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30.html
돌아오지 않은 아좌 태자
[한가위별책-백제 깨어나다] - 동아시아의 디오게네스,백제인
정치보다 예술 선택···일본에 남아 쇼토쿠 태자 가르쳐
[2010.09.17 제828호] 김윤경 천안 입장중 역사교사
돌아오지 않은 아좌 태자
지금이야 일본 1만엔권 화폐의 모델이 일본 근대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이지만, 예전 1만엔권의 주인공은 우리에게도 꽤 알려진 쇼토쿠(聖德) 태자(574~622)였다.
쇼토쿠 태자가 누구인가? 그는 일본 고대 아스카(飛鳥) 문화를 꽃피우게 한 주역이 아니던가? 오늘날 일본인에게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쇼토쿠 태자를 꼽는다고 한다.
현재 일본 궁내청에 쇼토쿠 태자의 초상으로 알려진 그림 한 점이 소장돼 있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백제에서 온 왕자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아좌(阿佐) 태자라고 전한다. 백제의 태자가 무슨 연유로 일본까지 와서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을까?
옛 1만엔권의 쇼토쿠 태자.일러스트 조승연
위덕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사실 아좌 태자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국내에는 생몰 연대나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기록한 사서조차 남아 있지 않다. 유일하게 그의 존재에 대해서 전하고 있는 역사서는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뿐이다. <일본서기>에 백제 위덕왕이 아좌 태자를 일본에 보냈다는 기록 한 줄이 전하고 있다.
“스이코(推古) 천황 5년(597년) 4월 여름에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했다.”
<일본서기>에는 더 이상 아좌 태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10세기에 편찬된 <성덕태자전력(聖德太子傳曆) 추고(推古) 5년(597년)조>에 아좌 태자가 쇼토쿠 태자와 만났다는 사실과 함께, 아좌 태자가 그림을 잘 그려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남겼다는 전승이 보이고 있다.
597년경 백제의 통치자는 위덕왕이었다. 그는 사비 백제의 중흥을 이룬 성왕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이 전사하자 왕위에 오른 그는 치세 초반 귀족들의 권력 장악으로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관산성 패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초반에 귀족에게 정치를 맡기며 상황을 관망하던 위덕왕은 주변 국가와의 대외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왕권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성왕의 업적을 기리고 복을 빌기 위한 사찰을 건립하거나, 중국 남조 일변도의 기존 외교정책에서 탈피해 북조와도 통교하는 등 다면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또한 잠시 소원해졌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불경이나 불상 등 불교 문물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아좌 태자의 일본행이 결정됐던 것으로 보인다.
쇼토쿠 태자 초상(일본 궁내청 소장). 아좌 태자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 작품은 원래의 그림을 후대에 모사(模寫)한 것으로, 원본은 나라현 호류지에 보관돼 있다가 1949년의 대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쇼토쿠 태자와의 만남
아좌 태자는 위덕왕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에서 쇼토쿠 태자와 만나 그의 스승이 된다. 아좌 태자는 어떤 연유로 일본으로 가게 되었을까?
아좌 태자가 일본에 건너간 시기는 597년 4월의 일이었다. 일본의 스이코 천황을 대신해 섭정을 하던 쇼토쿠 태자는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해 큰 사찰을 여럿 세웠는데, 그중 하나인 아스카데라(飛鳥寺·본래 명칭 法興寺)가 8년 여의 긴 공사를 마치고 완성된 것이 596년 11월이었다. 일본은 주변국인 백제와 신라에 그 사실을 알렸고, 마침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던 백제 위덕왕이 아좌 태자를 아스카데라 완공을 축하하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사절단의 대표 역할을 맡았을 아좌 태자를 섭정인 쇼토쿠 태자가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여러 번 만남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쇼토쿠 태자는 아좌 태자의 높은 학식과 뛰어난 그림 솜씨에 감탄하게 되었고, 결국 아좌 태자를 스승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들은 인연을 맺었다.
아좌 태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좌 태자가 일본으로 간 뒤 불과 1년 만에 위덕왕이 사망한다. 아좌 태자는 왕위 계승 1순위였으므로, 당연히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지 않았다. 대신 위덕왕의 아우인 혜왕이 70살의 고령으로 즉위했다가 곧 죽고 그의 아들 부여선이 법왕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좌 태자는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일전에 한 지상파 방송사에서 백제 31대 무왕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작가는 아좌 태자의 죽음에 대해 상상력을 통해 흥미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위덕왕이 연로해지자 백제 왕실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졌다. 태자였지만 정치보다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아좌와 그의 사촌인 부여선의 갈등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 속에서 위덕왕이 아좌 태자를 일본에 사절단으로 보내자 부여선이 이를 이용해 조정을 장악하고, 1년 뒤 위덕왕이 죽자 일본에서 귀국하려던 아좌 태자를 자객을 보내 암살한 뒤 아버지 혜왕을 즉위시킨다는 이야기였다. 위덕왕 말기 정치적 상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드라마에서 설정한 스토리는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드라마에서와 같이 설사 아좌 태자가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그가 백제로 돌아올 가능성은 차단됐던 것으로 보인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그가 선택할 수 있던 유일한 길은 일본에 남아 쇼토쿠 태자의 스승 노릇을 하면서 쇼토쿠의 초상을 비롯한 여러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윤경 천안 입장중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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