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1&artid=20131022141441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개미허리, 긴 머리를 탐한 까닭은
이기환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  입력 : 2013-10-22 14:14:41ㅣ수정 : 2013-10-22 14:14:41

“주량은 비록 그대에 못미치지만/술 즐기며 속소의 가는 허리를 탐하네.(嗜酒仍貪束素腰)”(<동국이상국전집> 제17집)

백운거사 이규보가 사마시 동기생인 고부태수 오천유의 선물을 받고 답례를 겸해 지은 시(고율시)이다. 오천유가 보낸 선물은 기생(妓女)과 술한병(美酒), 산 꿩(生雉) 등이었다. 

시 가운데 ‘속소의 가는 허리(束素腰)’가 눈에 띈다. 한마디로 ‘한 묶음의 비단(속소)같은 허리(요)’를 뜻한다. 이규보는 동무가 ‘허리가 가는 미인’을 선물로 보낸 것을 치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도 있다. 

“젊은 시절 청루에서는 의기가 호탕하여(少日靑樓意氣豪)/초궁의 섬세한 허리를 손바닥에 놀렸지.(掌中纖細楚宮腰)”(<사가시집> 제9권 ‘시류’)

시가 말하는 ‘초궁의 섬세한 허리’를 ‘손바닥에서 놀렸다’는 말은 모두 여인의 아랴야리한 가녀린 허리를 뜻한다. 예부터 세요(細腰), 즉 ‘개미허리 여인’을 미인의 상징으로 꼽혔던 것이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개미 허리와 긴 머리는 예부터 모든 남녀의 로망이었다. 가는 허리가 유행된 것은 이미 2500년 전의 일이다. 긴 머리를 갖지 못한 여인들은 가발이라도 얹어야 미인 소리를 들었다. 고구려 동천왕의 후궁인 관나부인의 긴머리는 9자나 됐가고 한다. 당나라에서는 신라산 가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간송미술관 소장

■ 심한 다이어트로 굶어죽는 이가 속출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개미허리’가 유행됐을까. 춘추시대 초 영왕(재위 기원전 541~529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자그만치 2500년이 된 유행이다. <묵자>의 ‘겸애중(兼愛中)’에 나오는 고사이다.
 
초 영왕이 바로 ‘개미허리’의 신봉자였다. ‘가는 허리를 탐했다’는 뜻의 <탐연세요(貪戀細腰)>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임금이 ‘개미허리’를 좋아하자 궁중의 남녀들은 하루 한끼씩 먹는 등 처절한 다이어트에 나섰다. 가슴으로 숨을 들이킨 다음에 띠를 졸라맸다. 임금의 눈에 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졸라맸는지 일어설 때는 모두들 벽에 의지해야 했고, 길에서는 담벼락을 잡고서야 걸을 수 있었다. 

임금이 ‘가는허리’를 밝힌지 1년이 지나자 궁중의 남녀는 모두 깡마른 얼굴빛을 하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초왕이 가는 허리를 좋아하자 궁중에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아졌다(好細腰而國中多餓人)”고 손가락질 했다. 이후 ‘세요설부(細腰雪膚)’는 버들가지처럼 가는 허리에다 눈꽃처럼 하얀 피부의 여인을 미인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가늘어야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한나라 성제(기원전 33~7년)의 후궁인 조비연은 얼마나 허리가 가늘고 몸매가 갸날팠는지 손바닥 위에서도 능히 춤을 추었다고 한다. 

<남사(南史)>에 등장하는 양간(羊侃·495~549년)의 가기(家妓)인 장정완도 “허리가 1척6촌이며, 손바닥에서 춤을 출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1척6촌이면 지금의 단위로는 40㎝도 채 안된다. 인치로 따지자면 15인치를 살짝 넘는 수준? 그러니 그야말로 ‘한줌의 허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튼 <사가시집>에 나오는 ‘초궁의 가는허리’는 바로 초 영왕 때의 일화를, ‘손바닥 위에서의 춤’은 조비연과 장정완의 이야기를 각각 빗댄 것이다. 

■ 자주빛 옷의 마니아

2600년 전을 풍미한 유행의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춘추 5패의 한사람인 제나라 환공(재위 기원전 685~643년) 때의 일이다. <한비자> ‘이병·二柄’에 나온다. 

제나라 환공은 ‘자주색 옷의 마니아’였다. 그러자 온나라에 자주색 의상의 열풍이 불었다. 온 백성들이 앞다퉈 자주색 옷을 입었다. 

그러자 하얀색 비단 5필을 주고도 자주색 비단 한 필을 살 수 없을 정도로 품귀현상을 빚었다. 환공이 크게 걱정하며 명재상인 관중을 불러 상의했다. 

“내가 자줏빛 옷을 좋아해서 그런가. 어찌한단 말이요.”(환공) 

“무엇이 어렵습니까. 우선 측근들을 불러 이렇게 말하십시요. ‘난 자주색 옷냄새가 너무 싫다’고…. 그러면 해결됩니다.”(관중)

다음 날, 환공은 자주색 옷을 입고 나오는 신하들에게 짜증을 부렸다.

“자네. 난 그 옷이 싫다. 냄새가 난다. 썩 물러가라!”

그제서야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도 자주색 옷 입기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초 영왕이나 제 환공은 좋은 말로 ‘춘추시대의 패셔니스타’라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고, 백성들까지 그들의 스타일을 줄줄이 따라했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다이어트를 감행했다니 참…. 특히 초 영왕이 일으킨 ‘개미허리‘와 ’다이어트‘ 열풍이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 귀뚫고 귀고리 단 사내아이들

남자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고 다니는 것을 최근의 풍습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1572년(선조 5년), 선조 임금이 불같이 화를 나며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린다. 비망기란 임금이 직접 작성해서 내리는 명령을 뜻한다. 지시의 내용을 잊지않게, 그리고 명확하게 내리려는 임금의 뜻이 담긴, 그야말로 특별지시사항이었던 것이다. 선조의 비망기는 다음과 같다.(<선조실록>)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감히 훼손시키지 않은 것이 효(孝)의 시초인 것이다. 그런데 크고 작은 사내 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니….”

그러니까 선조임금은 당대 조선의 청소년들 사이에 귀를 뚫고 귀고리를 매는 풍습이 유행병처럼 퍼졌음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는 더 나아가 “이런 부끄러운 유행은 오랑캐의 풍습이라는 것을 널리 알려 앞으로는 엄금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선조는 특히 “이달 말까지 시한을 두되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사헌부가 나서 엄벌하도록 하라”고까지 했다. 나이를 막론하고 사내아이들이 귀고리를 했다는 증거는 1513년(중종 8년) 1월7일자 <중종실록>에 나온다. 

판의금 부사 이손이 왕족(양평군)을 사칭하는 만손(萬孫)이라는 자를 탄핵하면서 임금에게 고하는 내용이다.

“만손이 지금 양평군을 자칭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진짜 양평군은 이미 죽었습니다. 양평군이 죽었을 때의 나이가 9살이었는데, 큰 진주 귀고리를 달았고, 정수리에 뜸을 뜬 흔적이 있으니 확인해보면 진위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의금부가 이 탄핵내용을 근거로 양평군의 생전모습을 아는 사람들에게 만손을 보였다. 과연 만손의 귀에는 진주귀고리를 달았다는 흔적인 귀고리 구멍이 없었다. 그러니까 왕족을 사칭하고 다니는 자의 귀에 귀고리 구멍을 뚫었는 지를 확인해서 진위여부를 가렸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를 보면 9살 짜리 왕족 사내아이가 귀를 뚫고 진주귀고리를 달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조 임금은 귀고리 다는 풍습을 ‘오랑캐가 퍼뜨린 유행’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여기서 오랑캐란 몽골족의 나라인 원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귀고리를 다는 풍습은 오랑캐의 풍습이 아니다. 이미 8000년 전부터 중국동북방과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옥으로 만든 귀고리를 달고 다녔다. 중국 동북방의 차하이(査海) 유적과 강원 고성 문암리 신석기 유적에서 확인된 옥결(玉缺·옥귀고리)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신윤복의 <단오도>. 다리(가발)을 얹는 풍습은 조선시대를 충미했다. 수백냥이 도는 다리 마련을 위해 땅과 집을 팔아야 했던 사연도 전해진다

■ 긴 생머리, 아니면 가발이라도…

영·정조 시대를 강타한 유행병이 있었으니 바로 ‘다리(덧머리 혹은 가발)’ 열풍이었다.

사실 여인의 긴 생머리는 그 옛날부터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특히 삼국시대 여인들의 생머리는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중국 측 기록인 <북사>나 <진서>, <태평어람>, <구당서>나 우리 측 기록은 <삼국사기> 등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태평어람> ‘사이부’는 “신라에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들이 많았으며, 그 길이가 1척 남짓”이라고 했으며, <구당서> ‘동이전’은 “부인의 머리카락을 머리에 두르고 비단과 주옥으로 장식했는데, 머리카락이 매우 아름답다”고 했다. 특히 <구당서>는 “신라가 정관 5년(631년) 바친 여악(女樂) 두 명의 검은 머리카락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부연했다.

1960년대 수출 효자상품이었던 가발. 신라시대 때도 신라산 가발은 당나라에 특별 공물로 인기를 끌었다. 신라백성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생계를 이었고, 머리카락이 자랄때까지 흑건을 뒤집어 썼다.|경향신문 자료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동천왕조’를 보면 “동천왕의 후궁인 관나부인의 머리카락이 9자나 됐다”고 기록했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이 실려있다. 정실왕후인 연씨가 관나부인이 왕의 사랑을 독차지할까 두려워 왕에게 고자질하는 내용이다. 

“제가 듣건데 중국 위나라에서는 긴 머리카락을 천금을 주고 산다고 합니다. 지금 왕께서 그들이 원하는대로 ‘긴 머리 미녀’(관나부인)를 보내면 그들(위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을 겁니다.”

이 기록을 보면 당대 사람들의 ‘긴 머리 여인’에 얼마나 열광했는지를 알 수 있다. 긴 머리카락을 천금을 주고도 사야할 만큼…. 

■ 신라의 가발 수출

재미있는 것은 당대 서위에서 천금을 주고도 사려했던 머리카락은 다름아닌 ‘다리’, 즉 가발이었다는 사실이다. 

송말원초의 제도·문물사인 <문헌통고>는 “신라 부인들도 아름다운 가발을 머리 위에 빙빙 둘렀다”고 썼다. 당대 동아시아 여인의 헤어스타일은 바로 ‘긴 머리’였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머리숱이 없거나 머리카락의 길이가 짧은 여인의 경우 다리, 즉 가발을 얹으면서까지 유행을 좇았음도 알 수 있다.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에 등장하는 여인들과, 신라 용강동 고분 및 황성동 고분의 토용·벽화에 나오는 여인들의 ‘헤어스타일’에는 바로 이같은 가발의 형태가 담겨 있다. ‘신라산 가발’은 당대 최고급으로 꼽혔다. <신당서> ‘동이전·신라전’은 “신라부인들은 미발을 머리에 두르고 구슬과 채색비단으로 꾸몄으며. 남자들은 머리를 깎아 다리로 팔고, 흑건을 뒤집어 썼다”고 했다.

신라가 723년(성덕왕 22년)과 730년(성덕왕 29년) 당나라에 보낸 공물 가운데는 ‘아름다운 가발’ 혹은 ‘머리카락’이 빠짐없이 포함됐다. 869년(경문왕 9년)에는 넉자 다섯치의 두발 150냥과 석자 다섯치의 두발 300냥을 당나라에 바쳤다. 즉 신라 백성들은 머리카락을 수출해서 호구지책도 마련했으며, 그 덕에 당나라에 보낼 공물도 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팔아 먹을거리를 마련한 뒤 머리가 다시 자라 상투를 틀 때까지 흑두건을 뒤집어 썼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가난했던 시절, 외화벌이의 하나였던 가발공장을 연상하게 된다.

■ 무거운 가발 때문에 목뼈가 부러졌다 

뿌리깊은 전통이었던 ‘다리’, 즉 ‘가발’이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한 것은 조선의 영·정조 때의 일이다.

“오늘날 다리(가발)보다 막대한 폐단은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유생집이라도 다리 마련을 위해 60~70냥을 써야 하며, 제법 모양을 갖추려면 수백냥의 돈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니 땅과 집을 팔아야 할 형편입니다. 이 때문에 다리를 마련하지 못한 며느리는 시집간 지 6~7년이 되도록 시부모를 뵙는 예를 행하지도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1788년(정조 12년) 우의정 채제공이 지적한 다리의 폐단이다. 당대의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안타까운 일화를 전한다.

“부귀한 집에서는 머리 치장만 해도 7~8만냥이 든다. 다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서 마치 말이 떨어지는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다양한 장식(웅황판, 범랑잠, 진주수)로 꾸며 그 무게를 지탱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얼마 전에는 13살 밖에 안된 어느 부잣집 며느리의 다리가 얼마나 높고 무거웠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섰다. 그런데 그만 다리 무게 때문에 여자의 목뼈가 부러져 사망하고 말했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이덕무는 나아가 “복식에서 시양(時樣·유행)이라는 것은 모두 창기들이 아양 떠는 자태에 매혹되어 생긴 것”이라며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한채 자신의 처첩에게 권하는 세속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 유행은 임금의 서슬퍼런 명령도 무시한다 

그랬으니 영조 때부터 다리유행을 금하는 법령을 만들어 시행하려 애썼다. 하지만 유행을 법령으로 금하기는 어려웠다. 홍인한 등은 다리의 유행을 두고 ‘궁중의 모양(宮樣)’이라면서 이미 임금이 만든 법령을 끝내 저지했다. 그러니까 영조의 ‘다리척결’ 의지는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폭넓게 퍼진 유행의 물꼬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의 한탄과 엄포가 재미있다. 

1788년(정조 12년) 정조는 다리 얹는 것을 금지한 영조의 법령을 회복시키면서…. 

“우리나라 습속은 법령이 공포될 때마다 ‘어디 오래 가겠어?’하면서 비아냥댄다. 그러나 이 법은 반드시 시행될 것이니 그리 알라. 금석은 부서져도 이 금령은 페지되지 않을 것이다. 법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가장들까지 연좌시켜 처벌할 것이다.”

정조 임금은 유행을 잠재우려 임금까지 나서 ‘엄단 운운’하지만 ‘그 때 뿐이겠지’하며 도대체 말을 들어먹지 않는 세태를 한탄하고 있다. 정조는 우여곡절 끝에 만든 이 법의 정신을 ‘유치입검(由侈入儉)’, 즉 ‘사치에서 검소로 돌아간다’로 요약했다.

■ 집안 부녀자들의 머리까지 단속해서야 

그러나 다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신하들 사이에서는 다리가 사라짐에 따라 부녀자의 귀천도 사라진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다리 대신 족두리를 쓰는데, 부녀자들의 귀천이 없어집니다. 각자 남편의 직위에 따라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경연에 나선 신하들의 말에 다른 대신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야말로 끈질긴 반발이다. 하지만 정조 임금은 ‘8가지 불가이유’를 조목조목 밝힌 뒤 ‘신분표시’안을 일축하고 만다.

2년 뒤인 1790년, 지평 유경의 상소를 보면 “길거리에 다니는 상민·천민의 아녀자들이 본체(본 머리카락)의 부피가 점점 커지고 있다”면서 우려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 1794년(정조 18년), 정조가 다리 금지의 법령이 잘 지켜지고 있는 지를 물었다. 그러자 좌이정 김이소가….

“예전보다는 화려하고 사치스럽지는 않습니다. 다만 뒷머리가 점점 높고 커지고 있습니다. 법조문을 더 엄격하게 만들어 정해진 규격을 넘으면 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발을 막으니 본발을 높게 치장하는 풍조가 새로운 유행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꼭 장발을 단속하고 미니스커트의 길이까지 쟀던 1960~70년대를 떠올리는 대목이다. 

정조 임금은 김이소의 간언을 두고 “그것이 쉽겠느냐”며 고개를 흔든다..

“집안에 있는 부녀자들의 뒷머리까지 어찌 검사해서 금하겠느냐. 지금 여기 있는 신하들이 각자 집에 가서 정해진 법도를 지킨다면 일반 백성들도 반드시 본받을 것이다.”

세속의 유행을 정부차원에서 강제로 막기란 사실상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좀더 정조 임금의 말을 곱씹어보면 무지막지하게 풍속을 단속했던 1960~70년대 정부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야말로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1960~70년대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있는 모습. 그러나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의 물꼬를 공권력 차원에서 틀어막기란 어렵다. 조선조 정조는 ‘다리(가발)금지령’을 내린 뒤 대신 본발의 뒷머리가 커지는 또다른 유행이 퍼지자 “집안 여자들의 뒷머리까지 어찌 단속하겠느냐”고 체념했다.|경향신문 자료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

그러고보니 처음에 인용한<묵자>나 <한비자> 같은 고상한 분들이 개미허리가 어떻고, 자주색 옷이 어떻고 하는 ‘유행’ 이야기를 꺼낸 까닭도 마찬가지다.

역시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야 유행병처럼 퍼지는 잘못된 풍조를 바로잡을 수 있음을 깨우치려던 것이었다. 예컨대 제환공의 일화를 전한 <한비자>는 다시 <시경>을 인용, “몸소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믿지 않는다”고 했다. 하기야 맹자 역시 그랬다지 않은가.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나침이 있다(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맹자> ‘등문공상·등文公上’)고…. 

지나친 다이어트로 심지어는 거식증에 걸려 사망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유행에 맞추느라 분수에 맞지 않은 소비풍조를 일삼기도 한…. 그런 세태를 돌아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요즘의 ‘패션리더’ 혹은 ‘패셔니스타’란 바로 이 시대 유행을 선도하는 ‘지도자’가 아닌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기원전 4년 도성(위례성)을 세우면서 내건 슬로건이 있었다. 

바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였다. 어떤가 이 땅의 패션리더들이여. 온조왕처럼 ‘검이블루 화이불치’의 유행을 퍼뜨리는 것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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