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25.html
또 하나의 역사, 백제 문화재 수난사
[한가위별책-백제 깨어나다] - 백제, 그 이후
일제의 고의와 개발독재의 무지… 찬란했던 만큼 상처도 깊어
[2010.09.17 제828호] 정상기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실장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 조사단이 목관을 반출하고 있다.
충남 공주와 부여에는 웅진·사비 시대의 주요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유적은 140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상처를 입어왔다. 공주·부여·익산에 남아 있는 백제 문화재의 상처를 짚어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역사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공주시 금성동에 자리한 송산리 무덤군은 복원된 7기 무덤을 포함해 모두 20기 이상의 백제 무덤이 있는데,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이 무덤군을 비롯해 주변 지역이 왕릉급 무덤이 자리했던 곳임이 밝혀졌다. 고분은 표고 130m의 송산을 북쪽의 주산(主山)으로 한 남쪽 경사면에 분포하며, 구릉 윗부분의 1∼4호분이 한 그룹, 그 남쪽 사면에 무령왕릉과 5~6호분이 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 중에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6호분을 보건대 웅진 시기 초창기의 횡혈식 석실분이던 왕실묘가 남조의 영향으로 벽돌무덤으로 전환됐음을 알 수 있다.
공주 지역의 많은 백제 무덤들을 일본인 가루베 지온이 처음 발견해 조사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은 가루베를 발굴자로 알고 있지만, 가루베는 조선총독부의 허가 없이 비공식적으로 발굴했기 때문에 도굴자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학자 탈을 쓴 일제 도굴범들
공주 지역 고분에 대한 학술조사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노모리 겐 등이 1927년 송산리 무덤군 5기를 조사한 것이 효시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무덤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도굴됐고, 송산리 1호분의 경우 1927년 고분 인근의 주민이 도굴 구멍을 뚫어 잔존하던 부장품을 모조리 훔쳐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33년 8월 초 송산리 6호분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자 조선총독부는 후지타 료유사쿠가 이끄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에 앞서 1932년 가을 송산리 무덤군 내부를 통과하는 관람도로 건설공사가 시작됐는데, 그 과정에서 같은 해 10월26일 6호분인 벽돌무덤의 배수구 일부가 발견됐다. 당시 공주고보 교사인 가루베는 이런 사실을 당국에 알리지도 않고 1년 가까이 배수구를 파 들어가 이 무덤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1년 뒤 이 사실을 총독부에 알렸다.
공주 송산리 6호분에 이르는 통로를 개설하다 새롭게 발견된 29호분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아리미쓰 교이치와 고이즈미 아키오 등이 조사했다. 먼저 29호분을 발견한 가루베는 1933년 여름 송산리 6호분을 지나는 왕릉관람도로에서부터 분기점을 뚫고 가다 커다란 석재의 일부를 발견했다. 그는 이 석재를 조금씩 노출시키다 널길(연도·羨道, 고분의 입구에서 주검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의 천정석을 찾아내 마침내 본 석실을 파헤치게 된다. 이때 그 안에 있던 허리띠와 귀고리 등은 행방이 묘연하다. 정식 조사는 1933년 11월15일부터 11월24일까지 열흘 동안 진행됐다. 송산리 무덤들의 발굴 과정을 볼 때 가루베는 무덤의 약탈자임이 틀림없다.
1930년대 대통사지 석조
하룻밤만에 끝난 무령왕릉 조사 발굴
백제 문화재 훼손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한국의 문화재 전문가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 1971년 7월 발견된 무령왕릉에서는 108종 2906점이란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됐다. 그러나 백제사 연구에 큰 전환을 가져온 중대한 발견인데도 무덤 내부의 조사를 불과 12시간 만에 마무리해 발굴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많은 역사적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발굴 당시 주변의 여건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지만, 한국 고고학계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과오라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발굴을 시작하기 전인 6월 말 문화재관리국은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작업을 했다. 배수구를 만들기 위해 봉토의 일부를 파 들어가던 7월5일, 배수구 한쪽에서 작업하던 인부의 삽자루 끝에 봉토와는 다른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조심스레 그쪽을 파내려가다, 6호분에서와 비슷하게 가지런히 쌓은 벽돌들이 나타나자 인부들은 현장에 나와 있던 문화재관리국 감독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인 김원용 박사를 단장으로 조사단이 구성됐다. 7월7일 오후 4시 김원용 단장의 도착과 함께 그동안 멈췄던 작업이 재개됐고, 벽돌로 쌓아올린 부위가 점차 넓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널문의 가장자리 윤곽에서 둥그스름하게 쌓아 돌린 벽돌들이 나타난 뒤 조금 더 내려가 막음벽돌로 채워진 널문의 실체가 드러났다. 발굴이 어느 정도 진행되는 과정에서 폭우가 내려 조사 작업은 중단됐고, 계획된 야간 작업도 취소됐다.
7월8일 오후 4시쯤 간단히 제수를 준비해 조사단 대표와 현지 관계자 등이 참석한 위령제를 올린 뒤 4시15분쯤 드디어 널문을 막아둔 벽돌의 개봉에 들어갔다. 무덤에 가장 먼저 들어간 김원용 관장은 20분 뒤 밖으로 나왔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단장인 김원용 관장이 나섰다. 우선 이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 사마왕(斯麻王), 즉 제25대 무령왕 부부라는 것과 이것을 적은 지석(誌石)의 존재, 그리고 이 무덤은 이전에 도굴이나 발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후 밤 10시께 본격적으로 조사해 유물을 실측하고 반출했다. 그러나 당시 현장에 있던 많은 촬영기자들이 반출되는 중요 유물과 무덤 내부의 촬영을 막무가내로 하는 분위기에서 조사는 차분히 진행될 수 없었다.
무분별한 개발… 묻히거나 떠돌거나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눈에 띄는 유물만 실측했고 작은 유물들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청자육이호를 시작으로 지석과 진묘수(무덤 속에 놓아두는 신상) 등이 반출됐다. 7월9일 아침 날이 밝아오자 작업은 막바지로 향했다. 바닥에 깔린 유물들은 풀뿌리와 함께 큰 삽채 거둬 자루에 담겨 나갔다. 오전 9시께 모든 작업은 종료되고 발굴단은 철수했다. 제대로 했다면 족히 몇 달은 걸렸을 작업은 이렇듯 하룻밤 새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무분별한 도시 개발도 백제 문화재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교촌리 고분군은 공주시 교동에 자리하고 있던 고분군으로, 벽돌무덤 2기와 돌방무덤 4기가 확인됐다. 교촌리는 공주의 중심부에서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에 이르는 중간부에 위치한 구릉지대이지만, 공주가 도시화하면서 구릉의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고분군은 공주의 백제 시대 고분군이 거의 그러하듯, 1930년대 가루베에 의해 조사됐다. 그러나 1972년 가루베의 책 <백제 유적의 연구>에서는 돌방무덤 1호와 4호, 6호분과 벽돌무덤 3호만 기록됐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공주 교촌리 출토품으로 알려진 귀고리 2점이 소장돼 있다.
공주시 제민천변 부근의 반죽동에는 527년(성왕 5) 창건된 대통사지가 있다. 공주대 박물관에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발굴했지만, 이미 건물이 들어선 환경 때문에 정확한 규모 등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현재의 사역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당간지주가 있다. 당간의 두 지주는 동서로 마주 보고 서 있으며 기단부 파손이 심한데, 그 하단부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파손됐다고 한다. 지금의 국립공주박물관 야외 정원에는 대통사지에 있던 석조 2점이 전시되고 있다.
공주 반죽동석조(보물 제149호)가 반죽동 대통사지에서 바로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온 데에 비해, 중동석조(보물 제148호)는 일제시대 일본군이 말 먹이통으로 쓰기 위해 중동으로 옮겨가 1940년 공주박물관으로 옮겨올 당시까지 보관했다. 그래서 이름도 ‘중동석조’라 부르게 되었다. 대통사지에 있는 2점의 석조는 백제 멸망 이후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다 일제강점기에 원래 자리를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된 것이다.
①1910년대 정림사지와 5층 석탑 ②1933년 송산리 6호분 전경 ③1917년대 나성 동문지 전경
일제의 고의적 파괴 행위
토기와 기와를 제작했던 부여 쌍북리 가마는 1941년 5월 부여 시가지 계획도로 공사 중에 발견됐다. 당시 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에서 총독부박물관에 보낸 자료를 보면, 1941년 5월27일 부여 시가지 계획도로 공사 중에 ‘보릿고개’ 동쪽 도로 절개 부분의 땅밑 1.8m 지점에서 가마유구와 함께 기와와 토기 조각들이 발견됐다. 가마는 35도의 경사를 이룬 등요(登窯)로 길이 8m, 아궁이 높이 72cm, 바닥은 계단식이다. 이 유적은 외곽도로 건설과 함께 금성산의 혈맥을 절단해 조선의 기를 없애려는 일제의 의도에 의해 완전하게 파괴돼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부여 정림사지와 5층 석탑은 부여 읍내 중심에 있는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절터 중 하나로, 현재 5층 석탑과 고려 시대의 석보불상이 남아 있다. 이 절터는 서기 1028년에 재건한 사실과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음이 1942년 발굴 조사 때 출토된 ‘대평팔년무진’(大平八年戊辰)명 고려 시대의 암키와에 의해 밝혀졌다. 또한 1979∼80년 충남대 박물관 조사에서 이 절의 가람 배치가 중문·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일탑일금당식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절터에서는 납제삼존불과 소조불·도용·벼루 등이 출토됐는데, 도용은 백제가 중국 북위와 활발히 문물을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높이가 8.33m에 이르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유적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지대석을 놓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를 뒀다. 초층탑신의 4면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과 함께 소정방의 공적이 빽빽이 음각돼 있어 이 탑을 예전에는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건립 시기를 660년대로 추정하기도 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 멸망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대표적인 유물이다.
당나라 군대, 백제 석탑 훼손
현재 국립부여박물관 중정에 전시된 부여석조(보물 제149호)는 원래 부여 동헌 건물 앞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부여 관북리 옛 국립부여박물관 뜰로 옮겼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석조 일부에 정림사 5층 석탑에 새겨진 것과 같이 당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뜻을 새기다 그만둔 흔적이 확인된다. 부여석조는 정림사지 5층 석탑과 함께 백제 멸망의 아픈 흔적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사비 백제의 유물이다.
능산리 무덤군은 총 7기의 고분이 있다. 이 무덤군은 백제 사비 시대의 왕릉으로서 능산리 산등성이에 위치하며, 부여 나성의 동쪽 부분 바로 밖에 있다. 고분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내부 구조는 널길이 달린 횡혈식 석실분이다. 고분 내부 형태는 터널식, 단면 4각형, 단면 6각형이다. 이 무덤군은 청마산성이 위치한 청마산의 남향 사면 끝에 있는데 입지 환경으로는 백제 횡혈식 석실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주며, 이 고분군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도 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군은 1914년 야기 쇼자부로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는데, 1915년 조사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은 도쿄제국대 구로이타 가쓰미와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2·3·5호분이 조사됐고, 3년 후인 1917년에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던 다나이 사이아치, 오가와 게이키치 등이 1·4·6호분을 조사했다.
1937년 능산리 동고분 지역 발굴과 1960년대 중반 복원 작업 중 발견된 7호분 등을 종합하면 능산리 고분군에는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이 14기 정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현재는 7기만 복원 정비돼 있다. 일제에 의한 발굴과 매우 소략한 보고, 광복 이후 무계획적인 복원 정비 작업 결과 일제강점기 때 확인된 고분 중 일부는 훼손되거나 파괴돼 지금은 고분의 정확한 형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됐다.
부여 나성은 부소산성을 기점으로 동남쪽으로 우회하는 한 갈래와 서남쪽으로 도는 한 갈래가 있다. 동남쪽 나성은 길고 서남쪽은 짧다. 전체 길이는 약 8km에 달한다. 남쪽은 백마강에 면하고 있어 나성이 축조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부여 읍내와 금성산, 그리고 적잖은 면적의 농경지가 포함된다.
1920년대 미륵사지 석탑
콘크리트 뒤집어쓴 미륵사지 석탑
나성은 구릉을 이용해서 축조됐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동쪽 나성은 높은 구릉 위에 위치하고 서쪽 나성은 백마강을 따라 통과하는 부분이 3곳이 있는데, 지금은 시가지 개발과 농경지 조성으로 평지 나성은 모두 파괴·멸실됐다. 그러나 구릉에 축조된 나성은 옛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부소산성의 좌우 양편은 구릉의 능선을 이용해 축조됐지만, 동북쪽 모서리에는 청산성을 경유해 동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출입문으로 동문과 서문이 있다. 서문지로 추측되는 곳은 백제대교 지점 가까이에서 발견됐다. 문지의 외부에는 호안석축이 축조돼 그 높이가 1.5m가량 되며 장방형 석재를 사용해 정연하게 축조됐다.
현재 나성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동문지의 경우 부여군에 의해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만 나당 연합군에 의한 훼손과 일제강점기의 부여∼논산 간 국도 건설 등으로 완벽한 복원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형편이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익산시 금마면에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로, 현재 경내는 석탑과 당간지주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1980년부터 진행된 발굴 조사 결과 3탑 3금당식의 가람 배치가 확인됐다. 그리고 이 석탑은 한국에 남아 있는 석탑 중에서 규모와 양식 면에서 가장 고식(古式)이다. 탑의 높이는 14.24m로 화강암 재질의 평면사각형석탑이다. 서남쪽 부분이 무너져 지금은 동북쪽 6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동탑지 주변에서 노반이 발견돼 9층탑이었음이 밝혀졌다. 1층 탑신은 3칸 4면이 평면이고 중앙칸에는 사방에 문이 마련돼 안으로 통하게 돼 있다. 이 탑은 각 부분이 깎은 돌로 따로 구성되며, 그 가구수법(架構手法·물건을 만드는 기법)도 목조건물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석탑 이전에 목탑이 선행됐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다.
미륵사지 석탑은 1400여 년의 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6층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더 이상의 붕괴를 막기 위해 1915년 콘크리트를 발라 흉물스러운 모습이 됐다. 그 후 2001년에는 석탑 석재의 강도가 약해지고 콘크리트가 여러 군데 부서지면서 석탑의 해체·복원이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2009년 1월14일 석탑을 해체하던 중 석탑의 심주석에서 발원자를 기록한 명문 금판과 금제 사리호가 출토돼, 백제 무왕의 아내인 사택적덕의 딸이 석탑을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가 발라진 비운의 백제 석탑의 조성자가 해방 뒤 콘크리트 제거 작업 과정에서 밝혀진 셈이다. 이렇듯 백제 문화재의 수난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역사다.
정상기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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