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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14> 제3부 가야인의 삶 ③시간의식과 연중행사
[국제신문] 박창희/2002/12월
가야사 연구는 1980년대 이후 눈부신 진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의 대부분은 가야의 전쟁과 외교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나 국제관계에 대한 연대기적 복원에 국한되었다. 이제부터라도 가야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가야사회의 상식은 무엇이었는지, 또 그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등의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1년 세는 방법 달랐을듯
전기가야(1∼4세기)와 후기가야(5∼6세기)의 시간의식은 서로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는 3세기의 삼한사회가 5월과 10월에 제사의례를 거행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삼한의 하나인 변한은 곧 전기가야이다. 5월제가 농작물의 씨앗을 뿌린 뒤 어린 싹이 자라는 힘을 북돋아 주면서 풍작을 기원하는 것이었다면, 10월제는 농작물의 수확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이었다. 전기가야에서는 1년 동안에 파종과 수확에 관련된 2회의 농경의례가 거행되고 있었다.
반면에 같은 시기의 부여, 고구려, 예 등에서는 12월의 영고(迎鼓), 10월의 동맹(東盟), 10월의 무천(舞天)과 같이 1년에 단 한 차례만 제의가 거행되고 있었다. 한민족의 남쪽지역에서는 연2회의 제의가, 북쪽지역에서는 연1회의 제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사의례를 기준으로 할 때 고대의 남과 북은 1년을 세는 방법이 달랐을 수도 있다. 남쪽의 삼한에서는 지금의 1년을 2년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이른바 ‘1년 2배력’ 또는 ‘춘추력’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전기의 가야사회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는 고대일본의 왜인사회에 대한 연령의 기술은 매우 시사적이다. ‘삼국지’는 3세기께 왜인들의 평균 수명을 80∼100세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규슈 가네노쿠마 유적과 야마구치현 도이가하마 유적에서 출토되는 많은 양의 인골에서 확인되는 평균 수명은 40세 전후이다.
문자기록과 고고학자료의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재로서는 양쪽 자료 모두에 거의 절대적인 신빙성이 인정되고 있다.
봄에 한살 가을에 한살
삼국지’가 전하는 왜인사회의 평균수명 80∼100세는 같은 시기 야요이(彌生) 인골의 평균 연령 40∼50세에 비해 정확히 2배이다. 이는 3세기 왜인사회는 중국과 다른 시간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왜인들의 평균 수명에 2배 되는 숫자가 중국인들에게 전해졌고, ‘삼국지’는 대방군과 일본열도를 오고갔던 사절들의 전문을 통해 기록하였다.
일본열도의 야요이시대는 전기가야에서 전파되었던 쌀농사와 금속기를 토대로 성립하였다. 그런 만큼 전기가야에서 거행되었던 봄과 가을의 농경의례와 동일한 제의가 치러졌을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같은 시대의 고고학 자료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전기가야와 같은 두 차례의 제의를 기준으로 나이를 계산했다면, 당시 중국인의 1년은 왜인에게 2년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봄에 제의를 치르고 한 살 먹고 가을에 축제를 벌여 다시 한 살을 먹는 것 같은 시간의식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만 ‘삼국지’라는 문헌기록과 야요이 인골이라는 고고학 자료가 모두 맞아떨어지게 된다. ‘삼국지’는 같은 시기의 왜인들이 정월과 사계를 몰라 봄의 파종과 가을의 수확을 한 해의 첫머리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과는 달리 지금의 1년을 2년으로 계산하거나 지금의 1년에 2살씩을 먹던 왜인사회의 시간의식을 기록한 것이었다.
전기가야에서 3세기께까지 중국식 역(曆)이 채용되었던 흔적은 없다. 낙랑·대방군과의 외교교섭도 있었지만 매우 산발적이었다. 더구나 중국의 천자에게 한 해의 초하룻날을 받았던 분삭이나 중국식 역법의 사용은 5세기 중 후반이 되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479년에 대가야왕이 양자강 이남의 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장군호와 왕호를 받아 중국의 책봉체제에 가담하게 되면서 중국식 역법의 사용이나 지금과 비슷한 시간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4세기까지의 전기가야는 중국과는 다른 시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시기에 왜인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시간의식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기가야인은 지금의 1년을 2년으로 계산하거나 지금의 1년에 2살을 먹는 것과 같은 ‘1년 2배력’의 시간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수로왕은 157년간 살았나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수로왕의 재위연대를 157세로 전해 그 사실여부를 믿기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기가야의 시간의식을 적용하면 수로왕의 실제 나이는 157세의 반인 78세 정도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등에 이례적으로 길게 기록되어 있는 고대 왕들의 재위기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개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가야가 되면 지금과 비슷한 시간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왕 하지(荷知)는 479년에 중국 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고 장군호와 왕호를 요청하는 상표문을 제출하였다. 이 상표문은 중국력의 연월일로 기록되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중국식 역법과 같은 시간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또 대가야의 가실왕은 5세기 후엽에 우륵에게 가야금 12곡을 작곡케 하였다. 가야금 12곡은 12개월의 율을 본떠 만들었던 것으로 전한다. 전기가야와 달리 후기가야에서는 중국과 같이 1년을 12개월로 계산하는 역법이 채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식 역법에 따랐던 연중행사도 확인되고 있다. ‘일본서기’는 6세기 중반에 안라국(安羅國·함안)을 비롯한 가야 각국에서 정월에 제사가 거행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가야다움의 재발견
정월의 제사는 백제도 당연시하던 시대적 상식이었고 가야인의 정신세계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기가야와 후기가야의 시간의식의 차이는 가야의 사회적 진전과 왕권의 발전을 보여 주는 새로운 지표가 될 수 있다. ‘1년 2배력’이라는 전통적 시간의식에서 지금과 같은 중국식 역법의 채용이라는 시간의식의 변화는 가야사회의 발전과 국가형성의 획기적 기준을 설정하는 새로운 지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의식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연중행사이다. 절기에 따른 연중행사는 동일집단의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가야의 연중행사는 정치체적 구별보다 더 근본적인 백제나 신라와의 구별이 되게 하였을 것이다.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던 가야제국을 ‘삼국유사’가 하나의 공동체와 같이 6가야로 기술했던 것은 신라나 백제와 구별되는 가야의 문화적인 동질성에 기초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동질성이란 가야사회만의 연중행사를 통해 타 집단에 대한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확인되었을 것이다.
가야사회의 연중행사를 복원하는 작업이야말로 가장 가야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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