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0413.22016201420
현재 허왕후릉 앞에는 '가락국수로왕비(駕洛國首露王妃) 보주태후허씨릉(普州太后許氏陵)'이라 쓰인 비석(사진)이 서 있습니다. 이 비석은 조선 인조 25년(1641)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로왕릉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보주태후'란 네 글자의 의미에 대해 처음으로 눈여겨보았던 분이 국립전통문화학교 총장이셨던 김병모 교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보주태후(普州太后)는 허왕후가 돌아가신 뒤에 지어 올렸던 일반적인 시호로 보아왔습니다. 서기 189년에 허왕후가 돌아가시자 가락국 사람들은 땅이 꺼진 것 같이 슬퍼했고, 자애로웠던 허왕후를 높여 기리는 말로 '큰 세상의 태후'라는 시호를 올렸던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김병모 교수님은 '보주'가 허왕후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국 사천성 안악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출발했던 허왕후 일족이 중국 남부 사천성 안악현에 정착하였다가, 기원후 47년의 난리를 피해 김해로 이주해 왔던 것을 보여 준다는 겁니다.
허왕후릉 아래 파사각 안에는 붉은 보랏빛을 띠는 파사석탑(婆娑石塔·사진)이 있습니다.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가락국에 올 때 거친 바람과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 하여, 진풍탑(鎭風塔)으로도 불립니다. 이 탑은 원래 호계천 가의 호계사 터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던 것을 허왕후릉에 옮겨 쌓은 것이라 합니다. 호계천은 복개되어 지금의 호계로가 되었습니다. 실은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시대의 일연스님도 이 탑을 보시고 계십니다. 일연스님은 이 탑 돌의 재질이 우리나라에 잘 나지 않는 파사석이라는 것도 지적하셨고, '본초강목'에 있는 이 돌의 특성에 대해서도 기록하셨습니다.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응고되지 않으며, 불에 태우면 유황냄새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김해시내 금강병원장으로 계시던 허명철 박사께서 돌가루를 내어 실험해 보았더니 실제로 그러하였답니다. 물론 이런 실험이 곧 허왕후가 이 파사석탑을 싣고 왔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초강목'이 기술하는 파사석의 특징을 확인한 것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문자기록과 고고자료에 의하는 한 파사석탑을 허왕후의 도래에 직접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남쪽 바닷길을 통해 가야지역에 전해지던 선진문물의 한 갈래에 대한 전승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12> 수로왕비릉을 찾아서 ③
허왕후릉 보주태후 비문은 후대 사람들이 붙인 시호인 듯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4-12 20:15:28/ 본지 16면
보주댁이라고요?
현재 허왕후릉 앞에는 '가락국수로왕비(駕洛國首露王妃) 보주태후허씨릉(普州太后許氏陵)'이라 쓰인 비석(사진)이 서 있습니다. 이 비석은 조선 인조 25년(1641)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로왕릉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보주태후'란 네 글자의 의미에 대해 처음으로 눈여겨보았던 분이 국립전통문화학교 총장이셨던 김병모 교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보주태후(普州太后)는 허왕후가 돌아가신 뒤에 지어 올렸던 일반적인 시호로 보아왔습니다. 서기 189년에 허왕후가 돌아가시자 가락국 사람들은 땅이 꺼진 것 같이 슬퍼했고, 자애로웠던 허왕후를 높여 기리는 말로 '큰 세상의 태후'라는 시호를 올렸던 것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김병모 교수님은 '보주'가 허왕후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국 사천성 안악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출발했던 허왕후 일족이 중국 남부 사천성 안악현에 정착하였다가, 기원후 47년의 난리를 피해 김해로 이주해 왔던 것을 보여 준다는 겁니다.
큰 세상의 태후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김해에서 조사되고 있는 고고학 자료와 김해 허씨의 체질적 특징을 가야시대의 인골과 비교해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은 이미 앞에서 했습니다.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인 몇 가지의 반증을 들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보주는 북주(551~581년)가 설치하고, 송(960~1279년)이 폐지했던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허왕후(48~189년)의 시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둘째, '후한서'가 전하는 서기 47년의 난리는 남군(南郡)의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켜 무위장군 유상이 진압하고 그 무리를 강하(江夏)에 강제로 이주시켰던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허 씨 성의 집단은 보이지 않으며, 강하는 현재 호북성의 수도 무한(武漢)입니다. 사천성 안악현과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보다도 먼 거리입니다. 셋째, 허왕후능비에 '보주태후'라는 명문이 쓰인 것은 조선시대 인조 25년(1641)의 일이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지어 올렸던 '큰 세상의 태후'라는 일반적 칭송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파사석탑
허왕후릉 아래 파사각 안에는 붉은 보랏빛을 띠는 파사석탑(婆娑石塔·사진)이 있습니다.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가락국에 올 때 거친 바람과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다 하여, 진풍탑(鎭風塔)으로도 불립니다. 이 탑은 원래 호계천 가의 호계사 터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던 것을 허왕후릉에 옮겨 쌓은 것이라 합니다. 호계천은 복개되어 지금의 호계로가 되었습니다. 실은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시대의 일연스님도 이 탑을 보시고 계십니다. 일연스님은 이 탑 돌의 재질이 우리나라에 잘 나지 않는 파사석이라는 것도 지적하셨고, '본초강목'에 있는 이 돌의 특성에 대해서도 기록하셨습니다.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응고되지 않으며, 불에 태우면 유황냄새가 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김해시내 금강병원장으로 계시던 허명철 박사께서 돌가루를 내어 실험해 보았더니 실제로 그러하였답니다. 물론 이런 실험이 곧 허왕후가 이 파사석탑을 싣고 왔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초강목'이 기술하는 파사석의 특징을 확인한 것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문자기록과 고고자료에 의하는 한 파사석탑을 허왕후의 도래에 직접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남쪽 바닷길을 통해 가야지역에 전해지던 선진문물의 한 갈래에 대한 전승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잘린 거북이 목
끝으로 여담 한 가지. 지금의 허왕후릉과 구지봉은 돌 구름다리에 흙을 덮어 연결되어 있지만, 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부산~마산 사이의 국도를 개설하면서 잘라 놓았던 지맥을 새로 이어 놓은 것이랍니다. '삼국유사'는 허왕후릉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구지봉에 대해 거북이가 엎드려 앞으로 고개를 내민 형상이라 했습니다. 바로 여기가 거북이의 목에 해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김해의 어르신들은 "일본 놈들이 거북이 목을 잘랐기 때문에 김해에서 더 이상 큰 인물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탄식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름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지맥을 연결했더니 김해에서도 인물이 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한림면 출신의 박찬종 씨가 그 분이라 하더니, 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 김중권 비서실장을 들기도 하고, 요즈음은 진영 출신의 노무현 대통령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믿으시는 편입니까? '믿거나 말거나'의 한 토막이었습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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