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76651
오종록 교수 성신여대 사학과
[역사 속의 천도] 下. 우여곡절 겪은 조선초의 수도 이전
[중앙일보] 입력 2005.05.21 17:09 / 수정 2006.01.30 22:59
'개경 명당說'에 밀리다 결국 한양으로
보수 공사가 끝나 최근 그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 정궁 경복궁. 태조 3년(1394년)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한 후 창건하기 시작했다. 6백년 역사의 흔적을 지닌 흥례문 앞에서 바라본 하늘이 푸르게 빛나고 있다. [중앙포토]
새 왕조를 세우고 도읍을 옮길 때 조선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1392년에 건국한 뒤 한 달 만에 한양으로 천도하기로 결정을 보고 궁궐 공사를 시작했다가 반대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중단했고, 이듬해에는 계룡산 자락에 신도 곧 새 도읍을 정하고 각도에서 장정들을 동원해 크게 공사를 일으켰다 이 역시 반대 주장이 나오자 중단했다.
새 왕조를 세우고 도읍을 옮길 때 조선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1392년에 건국한 뒤 한 달 만에 한양으로 천도하기로 결정을 보고 궁궐 공사를 시작했다가 반대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중단했고, 이듬해에는 계룡산 자락에 신도 곧 새 도읍을 정하고 각도에서 장정들을 동원해 크게 공사를 일으켰다 이 역시 반대 주장이 나오자 중단했다.
이후 개성과 한양 주변의 여러 곳을 물색하다 결국 1394년(태조 3년) 고려 때 남경이 있던 자리이자 지금의 서울로 확정지어 천도한 뒤, 정종 때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리고는 결국 1405년(태종 5년)에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근대사회에서도 수도를 옮기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 나라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큰 비용을 들이고 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양 천도 때 겪은 곡절은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할 때에는 여기에 더해 풍수설의 문제가 작용했다.
신라 말엽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풍수설은 고려의 도읍을 개경으로 정할 때 개경이 한반도 최고의 도읍지라는 것을 뒷받침한 바 있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도읍으로서의 최고 명당자리는 개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러한 생각의 중심에는 당시의 풍수 전문가들이 있었다.
조선이 건국하자마자 곧 한양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 것은 태조였다. 2년 뒤 한양을 새 도읍으로 확정한 사람도 역시 태조였다. 그리고 한양으로의 재천도는 태종의 집요한 추진이 맺은 열매였다. 조정 신료들의 천도에 대한 생각은 몇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핵심 세력은 태조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들은 새 왕조는 당연히 새 도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태조와 이들 관원의 속내에는 옛 왕조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있는 곳이자 그들이 여러 정치 사건을 일으켜 정몽주를 비롯한 많은 동료 관원의 피로 얼룩지게 만든 곳인 개경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좋다는 정서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신료들은 천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새 왕조의 신료들이 어떻게 왕의 뜻에 반대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들이 내놓고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들은 흉년이 들었으니 천도를 미루자거나, 어느 지역에서 반란이 있어났다는 소문이 있으니 공사를 중지하자거나 하는 식으로 속셈을 드러냈다.
조선왕조는 잘 알려진 대로 무혈 역성혁명에 의해 건국했으며, 따라서 고려의 옛 신하 대부분이 조선의 신하로 변신했다. 권력의 외곽에 포진하고 있는 신료들의 대다수는 대대로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이었고, 당연히 생활 근거가 개경이나 그 부근에 있었다. 그러니 천도가 달가울 리 없었고, 풍수 전문가들의 정서도 비슷했던 것이다.
태조와 그 측근 신료들이 새 도읍지의 조건으로 잡았던 것은 첫째 교통이 편리해야 한다는 것, 둘째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 셋째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당시의 교통은 물길이 중심이었다. 바다와 강을 이용한 교통로가 기간 교통망을 이루고, 육로 교통은 그 곁가지의 구실을 했다. 고려 후기부터 논농사의 발전이 부쩍 빨라진 결과 남부 지방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커졌고, 아울러 남부 지방에 연고를 둔 양반 관료의 수도 급증했다.
따라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바닷길과의 연결도 쉽고, 강이 충청북도 지역과 강원도 북부지역까지 이어져 경상도와 함경도로의 교통 연결도 편리한 지금의 서울 부근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태조와 태종, 그리고 핵심 관료들은 풍수설을 무시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백성들이 모두 풍수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명당이 아니라는 곳에 도읍을 정할 수는 없었다.
1394년 초가을 한양을 도읍지로 확정할 당시 태조는 무학대사와 여러 주요 관원, 그리고 서운관 소속 풍수 전문 관원을 대동하고 다시금 명당자리를 보러 다니고 있었다. 그 첫 순서로 무악을 보고 나서 고려 때 남경 옛 행궁에 머물며 산수를 둘러본 태조는 마음속으로 한양을 새 도읍지로 확정하고서 무학과 중신들의 동의를 얻어내고, 이어서 서운관 관원들에게 동의를 강요하여 겨우 얻어낸 대답이 '풍수로는 개경이 으뜸이고, 한양은 그 다음'이라는 말이었다.
이보다 앞서 풍수 전문 관원들이 추천한 명당자리는 남은 등 권력의 핵심에 있는 관원들로부터 조목조목 반박당한 바 있었다. 따라서 풍수 전문가로서의 권위가 실추된 틈을 타 저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한양도 개경에 버금가는 명당이라는 대답을 받아낸 것이었다.
개경으로 환도해 있던 시기인 1402년(태종 2년) 조선에서 제작한 세계지도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일본까지 담고 있는 이 지도는 15세기 조선의 지도로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기도 한데, 중국의 산은 따로따로 그려져 있으나 조선의 산은 그 줄기가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지도로 드러난 풍수설적 지리관에서 보면, 백두대간에서 개성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나, 한양 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가평 부근에서 끊겨 있다.
즉 당시의 풍수설로는 한양에 큰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6세기에 제작된 여러 지도에는 한양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음이 확인된다. 풍수설이 정치권력에 굴복한 것이든 아니든, 이 시기의 풍수설로는 한양도 이제 어엿한 명당자리로 등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에게 개경은 정몽주를 살해한 기억이 생생한 곳이고, 형제간에 큰 싸움을 벌인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부왕인 태조만큼이나 개경을 떠나고 싶었다. 태종은 태상왕이 되어 있던 태조로부터 '결단코 한양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확인을 받아 부왕에게 효도하는 아들이라는 이미지 창조에도 효과를 보면서 면밀하게 재천도를 추진해 성사시켰고, 이로써 서울이 조선왕조 5백년의 도읍이 될 수 있었다.
오종록 교수 성신여대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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