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답사기 2 : 환인 (오녀산성)
둘째날(8월 6일) 1
2005.09.14 13:01:59 백유선
2005.09.14 13:01:59 백유선
오녀산성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이 자행되고 있는 시점에서의 고구려 유적답사인 만큼, 답사 일정은 여느 관광과는 달리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답사기간 동안 6시 모닝콜, 7시 식사, 7시30분에 짐을 차에 싣고 출발하는 시간표에 일행은 모두 잘 따라 주었습니다. 저 역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 하나라도 더 자세히 보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에 대해서는 만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주몽이 첫 도읍지로 삼은 오녀산성을 올라 산성을 살펴보고, 오녀산성 전시관을 구경한 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집안으로 가 여장을 푸는 일정입니다.
미니버스에 나눠 타고 오녀산성 입구로 출발했습니다. 매우 불행하게도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사진 촬영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었죠. 한국에서 카메라를 덮을 수 있는 방수 커버를 구입해 가기는 했지만 아쉬웠습니다. 물기에 치명적인 전자 장비인데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을 수도 없고 해서 악조건 속에서도 방수 커버를 씌우고 계속 촬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촬영을 어렵게 하는 것은 또 있었습니다. 바로 단체 답사라는 것 때문이었죠. 구경하고 이동하고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가려 유물, 유적만을 촬영하기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사진 촬영을 위해서는 바삐 움직여야 했습니다. 먼저 가서 촬영하고 기다리거나, 아니면 뒤쳐져서 촬영 후 따라가야 했죠. 따라서 서교수의 안내 강의를 제대로 듣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다시 오기 어려운 곳이니 사진은 꼭 찍어야 했기 때문에 사진 촬영을 주로 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녀산성 입구는 생각보다 잘 정비되어 있었고,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알리는 내용의 기념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중국이 최근 2,3년간 급하게 발굴하고 정비해 놓은 것이라 합니다. 그 동안 방치해오던 고구려 유적을 동북 공정을 통한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 시도와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뒤늦게 손대기 시작한 거죠. 최근 2,3년간의 발굴 성과가 중국 정부 수립이후의 발굴 성과보다 몇 배가 많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최근에서야 외국인에게 공개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에 오른다는 생각에 상당히 긴장되면서도, 모두들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찾는다는 자부심을 갖는 듯 상기된 표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부여를 탈출한 주몽이 비류수 유역 첫 도읍을 정한 곳은 어떤 곳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기원 전 37년부터 700여 년 계속된 고구려의 역사를 앗아가려는 중국의 음모를 규탄하는 발걸음인 듯 모두들 힘들어하지 않고 오르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천여 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이곳에 올 수 있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발걸음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생각이 교차하는 속에서 산성 안에 들어서면서 서교수의 상세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저로서는 강의는 듣는 듯 마는 듯, 이곳저곳 살펴보랴, 사진 찍으랴, 떨어지는 비에 카메라 간수하랴,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을 통해 오녀산성의 자세한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멀리서 바라본 오녀산성. 보이는 곳은 서쪽 면입니다. 좌측에서 1/3지점 아래로 선처럼 보이는 곳이 올라가는 길입니다. 기원전 37년 부여에서 도망쳐온 주몽이 이곳에 처음 도읍하고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오녀산성 입구 세계유산 기념물과 성벽 구실을 하는 자연 암벽. 이곳에서는 오녀산산성이라고 합니다.>
<94 세이신 할아버지와 80세 할머니는 가마와 같은 탈것으로 산성에 올랐습니다.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 생각보다 힘든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곳을 통해서만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동쪽 면은 자연 경사로이기 때문에 성을 쌓았습니다. 즉 서쪽은 자연암벽을 이용하고, 동, 남, 북쪽의 암벽이 없는 부분은 성을 쌓은 구조의 산성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이런 곳이 또 있습니다.>
<오녀산성의 서문입니다. 최근 발굴하여 정비한 모습입니다. 이 성문에서 보여 주는 특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의 성문에서 볼 수 있는 옹성의 초기 형태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옹성이란 동대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문 앞에 둥글게 성을 쌓아 적군이 성문을 공격하기 어렵게 만든 시설물을 말합니다. 고구려의 옹성은 대개 凹자 모양으로 만들어 성문을 공격하려는 적을 양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마치 위병소처럼 보초들이 근무하는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문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이 그것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시설물은 우리나라의 어떤 성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용도가 무엇인지는 추측만 할뿐입니다.>
<그림으로 본 오녀산성 서문>
<오녀산성 서문의 초병 근무시설로 추정되는 시설물>
<오녀산성 동문 바깥쪽에서 본 모습>
<오녀산성 동문 안쪽에서 본 모습. 이 성문 역시 초기 옹성의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쪽 그림을 참고하시길.... 비는 계속 오락가락 했습니다.>
<그림으로 본 오녀산성 동문>
<오녀산성 동쪽 성벽. 이런 성벽들은 모두 3세기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주몽이 도읍할 때에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간단한 토성을 쌓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
<오녀산성 동쪽 성벽. 겉쌓기 한 일부가 부서져 속쌓기 한 돌이 드러나 보입니다. 고구려 축성법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은 겉쌓기와 속쌓기에 있습니다. 겉쌓기 한 돌은 직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들어내 보면 마치 옥수수 알갱이처럼 삼각형으로 생겼습니다. 그 사이사이에는 속쌓기 한 뾰족한 돌이 박혀서 단단한 성벽을 구성하고 그것이 1천 수백년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 사진과 그림을 참고하세요.>
<오녀산성 전시관의 고구려 성벽에서 가져온 돌. 좌측 하나와 우측 두개는 속쌓기에 사용한 것이고 중간의 두개는 겉쌓기 한 돌입니다. 옥수수 알갱이처럼 생겼죠.>
<고구려 축성법. 겉쌓기와 속쌓기>
<집안 환도산성의 고구려 축성법. 겉쌓기와 속쌓기>
<오녀산성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초석으로 보아 왕궁터로 추정됩니다.>
<오녀산성 천지. 산 정상에 만들어진 산성이 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수입니다. 고구려 성의 대부분이 산성이지만 모두 물을 구할 수 있는 시설이 있습니다. 천지라 이름 붙여진 이 저수지 곁에는 물이 솟는 우물이 있습니다. 오녀산성에는 천지 외에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또 한 곳 있습니다.
<오녀산성 온돌 유지. 오녀산성에는 왕궁터를 비롯하여 창고터, 주거지 등 여러 곳의 건물터가 발굴되었습니다.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우리 민족만의 난방시설인 온돌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중국이 고구려가 자기 역사라고 우기면 될까요?>
<오녀산성 점장대. 오녀산성 가장 높은 곳 장대가 있었던 곳입니다. 장대는 멀리를 관찰하고, 전투 시에는 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중국에서는 점장대라고 합니다.>
<오녀산성 장대에서 내려다 본 비류수와 환인댐, 환인시내. 사실 오녀산성은 초기의 도읍지이긴 하지만 이곳이 장시간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너무 높은 곳이고 장소가 그리 넓지 않으며 출입이 불편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산 아래 쪽에 실질적인 생활의 중심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환인 주변의 평지성인 상고성자성이나 하고성자성이 그곳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합니다. 즉 오녀산성은 주몽이 처음 도읍한 곳이기는 하나 나중에는 위급한 전투 시에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죠.
그러나 그 역할도 약 40년 만에 막을 내리고 이후에는 고구려의 여느 산성처럼 산성으로서의 역할만을 하게 됩니다. 즉 수도를 기원 3년에 집안의 국내성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모두 나중에(3세기경) 쌓은 것입니다.
<오녀산성 앞에서. 산성을 내려오니 비가 잠시 주춤했습니다. 단체 사진도 찍고 또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좌로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의령의 도덕교사, 심양의 조선족가이드 김혜연씨, 월간 중앙 기자, 두 분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분, 빨간 셔츠는 서길수 교수, 필자, 맨 우측은 여행사 TC>
오녀산성을 답사하고 내려오면서도 여러 가지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주몽은 왜 이렇게 높은 곳에 도읍했을까? 지금의 성벽은 과연 주몽 때 쌓은 것일까? 첫 도읍 후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기까지 이곳이 계속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을까? 나름대로의 실마리는 나중에 서교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찾을 수 있었습니다.
주몽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부여에서 도망쳐 나온 위기 상황 속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를 찾다보니 이곳이 선택되었을 가능성과, 또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처음 나라를 세우는 일이니 만큼 역시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어차피 정확한 답을 찾기는 어려우니 합리적인 추정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현재의 성벽이 3세기경에 쌓은 것이라는 것은 서교수에게 물어 들은 대답이었습니다. 즉, 주몽이 처음 도읍할 때는 자연 지형만으로도 안전한 이곳이 선택되었으며 간단한 토성을 쌓았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성벽은 고구려의 다른 산성과 마찬가지로 국내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산성의 하나로서 나중에 그 중요성을 생각하여 축성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첫 도읍지인 만큼 성역화할 필요성도 그 이유의 하나가 아니었을까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출입이 불편한 이곳이 40여 년 동안 계속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인지도 의문이었습니다. 주몽이 비류수를 올라가 송양왕의 비류국을 흡수한 것을 보면 주몽의 고구려는 곧 그 세력을 넓혔을 것으로 생각되고, 그렇다면 좁고 불편한 이곳보다는 평지에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환인 주변의 평지성인 상고성자성이나 하고성자성을 그곳으로 추정합니다.
즉 평시에는 평지성에서 생활하다 적의 침입이 있는 전시에는 산성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는 곳이죠. 이후 수도를 옮긴 국내성이나 나중의 수도인 평양성도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형태로 되어 있어 충분히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답사할 때 전문가나 관심이 많은 사람과 같이하는 것은 의문점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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