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7668

점심도 굶고 도망친 프랑스군, 실소가 나온다
[역사와 함께 걷는 강화나들길 18] 양헌수 장군과 정족산성 전투
14.10.01 16:20 l 최종 업데이트 14.10.01 16:20 l 이승숙(onlee9)

강화대교 인근에 있는 갑곶돈대 근처에는 '진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많다. 길 한쪽에 있는 공원의 이름에도 진해가 들어가 있고, 그 뒤의 추어탕집 상호도 역시 그러하다. 또 인근에 있던 절의 이름도 진해사였다. 동네 이름은 갑곶리인데도 진해라는 이름이 많이 붙은 까닭은 무엇일까. 

강화는 군사적으로 요충지여서 여러 개의 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중 강화해협을 지키기 위해 쌓은 강화외성에는 6개의 문루(門樓)가 있었다. 진해루는 갑곶나루터 근처에 있던 문루였다. 말하자면 진해루는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셈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 나루터도 진해루도 사라졌지만 '진해'라는 명칭은 남아서 옛날을 떠올려주고 있다.

평안도 강계포수비가 강화도에 왜?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 진해공원은 자그마한 놀이터 정도의 규모 밖에 되지 않는다. 시설물이랬자 등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쉼터가 하나 있고 그 아래 벤치가 있는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공원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비석들이 서 있다. 어른 키보다 훨씬 더 높은 그 비석들에는 빽빽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다. 


▲  호국의 섬 강화도. ⓒ 이승숙

강화에서 나고 자란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인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는 비석도 있고 그 옆에는 강화 출신 의병장의 비도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강계포수비'라는 비석이 한 쪽에 우뚝 서 있다. 강계라면 우리나라 최북단인 평안북도 강계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사냥을 하는 포수들의 공적을 칭송하는 비석이라니,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강계 포수들을 기리는 비가 강화도에 있는 걸까.

지금으로부터 148년 전 가을에 강화도는 큰 전란을 겪는다. 프랑스 극동함대 소속의 군함 7척이 사전에 선전포고도 없이 우리나라 영해를 침범했다. 그들은 서울로 통하는 강화를 점령해서 우리의 조정을 압박하고 통상을 허락받고자 하였다.   

프랑스군이 쳐들어와 강화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급히 군사회의를 열어 순무영(巡撫營)을 조직했다. 순무영이란 지방에서 민란과 같은 변란이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왕명을 받고 파견되어서 해당 지역의 군무(軍務)나 민심 수습을 맡아 보던 병영을 말한다. 

제주목사로 부임 중이었던 양헌수 장군은 순무영의 군사를 지휘하는 책임자인 천총(千摠)이 되었다. 양헌수 장군은 총을 잘 다루는 포수들 370여 명과 순무영의 병사들 백여 명을 합한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출발해서 10월 18일에 강화도의 건너편인 김포 통진에 도착했다. 그러나 강화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강화로 건너가는 갑곶나루 인근이 프랑스군의 수중에 들어갔는지라 그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포 덕포진은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과 마주보고 있는 군사 시설이다. 그곳은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는 강화읍 갑곶진과는 꽤 거리가 멀어 몰래 강화도로 건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양헌수 장군은 김포 덕포진에서 강화 덕진진 쪽으로 건너기로 정했다. 음력 9월 28일(양력 11월 5일) 밤에 기습 상륙하기로 날을 잡고 배 다섯 척을 구했다. 


▲  덕진진 공조루 ⓒ 문희일

칠흑 같은 밤에 바다를 건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500여 명의 병사들이 몰래 바다를 건넜다. 덕포진에서 건너편 덕진진까지는 거리가 채 1킬로미터도 되지 않지만 바다 물살이 매우 거세어서 잘못하면 배가 급류에 휘말려 전복될 위험이 있다. 더구나 바닷가는 갯벌이라 배를 댈 만한 곳도 없다. 그러나 그곳이 아니고는 프랑스군의 눈을 피해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날 밤 조선군은 물살이 거센 손돌목을 건너 덕진진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정족산성에 스며들어 진을 치고 기다렸다. 프랑스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보이는 남문과 동문에는 총을 잘 다루는 포수 300여 명을 나눠 배치하고 북문과 서문에는 경군과 향군을 내세웠다.

조선군이 정족산성에 있다는 보고를 들은 프랑스군 로즈 제독은 부하인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대포가 필요할 텐데도 어쩐 일인지 그들은 총만 들고 정족산성을 향해 길을 나섰다. 

일명 삼랑성이라고도 불리는 정족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정족산을 두르고 있는 성이다. 성의 길이는 2300m에 달하며 자연석을 쌓아서 축조했다. 성 안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381)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전등사가 있으며 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도 있었다.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는데 서문과 북문은 산 속에 있어 접근이 용이치 않은 데 비해 동문과 남문은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편이다. 


▲  광성보와 덕진진 앞의 바다는 이렇게 물살이 거셉니다. ⓒ 문희일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갑곶진에서 정족산성까지는 약 18킬로미터가 넘는다. 어른 걸음으로도 네 시간은 잡아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노새 등에 점심 도시락을 싣고 아침에 출발한 그들이 정족산성 근처에 도착을 했을 때는 점심때가 약간 못 미친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산성을 공격하자고 부하들이 말했지만 지휘관인 올리비에 대령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조선군을 얕봤다. 변변한 무기 하나 없고 대포소리만 듣고도 도망을 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호기롭게 외쳤다.

"산성을 점령한 다음에 점심은 전등사에서 먹자."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그날 정족산성의 병사들은 대포 소리에 놀라 도망치기에 바쁘던 병사들이 아니었다. 

점심도 굶은 채 도망친 프랑스군

동문에서 프랑스군은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성 가까이 접근하자 콩 볶듯이 총알이 날아왔다. 성벽 뒤에 숨어있던 조선군이 총알을 퍼부어댔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6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도 60여 명이나 났다. 총소리에 놀란 노새들이 달아나서 점심밥도 간 곳이 없어졌다. 뜻하지 않은 공격에 놀라 우왕좌왕하던 그들은 겨우 정신을 수습해 총을 쏘며 공격했지만 성벽 뒤에 숨은 조선군에게 타격을 입힐 수가 없었다. 이미 전세는 프랑스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병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  정족산성 동문 ⓒ 문희일

이렇게 한 시간여 전투가 치러졌다. 프랑스군은 후퇴를 결정했다. 예상보다 강한 조선군의 화력에 놀라 더 이상 사상자를 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은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점심은 고사하고 부상자를 이끌고 허겁지겁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족산성은 프랑스군에게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안겨주었다. 

전등사 대웅전 안의 기둥과 벽에는 한자로 쓴 낙서들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던 병사들이 남긴 흔적이다. 그들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호를 빌면서 그렇게 절 기둥과 벽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정족산성에서의 전투는 조선이 서양과 싸워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총을 잘 다루는 포수들과 또 지략이 출중했던 지휘관이 있어서 얻은 승리였다. 장군은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다가 적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총을 쏘도록 지휘했다. 

조선군이 가진 총은 100보 밖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가까이 왔을 때 쏘아서 적에게 치명타를 입혀야 했다. 그래서 장군은 유인하는 전략을 세워 적이 정족산성으로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회가 오자 단숨에 적을 제압했다.

바다를 건너면 살아오지 않으리니

양헌수 장군은 순무영의 책임자로 발령을 받은 1866년 9월 3일(양력 10월 11일)부터 10월 26일(양 12월 2일)까지 52일간에 있었던 일들을 글로 남겨놓았다. <병인일기>라는 제목의 그 책에는 국난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겠다는 장군의 각오가 담겨 있다. 

"말에 오르면 집을 잊고, 성을 벗어나면 내 한 몸 잊어버리니(上馬忘有家 出城忘有身)… 지금 바다를 건너면 맹세코 살아 돌아오지 않으리니" 

이렇게 죽기를 맹세하고 싸움에 임한 장군의 비장한 각오를 일기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  전등사 기둥의 한자 낙서 ⓒ 이승숙

프랑스군은 저녁때까지 쫄쫄 굶은 채 왔던 길을 돌아갔다. 삼랑성이 있는 길상면에서 프랑스군이 진을 치고 있던 강화읍 갑곶진까지는 근 40~50리나 되는 거리다. 어른 걸음으로 빨리 걸어도 네 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점심도 못 먹고 쫄쫄 굶은 채 걸어갔을 패잔병 무리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실소가 나온다. 

이날 조선군의 승리는 하늘이 도우신 것이었다. 만약 프랑스군이 후퇴하지 않고 계속 전투를 했다면 조선군은 패했을지도 모른다. 기록에 의하면 총알이 다 떨어져서 백병전을 치를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물러갔다고 한다. 또 그들이 대포를 가지고 왔다면 성을 지키기가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족산성에서의 전투를 '우연한 승리'라고 혹자들은 말하기도 한다. 프랑스군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일부 부대와의 국지적인 접전이었고 프랑스군의 피해 상황도 프랑스측 기록에는 부상 30명으로 나오는 등 자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에 임했기 때문에 얻은 승리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던가. 양헌수 장군과 병사들은 살아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마치 놀이라도 온 양 정족산성을 치러 온 프랑스군과는 정신력에서 벌써 이긴 싸움이었다. 그러니 어찌 이 전투를 우연한 승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비장하고 장렬한 승리였다고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는 전의를 상실하고 허겁지겁 강화도를 떠난다. 그들은 조선 정부로부터 통상의 허락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도 재래식 무기뿐인 조선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들은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했다. 이후 프랑스군의 로즈 제독은 본국의 해군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조선 원정에서 예기치 못한 일들을 겪었다고 하며 자신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빠졌는지를 토로한다. 


▲  정족산성 동문을 지나면 양헌수 장군의 승전을 기리는 비가 있습니다. ⓒ 문희일

그 분들이 있어서 오늘이 있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지 이틀 뒤에 프랑스군은 강화에서 물러났다. 그들은 행궁과 외규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를 포함하여 300여 권의 책을 약탈해 갔다. 그러나 정족산성 안의 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족보가 불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병사들과 양헌수 장군 덕분이었다. 

음력으로 9월 3일인 오늘(9월 26일) 밤은 달빛 한 줌 비치지 않는다. 양헌수 장군과 병사들이 바다를 건넜을 그날 밤도 아마 이랬을 것이다. 격류가 흐르는 바다는 낮에도 건너기가 쉽지 않은 곳인데, 칠흑 같은 한밤중에 건넜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더구나 바닷가는 갯벌이라 배를 댈 곳도 마땅치 않았을 텐데, 그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낸 조상님들의 고초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서서 한 몸을 바쳤다. 고려 때 몽골이 쳐들어오자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서 적과 대항했다. 임진왜란 때도 그러했고 또 병인양요 때의 포수들 또한 그러하였다. 비록 역사에는 이름이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공을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조만간 전등사에 가봐야겠다. 대웅전 안 기둥에서 병사들이 남긴 흔적도 찾아보고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 앞에서는 잠시 머리 숙여 예를 올려야겠다. 동문에서는 맹수를 잡던 그 기개로 적과 맞서 싸웠던 이름 없는 포수들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으리라. 빛도 명예도 없이 사라져간 그들이지만 정족산성 동문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알겠는가. 지나가는 바람결에 그들의 음성이 묻어있을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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