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토가 항복하다 ( 666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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髙句麗貴臣淵淨土, 以城十二·戸七百六十三·口三千五百四十三來投. 淨土及從官二十四人, 給衣物·糧料·家舎, 安置王都及州府. 其八城完, 並遣士卒鎮守.
 
〔6년(666) 겨울 12월〕 고구려에서 지위가 높은 신하인 연정토(淵淨土)註 001가 12성(城) 763호(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註 002 정토와 그를 따르는 관리 24명에게 옷과 일상 용품, 식량, 집을 주어 왕도(王都)와 주(州)·부(府)註 003에 안치하였다. 그 중 여덟 성(城)은 온전하였으니 모두 사졸을 보내어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註) 001
연정토(淵淨土):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동생으로서,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24년(665) 연개소문 사망 이후 그 아들 3형제간에 분쟁이 일어나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연정토는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한 12성의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문무왕 8년(668)에는 사신으로 입당하기도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1 당기(唐紀)17 고종(高宗) 함형(咸亨) 원년(670) 4월조에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안순(安舜), 즉 안승(安勝)이 고장(高藏; 보장왕)의 외손(外孫)이라고 전하고, 본서 권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0년(670) 6월조에는 안승이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었다고 하였다. 이들 자료를 근거로 하여 안승을 연정토와 보장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註) 002
12성(城) 763호(戶)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 연정토가 귀부할 때 거느리고 온 12성(城)의 위치는 비열홀, 천정군, 각련군을 포함하는 지역으로서, 지금의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로 추정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249~257쪽). 신라는 이곳의 주민 대부분을 원래 살던 지역에 머무르게 하면서 신라에 편제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註) 003
부(府): 신라 하대의 금석문에 김해부(金海府), 서원부(西原府), 중원부(中原府), 정변부(定邊府), ▨강부(▨江府), 통화부(通化府) 등의 ‘부(府)’가 확인되고 있어서, 9세기의 어느 시점에 소경(小京)을 중심으로 부(府)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배종도, 1989; 黃善榮, 1994). 그와 같은 개편의 계기로는 헌덕왕(憲德王) 8년(832)에 발생한 김헌창의 난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전덕재, 2004). 연정토와 그의 종관 24인을 왕도(王都) 및 주부(州府)에 안치(安置)하였다는 기록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해당하여, 고려 초기에 개서한 것으로 그 주인공은 바로 『구삼국사(舊三國史)』 찬자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18, 197쪽).
* 개서 : 새로 고쳐 씀
 
〈참고문헌〉
배종도, 1989,「신라하대(新羅下代)의 지방제도(地方制度) 개편에 대한 고찰」, 『학림(學林)』제11집
황선영(黃善榮), 1994,「신라하대(新羅下代)의 부(府)」, 『한국중세사연구』창간호
전덕재, 2004,「신라(新羅) 소경의 설치와 그 기능」, 『한국도대중세(韓國古代中世) 지방제도(地方制度)의 제문제(諸問題)』, 집문당
전덕재, 2018, 『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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