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adada.tistory.com/354 , http://bit.ly/1xPd91p
가야가 살아온다 <21> 제4부 가야의 힘과 미 ④ 전쟁
국제신문
경남 양산시 원동의 가야진 나루 전경. 삼국사기에 가야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현장으로 나오는 황산진은 바로 이곳을 지칭했을 가능성이높다
황산진 전투
‘탈해이사금 21년(서기 77년) 8월에 아찬(阿) 길문(吉門)이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가야병(加耶兵)과 싸워 1천여명을 목베었다’.
기록에 보이는 가야와 신라의 첫 군사적 충돌이다. 두 나라는 이후 ‘피튀기는’ 싸움을 계속한다. 전쟁상황을 조금 더 보자.
‘지마이사금 4년 봄 2월에 가야가 남변(남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 가야인이 숲속에 군사를 숨기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알지 못했다. 똑바로 나아가니 가야 복병이 일어나 몇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포위망을 뚫고 퇴각했다’.
‘지마이사금 5년(116년) 가을 8월에 장군을 보내 가야를 치게 하고, 왕이 직접 정병일만(精兵一萬)을 이끌고 뒤따랐다. 가야가 성을 굳게 닫고 지켰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므로 되돌아왔다’.
모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이다. 주어는 예외없이 신라다. 기록의 사실 여부와 편년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몇가지 메시지가 있다. 신라에 맞서고 있는 가야세력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로왕대 어떤 기사는 자신감이 넘쳐 난폭하기까지 하다.
‘파사이사금 23년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서로 강역을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을 청하였다.
왕이 어렵게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하고 지식이 많다고 생각하여 불러 여쭈었다. 수로가 의견을 세워, 분쟁이 되는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 판결을 해준 수로왕은 낮은 신분의 사람이 접대하는데 노해 아랫사람을 시켜 보제(保齊)를 죽이고 돌아갔다’.
이들 기사가 언제적 이야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낙동강을 경계로 한 가야와 신라의 팽팽한 대결상황으로 봐서 소국단계를 지나 자기 세력권 내에서 연맹장 지위를 확보한 3세기 무렵의 사실로 짐작된다”고 지적한다.
주목되는 것은, 구체적인 전쟁장소로 황산진구(黃山津口) 또는 황산하(黃山河)가 나오고 있다는 점. 황산진은 낙동강 하류인 양산시 원동, 물금 일대를 말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는 김해 가락국의 동쪽 경계가 황산강(黃山江)이라고 언급해놓고 있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맥이 닿는다.
낙동강 가야진나루에는 지금도 ‘가야진사(伽倻津祠)’라는 사당이 남아 있고, 지역주민들은 전통민속으로 ‘용신제’를 행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양산시 원동면과 김해시 상동면이 마주보는 형국으로, 고대 경주의 신라세력과 김해의 가야세력이 맞섰던 현장일 가능성이 높다.
양산지역이 언제 신라로 편입됐느냐는 논란이 따르지만, 양산 북정 고분군(사적 93호)과 부부총에서 출토된 많은 가야계 유물로 미루어보건대, 이른 시기에 가야계 정치집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학계는 북정고분군이 대체로 5세기 중반께 신라로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군 5만에 대적?
가야에 상비군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고분의 출토유물로 보아 김해, 함안, 고령 등에 포진한 군사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길림성 집안의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는 가야의 군사력을 유추할 수 있는 편린이 있다.
서기 400년 광개토왕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보기(步騎) 오만(五萬)의 군대를 남쪽으로 파견,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진출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격퇴한다. 이른바 광개토왕 남정(南征)이다. 당시 고구려군은 동북아 최강의 철기병과 보병을 움직이고 있었다.
광개토왕 남정은 임나가라(김해세력으로 추정)에 엄청난 타격을 가해 전기가야를 해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신라·백제·가야·왜의 국제적 역학관계 변화를 유발했다.
논란은 있지만 이때 김해세력의 일파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또다른 일파는 경남 합천(옥전고분)으로 갔다고 보는 가설도 있다(신경철, 김태식, 조영제 교수 등 주장).
역시 논란은 있지만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아라가야의 수비병)’의 존재도 5세기 초반 가야군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지난 93년 발굴된 함안 마갑총은 여러 철기부장품과 함께 국내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의 말갑옷이 수습돼 5세기초 대고구려전을 수행했던 안라국 왕자의 모습을 떠올려준다.
비록 고구려군에 패퇴했다고는 하나 가야 연합군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성대 윤석효(사학과) 교수는 “가야군이 신라의 대병과 맞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더러 보이고 심지어 신라와 구원 관계를 주고받았다는 내용도 있다”며 “삼국의 틈바구니에서 가야가 최소 500여년을 버틸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만한 정치력과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또 “고구려 남정때 백제-가야-왜의 연합군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황상 가야군이 주력을 이루어 고구려 5만 군대에 대적할 정도였다고 하니 가야군의 규모와 분위기를 엿볼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야의 마지막 전쟁은 경북 고령에서 펼쳐진다. ‘삼국사기’는 ‘가야가 반(叛)하여 신라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했다’는 기사로 가야사를 끝맺고 있다. 신라 진흥왕 23년(562년) 7월의 일이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과) 교수는 “‘삼국사기’를 토대로 김해와 경주의 세력판도를 보면, 3세기 이전의 전반기에는 가야 우세, 중반기에는 균형, 5세기 이후 후반기에는 신라 우세로 돌아갔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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