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모잠이 부흥군을 일으키다 ( 670년 04월(음) )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10 > 보장왕(寶藏王) > 검모잠이 부흥군을 일으키다
 
 
至咸亨元年庚午歳夏四月, 劒牟岑欲興復國家, 叛唐立王外孫安舜 羅紀作勝.爲主. 唐 髙宗遣大將軍髙侃爲東州道行軍㧾校勘 030管, 發兵討之, 安舜殺劒牟岑, 奔新羅.
 
校勘 030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捴으로 되어 있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년(670) 여름 4월에註 001 이르러 검모잠(劍牟岑)註 002이 국가를 부흥하려고 하여 당(唐)을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安舜)「신라기(新羅紀)」에는 승(勝)이라 되어있다.註 003을 세워 임금을 삼았다.註 004 당 고종이 대장군註 005 고간을 보내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고 병력을 내어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註 006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註 007
 
 
 
 
註) 001
4월 : 검모잠의 봉기 시점에 대해서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함형 원년(670)조 등 중국측 사료에서는 670년 4월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본서 권6 신라본기6에서는 670년 6월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검모잠 관련 기록들이 시간상으로 전개되는 여러 사건을 일괄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기준 시점의 사건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검모잠의 거병 시점에 대해서 669년 1월~5월(정원주), 669년 4월 이전(이병도/李丙燾), 669년 초(무라카미 요시오/村上四男), 669년 5월 이후(이정빈), 670년 2~3월(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김수태), 670년 4월(양병룡, 임기환, 최재도)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李丙燾), 1964, 「고구려(高句麗)의 일부 유민(一部 遺民)에 대한 추호정책(抽戶政策)」, 『震檀學報』 25·26·27
    * 추호(抽戶) : 선별 강제이주
김수태, 1994, 「통일기 신라의 고구려 유민지배」, 『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李基白先生古稀祈念韓國史學論叢)』 (上), 일조각
양병룡, 1997, 「나당전쟁(羅唐戰爭) 진행과정(進行過程)에 보이는 고구려유민(高句麗遺民)의 대당전쟁(對唐戰爭)」, 『사총(史叢)』 46
임기환, 2003, 「보덕국고(報德國考)」, 『강좌 한국고대사』 10, 가락국사적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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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여, 2010,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 유민의 동향-보덕국(報德國) 주민을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56
최재도, 2015, 「한성(漢城)의 고구려국 재검토(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 47
신은이, 2018, 「보덕국의 탄생과 그 의미」, 『대구사학(大丘史學)』 113
방용철, 2018, 「고구려 부흥전쟁의 발발과 그 성격」, 『대구사학(大丘史學)』 113
정원주, 2018, 「당(唐)의 고구려 지배정책과 안승(安勝)의 행보(行步)」, 『한국고대사탐구』 29
정원주, 2019, 「안승(安勝)의 향방(向方)과 고구려 부흥운동」, 『군사(軍史)』 110
김수진, 2020, 「670년 평양 일대 고구려 유민의 남하와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실학』 72
최호원, 2020, 「고구려 검모잠·안승 세력과 대신라관계 인식」, 『신라사학보』 49
권창혁, 2021, 「670~673년 신라의 고구려 부흥운동 지원 전략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51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30, 「고구려멸망후 유민의 반란 및 당과 신라의 관계(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の關係)」, 『만선지리역사연구(滿鮮地理歷史硏究)』 12
무라카미 요시오(村上四男), 1978, 「신라국과 보덕국 안승의 소고구려국(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조선고대사연구(朝鮮古代史硏究)』, 카이메서원(開明書院)
이노우에 나오키(井上直樹), 2016, 「고구려유민과 신라(高句麗遺民と新羅)-7세기후반의 동아시아정세(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동양사연구(東洋史硏究)』 75-1
 
註) 002
검모잠(劍牟岑) : 『신당서(新唐書)』 권3 본기3 고종 함형 원년(670)4월 경오조 및 같은 책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에는 ‘겸모잠(鉗牟岑)’이라고 하였다.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6월조(에는 ‘수림성인(水臨城人) 대형(大兄) 모잠(牟岑)’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검모잠은 궁모성(窮牟城)에서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는데, 도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 현재 소야도)에서 안승(安勝)을 만나 함께 한성(漢城: 현재 황해도 재령)으로 와서 왕으로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로 보내 원조를 청하였다. 안승과 갈등하다가 안승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註) 003
안순(安舜) : 안승(安勝)과 같은 인물이다. 본서 권22 고구려본기10 당 고종 총장2년(669) 2월조 참조
 
註) 004
안순을 세워 임금을 삼았다 : 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6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수림성인(水臨城人) 대형(大兄)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 해당 기사의 궁모성을 요동의 개모성에 비정하기는 견해(이상훈, 72-75쪽), 검모잠이 요동에서 봉기하였다고 보는 견해(김강훈, 29-33쪽)가 있다. 그리고 한성에서 검모잠과 안승의 봉기를 ‘한성고구려국’의 재건으로 보기도 한다(임기환, 296-297쪽). 또 검모잠이 평양을 탈환하여 처음에는 670년 4월에 안승이 평양에서 즉위하였고, 고간 등 당군에 쫓긴 후 6월에 한성에서 다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옹립하였다고 보거나(김수진, 14-19쪽). 한성을 기반으로 하는 고연무(高延武)와 남하한 검모잠이 연합하여 669년 4월~670년 3월에 한성 고구려국을 재건하고 670년 6월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세웠다고 보기도 한다(이정빈, 147-148쪽). 검모잠이 안승을 왕으로 옹립한 시점을 670년 1월 이전, 즉 669년 중후반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정원주, 100쪽). 검모잠이 안승을 옹립한 배경으로는 보장왕의 외손이나 서자로 알려진 인물로서 많은 고구려유민들을 규합할 수 있는 명분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村上四男, 224-225쪽). 669년에 많은 고구려의 왕실 및 유력 귀족들이 당 내지로 사민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왕실의 혈통을 잇는 인물로서는 아마도 안승이 유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의 고구려국(高句麗國: 報德國) 및 한반도내 고구려 부흥운동과 관련된 논고는 다음과 같다.
 
〈참고문헌〉
이병도(李丙燾), 1964, 「고구려(高句麗)의 일부 유민(一部 遺民)에 대한 추호정책(抽戶政策)」, 『진단학보(震檀學報)』 25·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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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2014, 「검모잠의 최초 거병지 연구」, 『한국 고대사연구의 자료와 해석』, 사계절
김강훈, 2015, 「요동지역의 고구려부흥운동과 검모잠」, 『군사(軍史)』 99
이미경, 2015,「신라(新羅)의 보덕국(報德國) 지배정책」, 『대구사학(大丘史學)』 120
최재도, 2015, 「한성(漢城)의 고구려국 재검토(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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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주, 2019, 「안승(安勝)의 향방(向方)과 고구려 부흥운동」, 『군사(軍史)』 110
김수진, 2020, 「670년 평양 일대 고구려 유민의 남하와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실학』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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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창혁, 2021, 「670~673년 신라의 고구려 부흥운동 지원 전략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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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요시오(村上四男), 1978, 「신라국과 보덕국 안승의 소고구려국(新羅国と報德王安勝の小高句麗国)」, 『조선고대사연구(朝鮮古代史硏究)』, 카이메서원(開明書院)
이노우에 나오키(井上直樹), 2016, 「고구려유민과 신라(高句麗遺民と新羅)-7세기후반의 동아시아정세(7世紀後半の東アジア情勢)」, 『동양사연구(東洋史硏究)』 75-1
 
註) 005
대장군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17 고종 함형 원년(670) 4월조에는 ‘좌감문대장군(左監門大將軍)‘이라고 하였다.
 
註) 006
당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 토벌하게 하니 : 『신당서』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에는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부흥군을 공격하고 사평 태상백 양방수(楊昉綏)을 보내어 나머지 도망한 무리를 받아들이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연구는 이 기사를 인정하여 이때 고간 등이 검모잠의 부흥군을 진압하였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1년 9월조에는 “당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병 40,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았으며, 대방(帶方)을 침입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 기사는 중국측 사료에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신라본기에만 전하는 기사이다. 이 기사를 검모잠과 한성 고구려국에 대한 공격 기사로 이해하면서 670년에는 고간 등이 한반도에 진격하지 못하고 신라본기의 기록처럼 671년 9월에 한반도에서 안승 등을 공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쪽; 이상훈, 110쪽, 최재도, 152쪽). 그러나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9월조 기사를 문무왕 12년 7월조 기사의 중복기사로 보고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노태돈, 250쪽)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임기환, 2003, 「보덕국고(報德國考)」, 『강좌 한국고대사』 10, 가락국사적개발원
최재도, 2015, 「한성(漢城)의 고구려국 재검토(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 47
 
註) 007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0년 6월조에는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한 내용은 없고, 안승 등을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충남 익산)에 살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한 시점과 안승의 신라 내투시기에 대해서 대부분의 관련 논고는 670년 7월 혹은 8월 시점으로 파악하고 있다(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432쪽; 이병도/李丙燾; 김수태; 양병룡; 村上四男), 그러나 안승의 내투시기를 고구려부흥운동이 소멸하는 시점인 672년 말~673년 초로 보는 견해(임기환, 295쪽), 673년 윤5월경으로 보는 견해(최재도, 163쪽), 673년 말~674년 초로 보는 견해(이정빈, 151-153쪽)가도 있다. 또 검모잠의 살해 시점에 대해서는 670년 9월~12월로 보거나(이정빈, 151쪽), 신라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는 670년 8월 1일 이전으로 보는 견해(김수진, 25-26쪽)가 있다. 한편 안승과 검모잠의 갈등에 대해서는 부흥운동 전개 방식 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검모잠은 고구려고지에서 부흥운동을 주장하고, 안승은 당군의 예봉을 피해 신라에서 신라군과의 협력을 중시했다고 보거나(노태돈, 249쪽), 검모잠 등 고구려유민들을 한성에서 금마저로 이주시키려는 신라의 제안에 따른 갈등으로 보는 견해(김수진, 23-25쪽)가 있다.
 
〈참고문헌〉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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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룡, 1997, 「나당전쟁(羅唐戰爭) 진행과정(進行過程)에 보이는 고구려유민(高句麗遺民)의 대당전쟁(對唐戰爭)」, 『사총(史叢)』 46
임기환, 2003, 「보덕국고(報德國考)」, 『강좌 한국고대사』 10, 가락국사적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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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도, 2015, 「한성(漢城)의 고구려국 재검토(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 47
김수진, 2020, 「670년 평양 일대 고구려 유민의 남하와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실학』 72
최호원, 2020, 「고구려 검모잠·안승 세력과 대신라관계 인식」, 『신라사학보』 49
권창혁, 2021, 「670~673년 신라의 고구려 부흥운동 지원 전략에 대한 검토」, 『신라사학보』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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