월에서 12월 사이로 볼 수 있다. 한편 한성 일대의 고구려부흥세력의 존속 기간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안승이 672년 말~673년 초에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보는 견해(임기환, 331~333쪽), 673년 윤5월경에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보는 견해(최재도, 159~160쪽), 검모잠을 죽인 시기는 670년 9월~12월이지만, 신라에 내투한 시기는 673년 말~674년 초로 이해하는 견해(이정빈, 151~153쪽)도 있다. 신라는 안승 일행을 금마저(金馬渚: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읍)에 안치하였다가 674년 9월에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책봉하였다.
* 번병(藩屛) : 울타리나 대문 앞의 가림 담장. 왕실이나 나라를 수호하는 먼 밖의 감영이나 병영
〈참고문헌〉
이정빈, 2009,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현실』 72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최재도, 2015, 「한성(漢城)의 고구려국 재검토(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47
註 009 금마저(金馬渚):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해당한다. 경덕왕(景德王)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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