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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가야멸망 뒤 신라에서 가야 왕실을 계승한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가야불교는 신라에 흡수되거나 수용되어 훗날 신라불교, 고려불교가 융성하는 바탕이 됐다는 견해도 제기한다.
가야가 살아온다 <16> 제3부 가야인의 삶 ⑤ 가야불교
국제신문 2003년 1월10일 박창희기자
즐비한 ‘가락고찰’
김해시 동북쪽의 신어산(630m) 중턱에는 은하사(銀河寺)란 유서깊은 절이 있다. 김해시 어방동 인제대 앞을 지나 가야랜드에 닿기 전에 우회전, 산쪽으로 2.2㎞ 들어가면 병풍같은 바위산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운치를 자아내는 은하사에 닿는다. 가는 길목에는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라고 적힌 팻말이 군데군데 서 있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절 입구에 적힌 ‘가락고찰(駕洛古刹)’이란 문구. 과연 가야시대 절일까.
전승(傳承)에 따르면 은하사는 원래 서림사로 불렸으며 인근 동림사와 함께 인도 아유타국의 왕자인 장유화상(長遊和尙)에 의해 창건됐다. 은하사 대웅전의 동편 벽위에 내걸린 판문에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과 혼인하러온 허황옥과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함께 도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웅전 대들보에는 아유타국 수호신이라는 신어(神魚)가 그려져 있어 신비감을 안겨준다. 신어산이란 이름도 여기서 연유한다.
서림사, 동림사는 임진왜란때 불탔고 그뒤 서림사(은하사)만 재건됐다. 고색창연하게 보이는 지금의 대웅전은 1837년께 중창된 것이라 한다.
이와 비슷한 전설은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의 장유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장유폭포를 따라 꼬불꼬불 산길을 내쳐 오르면 불모산 연봉인 용지봉 어귀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장유암을 만난다. 장유8경이라 이를 만큼 경관이 빼어난 이곳에는 장유화상 사리탑(경남 문화재자료 제31호)이 역사의 수수께끼처럼 서 있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나 제작수법은 고려말께로 짐작된다.
김해지방에는 이같은 ‘가락고찰’이 즐비하다. 신어산의 은하사, 동림사, 영구암(靈龜庵), 인근 무척산 정상의 모은암, 불모산의 장유암, 부산 녹산동의 흥국사가 그러하다. 이들 사찰은 공통적으로 허왕후 도래기인 서기 1세기께 가야불교가 전래됐다는 구비전승 자료를 남기고 있다.
가야불교 남방전래설
김해지방에는 ‘가락고찰’만이 아니라 쌍어문, 신어, 태양문, 코끼리상, 파사석탑 등 인도 등지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많다. 이를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한반도에 불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은 가야라고 주장한다.
향토사학자 허명철(김해 금강병원장)씨는 오랜 실지조사와 연구활동을 통해 가야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제기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파사석탑이나 장유화상과 연관된 기록 및 전승자료를 근거로 하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으로 전해진 것은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이다. 신라는 이보다 훨씬 늦은 527년(법흥왕 14년)이다. 고구려 묵호자가 경북 선산에서 포교활동을 한 것도 눌지왕(417~458)때의 일이다. 372년 이전에 가야에 불교가 전해졌고, 그것도 중국의 북방불교가 아닌 남방불교라면 한국 불교사는 완전히 새롭게 쓰여야 한다.
이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신빙성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없고, ‘삼국유사’의 기록 자체가 후대의 불교적 윤색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부산대 백승충(역사교육) 교수는 “김해의 가야불교 관련 유적과 전설은 대부분 후대의 것으로 가락국 불교가 1세기 전반에 전래됐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그러나 서기 452년에 가락국 질지왕이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는 것은 타당한 것으로 보여 이때를 전래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도 452년을 주목한다. 그는 “왕후사 창건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된다”면서 “대가야나 안라국의 권역에 드는 고령 합천 함안지역 등에도 5세기 전반에 불교가 퍼진 것으로 보이며 5세기 중엽에는 지배층에서 수용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신라불교의 토양 역할
‘삼국유사’에 전하는 가락국 질지왕 2년(452)의 왕후사 창건은 내용이 구체적이고 정황이 충분해 학계에서 대체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연기설화나 창사(創寺) 전설류가 아닌 불교관계 사실이 가야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도 이때다.
질지왕 원년(451)은 신라 눌지왕 35년, 고구려 장수왕 39년, 백제 비유왕 25년에 해당한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인 상태지만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수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록으로는 가야가 신라보다 75년 앞서 불교를 공식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산대 채상식(사학) 교수는 “우리나라 불교의 큰 판도는 고구려 신라가 주류지만, 중국의 남조와 해양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면서 “가야의 경우 남방불교적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신라말 고려초에 김해지방은 독자적 불교 세력권을 형성했을 개연성이 있으며 이 지역의 가야불교 전승 역시 후대에서 ‘가야전통’을 중시한 결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가야불교가 소홀히 여겨진 것은 가야의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가락국은 불교를 수용한뒤 불과 70여년뒤에 망해 발전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김해지방에 가야불교의 실제적 자취가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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